호텔방에서 푹 쉬고 난 뒤라몸이 개운하다. 예약할 땐 포함되어 있지 않던 조식을 준다고 해서 어제 체크인할 때 쿠폰을 받아두었었다.
아싸~~~!!
앞으로 펼쳐질 일들은 까맣게 모른 채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잔뜩 신이 나있다. 다양한 종류의 빵들과 신선한 야채, 과일 등 알찬 구성의 음식이 가득했다. 흥얼거리며 접시에 먹고 싶은 것들을 담으며 나만의 영국식 아침식사를 만들어서 먹었다.
역시 호텔 조식은 훌륭했다.
황량했던 그날의 기억 The Needles
오늘의 첫 여행지는 예전에 브라이튼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갔었던, 영국 최남단에 있는 섬 '아일 오브 와이트(Isle of wight)'이다. 시간을 간직한동화 같은 아름다움에 반해서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다시 와야지 했었다. 이렇게 빨리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사실 혼자서는 뭐든 하지 않는 소심한 성격이다. 식당에서 혼자 밥 먹은 경험도 없지 않은가? 지금까지 뭔가에 홀린 듯 엉겁결에 여행을 다녔던 것 역시기적 같은 일이었다.
'할 수 있지? 나는 아줌마니까.. 못 할게 뭐가 있어.'
한참을 망설인 끝에왕복 티켓을 끊고 라이드로 향하는 페리에 올라탔다. 꼭 해야 한다는 집념이 배까지 타게 만들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여행할 때, '알카트라즈 감옥'으로 들어가는 배 안에서 한국인 여행객을 만난 적이 있었다. 긴 생머리가 아름다웠던 그녀는 홀로 씩씩하게 여행을 왔다고 했다. 친구들과 조촐하게 준비한 초콜릿을 함께 나눠먹으며 짧은 시간에 많은 대화를 했었다. 혼자서 배도 타고 자유로이 여행 다니는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했었다.
오늘만큼은 내가 멋진 사람이 된 것 같다.
떨리지만 용기 내어 올라탄 페리는 물살을 가르며 순항 중이다. 자신감이 충만해진 나는 바깥구경을 하며 바닷바람을 쑀다.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운 영혼은 바람을 타고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 또한 해냈다는 성취감에 젖어 누구보다 신나게 항해를 즐겼다.
그렇게 약 20분을 달려서 섬에 도착했다. 첫 발을 내디딘 기분은 정말 묘했다. 이곳을 떠날 때 아쉬워했던 내 표정이 떠올랐다.
'다시는 못 올 줄 알았는데..'
섬까지 길게 뻗은 피어를 부지런히 걸으며 오랜만에 보는 마을의 전경을 사진에 담았다. 반가움도 잠시 또다시 시작될 버스투어에 잔뜩 긴장된 모습으로 정류장을 찾았다.
목적지인 '알룸베이(Alum Bay)'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는 없다. 중간에 갈아타야 하는데 배차시간이 길기에 버스를 놓치면 한 시간이 날아가버린다. 미리 조사해 온 버스시간에 맞추기 위해 부지런히 걸어갔다.
그 첫 번째 버스가 들어왔다. 1 day티켓을 사고 버스에 올랐다. 2층에 자리 잡고 앉았다. 꺄~~ 오랜만에 타보는 2층버스의 맨 앞자리에 앉은 기분은 짜릿했다. 좁다란 골목을 굽이굽이 잘도 달린다. 마을의 구석구석 숨은 곳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느리다...!
버스가...
상당히...!!!
다음버스를 바로 갈아타야 하는 나는 슬슬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경유지에서 뜻하지 않게 시간이 지체되면 일정에 차질이 생긴다. 더군다나 버스시간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기에 꼭 맞아떨어지게 환승해야 한다. 버스는 아슬아슬하게 도착예정시간보다 5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스쳐 지나가는 도시, 뉴포트(NewPort)에 왔다.
재빠르게 버스에서 내린 뒤 주위를 살폈다. 있다! 다행히 버스가 출발하지 않고 있었다. 후~~!! 열심히 달려서버스 탑승에 성공했다. 긴박했던 시간들을 흘려보내고 지금부터는 창밖 풍경에 집중하며 긴장했던 마음을 내려놓아 본다.
버스는 끝없는 시골길을 약 1시간 정도 부지런히 달려서 알룸베이에 도착했다. 영국인들이 사랑하는 휴양지, 아일 오브 와이트에서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더니들즈(The Needles)'가 오늘의 핵심이다.
좌충우돌 대중교통 여행을 마치고 땅을 밟는 기분은 상쾌했다. 시골냄새가 정겹다. 맑은 공기 가득 들이키며 낯선 곳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이제 리프트를 타고 해변으로 내려가면 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버스에서 내릴 때도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여긴 유명한 관광지인데 말도 안 되게 적막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공중에는 빨강, 파랑, 노랑... 색색의 리프트가 멈춰있었다. 보통은 아무리 사람이 없어도 리프트는 계속 운행하고 있지 않은가? 먼 길 왔으니 일단은 가보자. 땅에는 먹이를 나르는 개미조차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가보자! 리프트의 시작지점으로 보이는 하얀색 건물이 나타났다.
관광객들로 북적여야 할 곳은 많이 한적했다. 광고 전단지가 바닥에서 모래와 함께 굴러다니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건물 내부는 아무래도 문을 닫은 모양이다.
오늘은 금요일, Thanks God It's Friday!
일주일을 부지런히 달려온 사람들은 이렇게 부른다. 주말을 손꼽아 기다리는 그 시작, 관광지는 주말특수를 노릴 수 있는 금요일!
'왜? 아무도 없는 거야? 대체 왜?'
멍 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는데 필리핀에서 왔다는 남자 두 명이 말을 걸어왔다.
"니들스에 가시려는 거죠? 리프트는 운행 안 해요."
"네? 뭐라고요? 지금 리프트가 멈춰있는 게 맞는 거예요? 오늘만 운행 안 하는 건가요?"
"아니요. 4월 이후에 다시 정상운행 한대요. 헛걸음했어요."
OH, MY GOODNESS!!!!!
고민고민 끝에 혼자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 거 가족여행으로 많이 가는 휴양지면 어떠냐며, 그래도 먼 길 가니 가고 싶은 곳은 다 가봐야지 않겠냐며, 정말 큰 마음먹고 섬의 끝에 가보자며, 어렵게 어렵게 여기까지 왔는데!
허탈한 마음 가눌 곳이 없구나...
다리에 힘이 풀려서 의자에 주저앉았다. 충격을 받아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도 나에게 소중한 정보를 알려 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았다. 서로의 행운을 빌어주었다.
아무도 없는 관광지에서 완벽하게 혼자가 되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이곳에서 보낼 시간을 여유 있게 잡아서... 그러니까 여기에 올인하고 온 계획이 틀어져서 음... 머리가 고장 났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뇌의 원활한 활동을 위해 준비해 온 시리얼바로 당충전을 하기로 했다.
'Special K'
예전부터 즐겨 먹던 간식이다. 오랜만에 옛 추억을 그리며 에너지바를 먹었다. 보수공사를 한다는데 뭐 어쩌겠나... 이후에 오는 사람들이 더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관광할 수 있다면 그걸로 돼.. 긴 뭐가 돼? 나는 못 탔는데! 다시 또 여기에, 언제 올 줄 알고??
천사와 악마의 싸움에서 악마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온갖 짜증이 솟구쳐 올라왔지만 받아주는 이 하나 없다.걸어서 내려가도 되지만 거리가 꽤 되고 인적이 드문 곳에서 함부로 혼자 다니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다. 이렇게까지 사람이 없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
몸속으로 들어가는 당분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좋아지지 않아 혼자서 씩씩대고 있는데 저 멀리 이제 막 버스가 도착하는 것이 보였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곧장 다른 곳으로 갔다. 어디로 가는 걸까? 유원지도 문을 닫아서 놀이기구도 탈 수 없을 텐데... 근처에 또 다른 관광지라도 있나? 여러 생각들로 뒤범벅이 된 뇌를 위해 마지막 남은 조각을 집어삼키고 있는데 뒤이어 내린 노부부가 다가왔다.
"네... 맞아요. 보시는 대로 체어리프트는 운행하지 않고 있어요."
"어머나! 진짜네요?"
내 말에 노부부는 깜짝 놀랐다. 옅은 미소와 함께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리프트는 4월경에나 다시 재개장한다고 덧붙여 말했다. 그들과 눈만 마주쳤을 뿐인데 동질감을 느꼈다. 말하지 않아도 이곳에서 만난 우린 모두 한마음이었다. 어처구니없어 그저 웃음만 나오는 모습 역시 똑같았다.
허무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아까 필리핀 남자들이 올라갔던 전망대에 올라갔다. 바닷바람이 제법 거세게 불어왔다. 저 멀리 사진에서만 봤던 더 니들즈 암석이 보였다. 가까이서 보면 어떨까? 오랜 시간을 버텨 온 굳건한 암석은 신비한 자태를 뽐내며 멀리서도 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다양한 지형변화를 겪으며 자연스레 물든 절벽색깔이 예술이라던데.. 그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홍보책자에서 본 사진이다. 가까이할 수 없어 더욱 아련하기만 하다.
머리카락이 주체 안될 정도로 바람이 더 강하게 불었다. 이런 날 줄 하나에만 의지한 채 내려가야 하는 체어리프트를 타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애써 상황을 합리화시키며 먼발치에서 풍경을 눈에 담고 쓸쓸히 돌아섰다.
그림처럼 조용한 Shanklin
처음으로 자동차가 간절해졌다. 버스를 타고 여행하는 것이 즐겁다며 하하 호호거리던 것이 엊그제의 일이었는데 이제는 버스여행이 힘들다고 편한 것을 찾는다. 먼 길을 힘들게 찾아왔는데 별다른 소득 없이 돌아가는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똑같이 한 시간을 달려서 스쳐 지나갔던 도시, 뉴포트에 도착했다. 또다시 버스를 갈아탔다. 버스는 한적한 시골길을 떠나 유명한 관광지들을 지나치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날 때면 '잠깐 내려볼까?' 하는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진득하니 앉아서 창밖만 바라봤다.
이번에 가는 곳은그림처럼 아름다운 마을 '샨크린(Shanklin)'이다.익숙한 곳에서 차 한잔 마시면 가라앉았던 마음이 풀릴 것이다. 버스 노선이 달라서 버스기사아저씨께 확인하고 드디어 목적지에서 내렸다.
'올드빌리지(Old Village)'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이곳은 여전히 평화롭다. 다만 한 가지.. 여전히 사람이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모델빌리지 앞을 지날 땐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 많던 사람들이 왜 여기엔 없을까?
역시나 싸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 봤던 시골집들이 변치 않은 모습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또다시 그림 속으로 들어온 것만 같았다. 사람이 한 명도 그려져있지 않은 풍경화 속에서 주인공이 되어 홀로 길을 따라 걷고 있다.
기념품 가게가 문을 닫았다. 창문 너머로 진열되어 있는 물건들을 아련히 바라봤다.
'아아... 저 기념품 하나 사고 싶은데...'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마을 안으로 걸어갔다. 지난번 여행에서 기념으로 그림을 산 것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됐다.
차도, 사람도 없는 거리를 홀로 유유히 걷고 있다. 이미 익숙한 듯 금세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유야 어찌 됐든 지금 내가 여기에 다시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소중한 풍경들을 놓칠세라 온 마음을 다해 카메라에 담았다. 조금 더 마을 깊숙이 들어가 봤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실제로 거주하는 곳인가? 일은 어디서 하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코티지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올드빌리지의 집들은 비슷비슷해 보여도 저마다 개성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지붕 모양이 뾰족한 삼각형이거나 평평한 사다리꼴 이거나.. 벽돌색도 같은 듯 다르고 창문도 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건축가는 아니지만 이번 여행에서 유난히 집구경을 가장 많이 하고 있다.
모두가 똑같이 네모난 아파트에서 층만 다를 뿐 같은 구조의 집에서 사는 우리의 모습과 전혀 다르다.우리는 왜 일괄적인 집에 평생 갚기도 힘든 비싼 돈을 주고 살 수밖에 없을까? 새로 짓고 있는 아파트들을 볼 때마다 갑갑했다.
사람이 중심이 되어 자연과 어우러진 특색 있는 집들을 마주하며 사는 의미를 다시 한번 되짚어 봤다.아.. 나도 모르게 심오해졌다. 더 깊은 사색에 잠기기 전에 발길을 돌렸다.
올드 빌리지의 하이라이트!
바로 오후의 티타임을 갖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예전에 친구와 함께 왔을 때 크림티와 스콘의 매력에 흠뻑 빠져서 꼭 다시 오고 싶다고 했었다. 그런데..
Closed
내가 갔던 티룸 역시 문을 닫았다. 야속하게 굳게 닫힌 문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글씨를 잘못 읽은 것은 아닌지 한참을 째려봤다. 싱싱한 생딸기와 함께 나오는 스콘을 크림티와 함께 꼭 먹어야 하는데...
마지막까지그림 같은 곳에서 흔적하나 남기지 못하고 지나가겠구나. 다음을 기약할 수 없기에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다시 찾은 3월의 와이트 섬은 참으로 쓸쓸했다.
만물이 깨어나고 활기찼던 봄은 온 데 간 데 없고 갑자기겨울이 왔다. 울적해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바다로 갔다. 친구와 바닷가를 걷기 위해 내려갔다가 갑자기 쏟아붓는 비를 피하려고 급히 뛰어 들어갔던 Pub이 그 자리에 여전히 있었다. 지금은 바닷물이 가게 앞까지 차올라서 출렁거리고 있다.
모든 것은 변한다.
그래도 바다는 볼 수 있잖아? 좀 더 가까이 내려가지는 못하지만 도로를 따라 해안길을 걸었다. 한적한 바닷가를 걷고 있는데 시계탑이 보였다. 해변에 시계탑이라..생뚱맞은 곳에 있는 시계탑이 한층 더 올드해 보였다.
'그런데 저건 뭐지?'
건너편에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나도 모르게 다가가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꽤 높은 곳까지 올라가니 탁 트인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눈앞에 펼쳐진 정경을 보고 있자니 지금까지 서운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잔잔하게 몰아치는 물결을 가만히 바라봤다.
특별할 거 없는 흔한 바다지만 전망 좋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속이 후련했다. 뒤에는 노란 꽃들로 뒤덮인 주택이 줄지어 있었다. 2층 테라스가 돋보이는 구조였다. 오후의 햇살이 집들을 조명하자 주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이제야 휴양지에 온 기분이 났다.
황량하고 쓸쓸했던 그림 속에서 드디어 빠져나 올 수 있었다. 멈춰있는 황홀했던 풍경들이 다시 숨쉬기 시작했다. 파도는 움직이며 소리를 낸다. 갈매기가 세상에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며 울어댔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나의 세상은 역시나 아름다웠다.
길었던 하루를 뒤로 하고 다시 포츠머스로 향했다. 만에 하나 정말로 이 섬을 다시 찾게 된다면 그땐 '여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