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공간에 싱글침대 하나. 책상 한 개로 꽉 찼다. 창가에는 작은 세면대가 있다. 지금까지 지낸 숙소 중 가장 작은 방이다. 하지만 그 어느 방보다 포근하고 안락했다. 푹 자고 일어난 아침은 개운했다. 오랜만에 사람 사는 집냄새가 훈훈하다. 삐그덕 소리 나는 카펫 깔린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갔다. 식당에서 들려오는 달그락달그락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정말 좋다. 맛있는 냄새가 후각을 깨운다.
"좋은 아침이에요!"
키가 크고 피부가 하얀,양갈래로 곱게 딴 주황빛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여자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수줍게 대답하는 내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
아... 브라이튼에 왔구나!
영국식 악센트가 강한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비로소 내가 브라이튼에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유난히 목소리가 크고 발음이 정확한 특징이 있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스텝들은 대부분 학생처럼 보였다. 그들의 젊은 에너지로 분위기가 활기 넘쳤다.
잔뜩 들떠서 영국식 아침식사를 주문했다. 지난번처럼 실수하지 않으려고 메뉴를 다시 살폈다. 주문한 메뉴를 받아 적은 그녀는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다시 확인하고 쿨하게 자리를 떠났다.
여행 온 사람들로 어느새 식당 안은 꽉 찼다. 저마다 일행이 있었는데 오늘만큼은 혼자인 것이 외롭지 않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란히 줄지어 있는 집들만 봐도 행복하기 때문이다.
주문한 메뉴가 나왔다. 사실 구성만 보면 별거 없다. 다른 B&B에 비해 양이 많거나 플레이팅이 화려하지 않지만 소박하고 맛깔나게 나온 음식이 정말 좋았다. 그중 짭조름하며 탱글탱글한 식감을 자랑하는 양송이버섯의 맛은 일품이다. 포슬포슬한 에그스크램블은 적당히 구워져서 과즙을 한껏 머금은 토마토와 잘 어울렸다.
Wetherspoon
예전에 친구들과 과음한 다음날이면 꼭 웨더스푼에 가서 영국식 아침식사로 해장을 했었다. GFC(Golden Fried Chicken)를 알게 되면서 치킨이 대신했지만 그 시절 나는 영국식 아침식사를 진정 사랑했었다.
날씨처럼 쓸쓸했던 Brighton Marina Pier
사방을 가르는 갈매기소리가 허공을 향해 울려 퍼졌다. 바다내음이 전신을 정화시켜 주었다. 동그란 조약돌이 가득한 해변에 서서 밀려오는 파도를 가만히 바라봤다.
브라이튼 해변은 많은 추억이 있는 곳이다. 함께 했던 사람들이 스크린 영상처럼 떠올랐다. 비치타월을 깔고 해변에 누워서 음악 듣던 일.. 같이 일했던 사람들과 도란도란 모여 앉아 회식했던 일.. 친구들과 바비큐 구워 먹던 일.. 무서운 사람들을 만나서 해변으로 도망쳤던 일..가게 홍보 아르바이트도 했었지!
젊은 시절의 나는 참으로 열정이 넘쳤었다. 어떤 일을 겪어도 긍정적으로 풀어나가는 힘이 있었다. 아련하게 일렁이는 파도 위에 밝게 웃고 있는 내 모습이 비쳤다.
그 시절의 나를 다시 만났다.
옛 생각으로 사기가 잔뜩 충전된 나는 넘치는 기운으로 해안가를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날이 흐리고 바닷바람이 차게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길을 따라 계속 걷다 보면 마리나(Brighton Marina Pier)가 나온다. 브라이튼에 와서 버스 타고 처음으로 멀리 나간 곳이 마리나였다. 반가운 그곳에 가려는 의지를 날씨도 막지 못했다.
시린 바람이 옷 속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우중충한 날씨에 벽에 그려진 그라피티는 유난히 무서워 보였다. 아무도 없는 스케이트보드 연습장이 을씨년스럽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조금씩 꺾이고 있었다.
'그냥 다시 돌아갈까?'
슬쩍 뒤를 돌아보니 이미 너무 멀리 와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딱 하나다. 재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것! 내가 왜 걸어서 마리나까지 갈 생각을 했을까..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랴.. 회색빛 하늘아래서 혼자만의 경보가 시작됐다. 그렇게 한참을 잰걸음으로 반쯤은 뛰다시피 걸었다. 길 끝에서 만난 계단을 따라 올라가서야 마리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온몸에 후끈 달아오른 열감이 강한 바람에 식어버리자 한기가 느껴졌다. 아무도 없는 일요일 아침 풍경은 지극히 한산하고 적막했다. 햇빛이 쨍한 초여름 날 친구들과 마리나에 정박한 요트들을 구경하며 행복해했던 지난날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기다리면 마켓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몰리겠지만 쌀쌀한 날씨에 먼 길을 걸어오느라 조금 지쳐있었다.
그만 다시 돌아가자.
7번 버스를 타고 다시 시내로 향했다. 영국에 와서 제일 처음으로 갔던 마트, ASDA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변해버린 Brighton&Hove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띈 것은.. Palmeira! 친구들과 즐겨 찾던 Pub이다.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가면 매니저와 친구들이 반겨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보다 먼저 각자의 나라로 돌아간 친구들이 여기 있을 리 없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는 것은 흥미롭지만 이별은 언제나 힘들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변치 않는 동네가 정겹다. 저 멀리 학생식당이 보이기 시작했다. 북적거릴 줄 알았던 식당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아차~! 오늘은 일요일이구나. 커다란 나뭇잎 사이로 길이름이 적힌 이정표가 빼꼼히 보였다. 살며시 기념사진을 남겨본다.
길 건너에 내가 살았던 아파트가 보였다. 여전히 그 자리에 있구나.. 친구들과 함께 살았었는데 어학원이랑 가깝다는 이유로 우리가 사는 집이 아지트가 되었었다.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큰 장점은 음식솜씨가 좋아진다는 것이다. 명절이 되면 한인슈퍼에서 식재료를 구해서 전도 부쳐먹고 양념치킨도 만들어서 먹었었다. 친구와 만든 카스텔라 경단은 밖에 나가서 팔아도 되겠다는 극찬을 들었었다.
거리를 걷고 있자니 그 시절 함께 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부르면 뛰쳐나와서 반겨줄 것 같은 친구들은 신기루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유난히 햇살이 잘 들었던 어학원은 아쉽게도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고 했다. 지금은 누군가가 살고 있을.. 어학원의 옛 모습은 사라져 버린 집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날씨 탓인지 기분 탓인지 유난히 쓸쓸한 거리에는 낙엽만이 뒹굴거리고 있었다. 친구들과 첫 주말을 함께 보냈던 George Street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늘 걷던 거리를 오랜만에 걸어본다. 가는 길에 자주 가던 음식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간판만 봐도 애틋하다.
일요일이면 항상 찾았던 George St.. 여전히 사람들이 많이 찾는 거리다. 새로 생긴 가게도 있었고 애정하던 DVD가게는 다행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변한 듯 변치 않은 모습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아침부터 열심히 걸었더니 슬슬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오늘 점심은 예전에 일했던 식당에서 먹을 생각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음식점의 유혹을 뿌리치고 온 이유다.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반짝이는 윤슬이 아름다운 바다가 보이는 골목 중간에 식당이 있다. 최고의 복지는 일하러 가는 길에 볼 수 있는 바로 이 바다였다. 바다내음을 한껏 맡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변치 않은 풍경에 마음이 따스해졌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장님과 주방장님, 매니저님..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맞다. 주인이 바뀌었다고 전해 들었었지... 조금씩 바뀌어 있는 내부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주방장님도 바뀌어서 음식맛도 변했다고 들었는데...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을 주문했다. 소문대로 예전 맛은 찾을 수 없었다. 맛은 기본이고 친절함과 빠른 서빙이 주 무기였는데 그런 모습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대체 다 어디 간 거야?'
아침부터 온종일 쏘다녔지만 외로움만 더 크게 느끼고 있었다.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아 허탈했다. 씁쓸했던 식사를 마치고 나의 참새 방앗간 처칠 스퀘어(Churchill Square Shopping Centre)를 찾았다.
맙소사!
영혼의 안식처, Borders가 사라졌다. 영어공부 한다고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신간을 찾아보고 읽기 쉬운 책들을 사다 날랐던 서점은 없어지고 미국 의류브랜드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과거를 쫓는 것은 더 이상 의미 없어졌다.
추억상자에 가둔 나의 젊은 날은 과거에 있을 때 밝게 빛난다. 추억을 꺼내서 현실세계에 끼워 맞출 수는 없는 것이다. 세월 따라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지금을 열심히 살아다보면 언젠가 오늘을 그리워할 날이 또 오겠지..흘러가는 시간은 붙잡을 수 없기에 더욱 소중한 것이다.
오늘을 사는 기쁨 Brighton Pier
하늘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밝아졌다. 오후의 햇살이 참으로 반갑다. 처칠 스퀘어 앞에서 밴드가 공연을 하고 있었다. 음악이 함께 하니 신이 절로 났다. 힘겹게 과거여행에서 빠져나온 나는 강렬한 햇빛을 받으며 다시 길을 나섰다.
거리엔 주말 오후를 보내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더 레인즈(The Lanes)와 노스레인(North Laine)을 누구보다 활기차고 자유분방하게 누볐다.이제야 여행 온 기분이 났다. 맑게 갠 날씨처럼 잔뜩 구겨졌던 내 마음도 활짝 펴졌다. 그렇지! 나는 여행을 온 거였지!!
잊고 있던 신분을 다시 찾았다.
펑키, 히피, 빈티지, 골동품 등 개성이 강한 가게들로 가득한 거리는 볼거리가 무궁무진했다. 거리 공연하는 사람들 덕에 분위기가 살아났다. 작은 상점들을 지나치지 못해열심히 구경했다.밖으로 나온 두 손에는 아들을 위한 옷과 책이 잔뜩 들려있었다.언제 와도 늘 새롭고 재밌는 곳이다.
브라이튼의 대표 명소중 하나인 로열 파빌리온(Royal Pavilion)을 지나서 출발지였던 피어로 향했다. 쓸쓸했던 아침과는 상반된 분위기인이곳 역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오늘 날씨가 참 예쁘네~ 나처럼~!!"
아는 동생이 피어로 향하는 길을 건너면서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문득 떠올랐다. 아무도 못 알아들을 줄 알았던 한국말을 지나가던 영국인이 알아듣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