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그대로인 풍경이 마치 시간여행을 떠나 온 기분이 들었다.어디서나 잘 보이는 '스피니커 타워(Spinnaker Tower)'가 반갑다.
브라이튼에서 가까운 포츠머스에는 아웃렛이 있어 쇼핑을 위해 한 두 번 왔었다. 학생의 신분으로 저렴한 선글라스만 사서 쓰다가 모처럼 친구랑 조금 비싼 선글라스를 샀었다. 그래봐야 아웃렛의 특성상 정상가보다 저렴하게 득템 한 것이었다.
새로 산 선글라스를 폼나게 끼고 그동안 모은 돈으로 친구들과 스위스 여행에 나섰다. 세상물정 몰랐던 순박한 아가씨들은 보드를 타다가 혹여 선글라스를 잃어버리거나 망가뜨리면 안 된다며 숙소에 고이 모셔놓고 알프스에 올랐다.
해발 3,000m가 넘는 스키장으로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면서 얼굴과 목이 새하얗게 덮일 정도로 선크림을 바른 사람을 보며 신기해했었다. 알프스의 특징에 대해 무지했던 우린 쌩눈으로 새하얀 설원을 누볐다. 마테호른의 절경에 취해 신나게 놀던 우린 산을 내려와서야 얼굴이 새빨개지고 눈을 뜨지 못하는 기이한 현상을 겪게 되었다.
"어? 이상하다. 눈이 안 떠져.. 슬프지도 않은데 눈물이 막 흐르는데?"
"너도 그래? 나도 눈을 못 뜨겠어!"
눈과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우린 철딱서니 없이 까르르 웃어대며 서로에게 의지한 채 겨우겨우 걸어갔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번갈아가면서 눈을 힘주어 부릅뜨고 길을 안내했다. 숙소까지도 겨우 찾아갔고 다음날이 돼서야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우린 급히 베른에 있는 응급실을 찾아갔다.
그 뒤로 선글라스를 벗지 못해서 돌아오는 공항에서도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하는 해프닝을 벌여야만 했었다. 직원분은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며 영국으로 돌아가면 꼭 병원에 가서 치료받으라고 당부하셨다.
그렇게 눈물콧물 쏙 빼며 선글라스와 맞바꾼 피부는 한 달 내내 벗겨지고 다시 재생되며 역대 최고의 까만 얼굴을 하고 있어야 했고, 눈도 편치 않아서 선글라스와 한 몸이 되어 생활해야만 했었다.
뜻하지 않게 원인제공을 했던 곳에 오니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생각났다.
쇼핑이 아닌 여행으로 본 시선 Portsmouth Historic Dockyard
오늘은 쇼핑객이 아닌 여행자로서 이곳을 둘러보려 한다. 부리나케 와서 필요한 것만 후다닥 사고 갔을 땐 몰랐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늘 사람들이 많아서 복잡했는데 이른 아침의 분위기는 차분하고 조용했다. 부두를 따라 산책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생긴 조각상들이 눈에 띄었다.
'여기 이런 게 있었네?'
HMS Vernon 군함에 있던 선수상(figurehead, 船首像)을 전시해 놓았는데 얼굴이 너무나도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나도 모르게 인사할 뻔했다. 야외에 있는 것 치고는 색이 바래지도 않고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다니다 보면 HMS Marlborough 등 다양한 군함의 선수상과 실제 사용했던 대포 등을 만나 볼 수 있다.
이번엔 거대한 군함을 만나기 위해 '독야드(Portmouth Historic Dockyard)'로 향했다. 영국 왕립해군 최초의 철갑 함인 HMS Warrior가 위풍당당하게 바다에 떠있었다. 사실 배의 규모가 엄청 커서 굳이 가까이 오지 않더라도 왔다 갔다 하면서 자연스레 볼 수 있다. 포츠머스에 처음 와서 기념사진을 찍은 곳도 바로 이 배 앞에서였다.
안으로 더 들어가니 영국의 해군기지답게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았다. 주요 해전에서 큰 역할을 했을 군함들이 곳곳에 있었다. 무료로 개방된 곳이 있어 잠시 들어가 봤다. 포츠머스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의미 있는시간을 보내는 아침은 여유롭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면 더욱더 많은 것들을 생생하게 볼 수 있겠지만 비싼 입장료에 잠시 망설였다. 이미 밖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 뒤라 대신 그동안 대충 때웠던 끼니를 이번엔 제대로 된 식당에서 먹기로 하고 발길을 돌렸다.
역시 쇼핑이 최고 Gunwharf Quays
주말에 쇼핑몰의 흔한 풍경이 시작되었다. 쇼핑을 하기 위해 오픈시간에 맞춰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모처럼 화창한 날씨는 사람들을 유혹했다. 아이들과 함께 나들이를 나선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
그간에 느끼지 못했던 외로움이 몰려왔다.
집에 있는 가족들이 생각났다. 물론 매일 영상통화하는 아들은 엄마 없이도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는 중이다.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내가 없는 지금도 열심히 크고 있다. 돌아가면 얼마나 컸을까? 지금 여기 함께 있었더라면 분명 비싸더라도 입장료를 내고 배 안을 구경시켜 줬을 텐데...
아들을 그리워하면서도 오늘의 점심을 먹기 위한 식당을 찾는 것을 잊지 않았다. 걷다 보니 어느새 쇼핑몰 2층에 올라와 있었다. 오늘은 전망 좋은 곳에서 근사하게 점심을 먹어보자며 눈앞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마침 테라스 쪽 자리가 비어있었다. 창문 없이 탁 트인 공간이 시원스레 마음에 든다.
이렇게 규모가 있는 식당은 처음이다. 쇼핑하러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혼자서 식사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외국인이니까, 여행자니까 괜찮다. 아니, 괜찮을 것이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그래, 배만 채우면 됐지!
하지만 맛은 영... 입맛에 맞지 않았다. 토마토파스타가 이렇게 짤 수도 있구나... 망했다! 모처럼 큰맘 먹고 레스토랑에 왔는데 소태가 따로 없는 면을 도저히 삼킬 수가 없었다.
신기한 것은 사람들은 도란도란 얘기 나누면서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 파스타만 맛이 없는 걸까... 누군가와 함께 있다면 시간도 금방 지나가고 눈앞에 보이는 불편한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게 될 것이다.여행 와서 처음으로 씁쓸한 맛을 봤다.
혼자라서 행복했지만 외로웠다.
서빙이 느린 직원 덕분에 한참을 기다려서야 계산하고 나올 수 있었다. 빨리빨리의 피가 흐르는 나는 역시나 느긋한 것에 익숙하지 않다. 유쾌하지 않았던 식사시간을 마치고 기다렸다는 듯이 쇼핑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오랜만에 매장 안을 휘젓고 다녔다.
이제야 아웃렛에 온 것을 실감했다. 착한 가격에 가족들 옷이랑 친구들 기념선물까지 득템 했다. 역시 쇼핑몰에서는 쇼핑만 한 것이 없다.
HMV
즐겨 찾던 음반매장이다. 주로 DVD를 사러 자주 갔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배로 미리 부친 짐에 DVD 만 한 상자 가득 채웠으니 얼마나 사다 날랐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가게니 만큼 오랜만에 신나서 구경했다. 요즘 최신 영화는 뭐가 있는지... 아들이 볼만한 프로그램은 뭐가 있는지.. 한참을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는데 엄청 큰 소리의 화재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뭐지? 불이 났나?'
놀라서 어찌해야 하나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사람들이 생각보다 침착하게 대응했다. 놀라서 여기저기 뛰쳐나갈 줄 알았는데 아주 천천히 반응한 사람들은 매장 밖으로 신사답게 차분히 빠져나갔다. 덕분에 크게 놀라지 않고 무사히 매장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물론 밖으로 나가는 와중에도 아들을 위해 집어든 책과 DVD를 계산하고 야무지게 챙겨서 나왔다.
정말로 불이 났는지 아니면 경보기가 고장 났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크게 다치거나 한 사람들이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만족스러웠던 쇼핑을 마치고 짐을 바리바리 싸서 다음 여행지인 브라이튼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포츠머스에서 브라이튼까지는 기차로 다녔기에 보지 못했던 세상 구경을 하느라 정신없다. 이름 모를 동네에 들어설 때면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좋았다. 경치에 흠뻑 취해 시간을 보내던 중, 중세시대에서 이제 막 튀어나온 듯한 성이 눈에 띄었다.
'여긴 어딜까?'
유난히 예뻐 보이는 마을이 계속해서 눈에 밟혔다. 재빠르게 이정표를 사진에 담았다.
'기회가 되면 꼭 와봐야지...'
길고 긴 시간을 보내고 드디어 브라이튼(Brighton)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환호했다. 눈물 펑펑 쏟으며 떠났던 곳에 애엄마가 돼서 돌아왔다. 기분이 이상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래도 여전하구나! 브라이튼에서의 생활이 필름처럼 챠르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