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하루종일 브라이튼과 호브를 넘나들며 돌아다녀서 피곤할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개운했다. 역시 여행은 만병통치약인 것인가... 흥겨운 마음으로 사뿐사뿐 계단을 내려갔다.
음...
어제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젊음으로 활기찼던 식당은 고요하고 차분했다. 밥만 먹으면 됐지! 하고 주문한 메뉴를 받아 든 나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주문할 때도 한 테이블에서 주문과 서빙이 완벽하게 끝난 뒤 다음 테이블로 넘어가느라 한참을 기다려야 했었다. 사람들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인내를 테스트받고 난 뒤에 받은 음식은 전부 푹 익혀져 있었다. 계란을 취향에 맞게 조리해 줬던 어제와 달리 모두가 반숙 프라이를 받았고 탱글탱글한 식감을 자랑했던 양송이버섯은 너무 익어서 쪼그라들어 있었다. 살짝 익혀서 기름져야 할 베이컨 역시 불에 타기 직전 마지못해 구출한 모양새다.
하루새 주방장이 바뀐 건지 어제만 특별했던 건지 알 길이 없었다.언성을 높이진 않았지만 불만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대신 목소리를 내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조용히 식사를 마치고 일어섰다.
여행은 타이밍 Arundel
아침부터 부지런히 준비해서 브라이튼 역으로 향했다. 엊그제 지나치며 봤던 성이 도무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서 밤새 정보를 찾아봤다.
Arundel Castle
예상대로 중세시대에 지어진 성이었다. 아룬델 성 역시 전쟁에 의해 파손되었고 복구과정을 통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성에 입장할 수 있는 기간이 아니다. 성에 가도 내부는 볼 수 없다. 왜?오픈기간이 따로 있는 거지?설령 입장할 수 있다 하더라도
Monday Closed!!!
그렇다. 오늘은... 월요일이다.
'성안에도 못 들어가는데 그래도 갈 거야?'
몇 번을 되물으며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그래도 가보자고!'였다. 인생 뭐 있나?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는 거지.
나는 기회주의 자니까 못 보더라도 간다!
기차여행은 또다시 시작됐다. 1시간 정도 달려서 아룬델역에 도착했다. 저 멀리 마을과 성이 보였다. 포츠머스에서 코치를 타고 지나오는 길에 반했던 마을.. 오지 않았더라면 평생을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이다.
나의 용기를 칭찬한다.
기왕 온 거 일단 성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우체국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기자기한 모습에 마음이 콩닥거렸다. 운치 있는 다리와 함께 담기는 풍경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빨간 제복을 갖춰 입은 병정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장난감 나라에 들어온 기분이다.
운치 있는 다리를 건너가니 성곽을 따라 산책로가 있었다. 녹색의 푸르름이 한껏 싱그럽다. 가로수 사이로 쭉 뻗은 오솔길을 따라서 걸었다. 월요일임에도 불구하고 거리엔 관광하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덕분에 외롭지 않았다.
걷다 보니 넓은 마당을 자랑하는 시골집이 나왔다. 닭, 돼지, 소등 동물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외국 동화책에서 한 번쯤은 봤을 법한 농장과 흡사했다. 호기심에 들어가려다가 문이 닫혀있어서 잠시 구경하고 가던 길을 다시 걸었다.
여유로움이 한껏 묻어나는 아침산책은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벼웠다. 그동안 시골길을 꽤 많이 걸었지만 이토록 울창하고 큰 나무들 사이를 걷는 것은 처음이다. 굉장히 격식 있고 신사다운 숲길을 연상하는 길 사이사이로 아룬델 성의 모습이 빼꼼히 보였다. 마치 귀족이 되어 걷는 듯한 기분이 절로 난다.
청명한 호수가 나왔다.
무성한 나무숲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호수에는오리와 백조가 평화롭게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바로 앞에는 2인용 나무보트들이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호수 너머로 보이는 언덕 위로 성이 보였다.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이 궁금했다. 하지만 올라가는 길은 인적이 드물었고 좁다란 숲길이라 가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무도 올라가지 않는 데엔 이유가 있겠지... 그렇게 쉽게 보일리가 없잖아? 보안이 철저할 텐데...'
먼발치에서라도 성 내부를 내려다보고 싶은 마음을 다시 접었다.대신 살아있는 생명체들이 떠다니는 호수멍을 택하기로 했다. 눈부신 호수의 자태가 우아한 백조와 같이 아릅답다.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이 레이스가 달린 하얀 양산을 쓰고 보트를 타는 모습이 연상됐다.
영화에서 보던 바로 그 장면!
중세시대 복장을 하고 이곳을 거닐어도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는 예전 모습 그대로를 잘 보존한 풍경이다. 여름휴가를 보내기에 이만한 곳이 없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혼자만의 공상에서 빠져나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사람의 숨결을 찾아서 다시 마을 쪽으로 향했다. 피톤치드로 몸과 마음이 정화된 나는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 유난히 차가워 보이는 회색벽의 성곽을 뒤로하고 길을 건너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인상적이다. 좁은 골목을 두고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하지만 밖에서 구경만 할 뿐, 딱히 흥미로운 곳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열심히 거리를 걷던 중 아름다운 성당을 만났다. 무료입장이니 슬쩍 들어가 봤다.
아무도 없는 내부는 다소음침한 분위기였고 어디선가 스산한 선율이 낮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성당이 이렇게 무서운 곳이었나?'
기존에 봐왔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에 놀라서 재빨리 밖으로 빠져나왔다. 낯선 곳에서 유난히 몸을 사리는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는 중이다.
아룬델은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유령처럼 겉만 떠돌다가 가는 기분이다.
우연히 발견한 성에 반해서 무작정 찾아온 마을.. 철저한 사전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나의 두 번째 즉흥여행이었다. 뭐든 직접 찾아가 보고 겪어보는 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으리라.
오늘 본 '스완본 호수(Swanbourne Lake)'의 잔잔한 물결이 떠올랐다. 아쉬움이 남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평생 기억에 남는 풍경하나면 충분하다.
용기 있게 떠나 온 여행은 고요했던 시골마을처럼 차분하고 담담했다.
어쩐지... 모든 것이 잘 풀린다 했어!!
다시 돌아온 브라이튼.. 기차역에 온 김에 내일 가야 할 런던행 기차표를 미리 찾기로 했다.
"예매한 티켓으로 바꿔주세요."
예약 확정서를 내밀며 말했다.
"결제했던 신용카드를 보여주세요."
'WHAT?????!!!!!'
눈동자가 양쪽 끝을 바라보고 있는 아저씨가 느릿느릿한 어투로 말했다. 지금까지 예약번호가 적혀있는 확정메일을 프린트한 것으로 전부 티켓 교환이 가능했었는데 갑작스러운 신용카드 제출 요구는 상당히 당황스럽고 난감하게 만들었다.
집에서 최저가 티켓을 알아본 뒤 남편 카드로 신나게 결제했기 때문이다.
얼굴이 상기되기 시작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결제는 남편 카드로 했기 때문에 카드를 가지고 있지 않아요. 여기 예약번호가 있는데 확인이 안 될까요?"
"신용카드를 보여주지 않으면 티켓을 줄 수 없어요."
송골송골 진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고민하다가 브라이튼에 살고 있는 친구 Lucy에게 전화해서 도움을 청했다. 사연을 들은 친구는 안타까워하며 정 안되면 로열 파빌리온 옆에 티켓을 저렴하게 팔고 있으니 거기서 새로 구입하는 것을 제안했다. 마지막으로 고객센터에 전화해 보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고마워 Lucy. 역시 너밖에 없어!"
통화를 마친 뒤 받아 적은 전화번호로 곧장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의 직원은 신용카드가 없어도 예약번호만 있으면 티켓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감사의 인사를 남기며 다시 역무원에게로 갔다.
"신용카드를 보여주지 않으면 티켓을 줄 수 없어요."
하지만 역무원은 달팽이처럼 아주 느린 말투로 앵무새같이 똑같은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얼굴이 새빨개지기 시작했다. 다른 직원분과 얘기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해봤지만 역무원은 상당히 굼뜨게 움직이며 그래봤자 소용없다며 또다시 같은 말을 기계처럼 뱉어냈다.
하... 혼자서 씩씩대봤자 도움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4.50
예약당시 환율로 고작 8,204원 밖에 안 되는 금액이지만 생돈을 날려야 하는 상황을 또다시 맞닥뜨리니 허탈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힘이 빠진 채 숙소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반가워했던 거리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쓸쓸히 돌아온 방 안에 앉아 무심코 예약사이트에 들어가 봤다.
Yes, YES~~!!!
무한한 집념으로 £5.55 금액의 저가 티켓을발견했다.
신은 아직 날 저버리지 않았구나! 한껏 들뜬 손놀림으로 재빨리 예약버튼을 눌렀다. 이번엔 확실하게 내 신용카드로 바로 결제했다.
물론 내일 다시 시도해 볼 법도 하지만 만약 똑같은 사람이 근무한다면 얼마를 더 주고 당일 티켓을 사야 할지 가늠이 안된다.
영국은 기차표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통근시간, 그 외 시간대 별, 요일 별 가격이 시시각각 변동되기 때문이다. 어쩔 땐 당일 티켓으로 저렴하게 성공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잘 못 걸리면 몇 배나 더 나가는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
무용지물 된 티켓까지 합치면 약 10파운드 정도 되니가격 경쟁이 치열한 티켓시장에서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주어진 숙제를 해결하니 홀가분했다.
길었던 하루를 마치고 마지막일지도 모를 바다를 보기 위해 바닷가로 나갔다. 밤바다의 공기는 다소 차가웠지만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한 바닷가는 벌써 여름이다. 따뜻한 날씨와 더욱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브라이튼을 기억하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