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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K Aug 30. 2024

시간을 거슬러, 낭만 바스

Bath

나에게도 드디어 한국인 룸메이트가 생겼다.


어제저녁 숙소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국인 여자와 같은 방을 쓰게 다. 오늘 아침은 외롭지 않다. 새로 사귄 룸메이트와 공용식당에서 함께 아침식사를 하기 때문이다.


유스호스텔에서 지내는 최대 장점은 바로 이렇게 여행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낯선 곳에서 만나는 한국인은 엄청 반갑다.


타지에서 되지도 않는 언어로 고군분투하다 보면 혀가 꼬부라질 것 같을 때가 있다. 유창하게 모국어를 원 없이 할 수 있는 순간이 오면 스스로가 한국어를 매우 잘하는 것처럼 느껴다. 요 며칠 외로이 지내다 보니 맘 편히 수다 떨 수 있는 사람이 진심으로 반다.


여행자들에게 통성명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국적, 나이불문하고 모두가 친구가 된다. 우리의 궁금증은 오직 여행에 관한 것뿐이다. 오늘의 여행지를 공유하고 서로 알고 있는 정보들을 주고받았다. 신나서 얘기하며 많이 웃고 드는 내 모습이 어색하지만 누구보다 행복하다.


그녀는 내가 어제 갔던 로만바스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했다. 와는 정 반대의 코스로 다니기에 점심시간에 만나서 함께 식사하기로 하고 각자의 하루를 시작했다.



낭만 가득한
The Royal Crescent


유난히 아침산책이 좋다.


싱그러운 봄햇살이 기분 좋은 아침을 열어줬다. 새롭게 시작하는 하루, 지난날의 피로가 말끔히 씻겨져서 몸이 가볍다. 끊임없이 걷고 있지만 주변 경관에 사로잡혀 전혀 힘들지 않다. 그 길이 언덕길일지라도 말이다. 넘치는 에너지로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


이른 아침 한가하게 걸어 본 적이 있는가? 매일 눈뜨면 아이와 전쟁하느라 항상 부산스럽고 정신없이 하루를 시작했다. 나를 위한 시간은 눈곱만큼도 없는 요즘... 그렇기에 홀로 산책하며 시간적 사치를 부릴 수 있는 나는 지금, '시간부자'다.


대한 아침 풍경을 만끽하며 걸었다. 똑같은 색의 건물들을 따라 걷다 보니 'The circus'가 나왔다. 세 길이 만나 모인 삼거리가 이렇게 예쁠 일 인가? 아무도 없는 동그란 원 안에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잔디 위로 푸른 나무들이 울창하다. 길이 난 모양대로 둥근 아치형의 건물들이 인상적이다. 좀 더 고풍스러운 건축양식이 과거로 시간여행 온 기분을 자아냈다.


변치 않는 클래식함이 좋다.


세 갈래 길 중 목적지가 있는 길로 들어서서 조금 걸어 올라가니 드넓은 잔디밭이 펼쳐졌다. 드디어 사진에서 봤던 '로열 크레센트(The Royal Crescent)'에 도착했다.


비록 현실은 유스호스텔에서 묵고 있지만 이곳에 올라오니 전부를 가진 기분이 들었다. 이른 시간이라 지나가는 사람들 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치 사진 속으로 빨려 들어온 기분이다. 낭만적인 풍경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금빛 바스 석회암으로 지어진 건물 외관이 반짝였다. 같은 듯 조금씩 다른 색감덕에 음영이 생기니 훨씬 입체적으로 보였다. 둥근 초승달 형태의 건물이 고고하다.


건물 끝에 있는 박물관은 아직 오픈전이다. 아아.. 이번 여행에서 박물관과는 인연이 없나 보다. '시'를 만나러 가서도 같은 이유로 그냥 지나쳤으니 말이다. 느긋하게 움직여도 되는데 유난히 부지런 떤 내 잘못이 크다. 누굴 탓하랴!


푸른 잔디를 가만히 바라봤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저 멀리 있는 나무들이 한들한들 흔들리고 있다. 박물관에 못 가면 어떠한가.. 지금 보고 있는 경치가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도시 자체가 역사인 것을..



아침은 원래 하루 중 가장 힘이 넘쳐나는 시간이었다. 


학생 때는 학교 가느라, 커서는 회사 가느라, 아이를 낳고부터는 육아하느라... 생각해 보니 평생 동안 아침의 기운을 모른 채 살아왔다. 그저 주어진 시간 안에서 살기 위해 열심히 달려왔을 뿐이다. 


아무에게도 뺏기지 않고 오직 나만을 위해 충전한 에너지가 가득하다. 체력이 잔뜩 솟아 오른 나는 여기서부터 위로 더 올라가 보기로 했다.


기왕 온 거 끝까지 가 보자!


본격적으로 언덕이 시작된 가파른 길을 힘차게 걸었다. 길건너에는 공원이 있었다. 초록의 상큼함에 이끌려서 길을 건다. 텔레토비가 어디선가 나타나서 "안녕~!"하고 인사할 것 같은 비주얼의 언덕이다. 파란 하늘에 대조되는 녹색 잔디가 그림 같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걸어야 할 노선은 이미 정해져 있기에 내 발은 정확히 방향에 맞춰서 걷고 있었다.


걸으면서도 구경하는 것은 놓치지 않았다. 대저택의 집들이 으리으리했다. 입이 떡 벌어져서 다물어지지 않았다. 부자들은 언덕에 산다는 말이 맞는 거 같다. 골프장도 보이고 언덕 끝으로 올라가니 소담한 작은 집(Cottage)들도 자리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푸르름을 잔뜩 머금은 잔디가 펼쳐졌다. 높이 올라온 만큼 경사도 가팔라졌다. 새하얀 양들이 푹신한 잔디 위에 앉은 모습이 포근해 보였다. 열심히 언덕을 올라 정상에 다다랐다. 로열 크레센트와 비슷하지만 규모가 조금 더 작은 'Lansdown Crescent'에 도착했다.


맛있게 풀을 뜯고 있는 양들을 바라봤다. 햇살을 받아 털이 부드럽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양도 잘생겼구나! 뜻하지 않게 만난 양에 반했다. 오랜 세월을 간직한 건물과 오늘을 사는 양이라니.. 그 시절에도 이와 같은 풍경이었지? 비현실적인 풍경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음식은 역시
Italy!


홀로 보낸 시간여행을 뒤로하고 다시 시내로 내려왔다. 로만 바스와 수도원 사이에 작은 광장이 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는 곳에서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렸다. 한 여자가 광장 한가운데서 뮤지컬 캣츠 OST 중 'Memory'를 열창하고 있었다.


톤다운 된 갈색 드레스를 입고 우아한 손짓을 하며 노래 부르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몰입해서 바라봤다. 사방이 건물로 둘러싸인 이 작은 광장의 울림이 자연스레 에코역할을 해주었다. 은구슬처럼 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에 반해 한참을 넋을 놓고 감상하고 있는데 관광을 마친 룸메이트가 왔다.


반가움도 잠시 우리는 사원을 배경으로, 로만 바스를 배경으로, 또 광장의 작은 벤치에 앉아서.. 다양한 구도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홀로 여행하면서 큰 단점 중 하나는 바로 기념사진을 지나가는 행인에게 부탁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쾌히 사진을 찍어주지만 대부분 인증사진의 핵심인 배경은 날아가버리고 얼굴만 대문짝만 하게 나오는 경우가 많다. 운 좋게 배경과 전신이 나오더라도 나보다 키가 훨씬 큰 사람들의 시선에서 찍은 사진은 키 작은 난쟁이가 반쯤 가려버린 배경이 최선이다. 그래도 얼굴이 제대로 나온 게 어디냐며 위로하곤 했었다. 


소중한 포토타임을 신나게 즐긴 우린 가까운 이탈리아 레스토랑으로 갔다. 설레는 마음으로 메뉴판을 살펴봤다. 다행히 무난한 것을 좋아하는 취향이 비슷했다. 드디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쫀득쫀득한 피자도우와 상큼한 시저 샐러드가 환상적인 맛을 자랑한다. 역시 음식은 이탈리아지! 근처에 눈에 띄는 아무 식당에 들어왔는데 우연히도 맛집이면 횡재한 기분이 든다. 중심에 위치해 있지만 크게 붐비지 않아서 실컷 수다 떨며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룸메이트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이직하기 전까지 시간이 있어 홀로 여행길에 올랐다고 했다. 젊은 나이에 혼자 먼 길 떠나온 그녀가 멋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혔던 사고력이 깨어나고 있는 중이다.


홀로 떠나올 수 있는 용기가 생기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여행지에서 외로이 다니는 것보다 친구들과 와글와글 재미나게 다니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외롭다는 생각이 한 번도 들지 않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선망이었던 '자유(Freedom)'가 가진 힘이 더 크다.


즐거운 식사시간을 마치고 다시 각자 갈 길을 나섰다. 서로의 여행을 응원하며 쿨하게 헤어졌다.



이제 제법 무거워진 캐리어를 들고 다시 '바스 스파'역으로 향했다. 벌써 집을 떠나온 지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혼자서 장기간 여행하는 모든 것이 처음이다. 앞으로 남은 열흘은 익숙한 곳에서 추억을 되새기는 여행이 될 것이다. 정해진 일정이 없기에 두렵기도 하지만 익숙한 곳이라서 마음만은 편할 것이다.


정신없이 지나 온 여행의 1부가 끝났다.


 그 마지막 도시 '바스'낭만 가득한 봄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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