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다. 피곤해서 늦잠 잘 거라는 나의 바람과 달리 역시나 아직도 시차적응 중에 있는 뇌는 눈치 없이 이른 새벽부터 정신을 깨웠다. 부스스한 눈을 비비며 일어나자마자 바로 옆침대에 있던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Good Morning~!"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아침인사를 건넸다. 할머니는 웃으면서 혼자 여행 왔냐며 말을 걸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젯밤 잠들기 전에 없었던 동양인이 하루아침에 짠~ 하고 나타났으니 놀라셨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네~ 비행기가 지연돼서 어제 새벽에 도착했어요. 혹시 제가 시끄러웠다면 죄송해요."
"무슨 소리.. 세상모르고 잠들었는걸요. 나는 미국에 있는 오리건주에서 왔어요. 대학 졸업식이 있어서 참석하러 왔지요."
"우와~~! 진짜요? 정말 멋지세요~!! 여기서 학교 다니신 거예요?"
"웬걸..요즘 세상이 좋아졌잖아요. 인터넷으로 강의를 들었어요. 전 세계 어디서든 공부할 수 있다니 놀랍지 않나요? 이번엔 졸업식에 참석하고 여행도 할 겸 해서 왔어요."
할머니에겐 딸이 세 명 있는데 모두 외국에서 산다고 했다. 큰딸은 이집트에 살고 있는데 여기서 일정을 마치면 딸을 만나러 이집트로 갈 것이라고 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은빛머리카락에 연세가 꽤 있어 보였는데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는 사실이 대단했다. 더군다나 홀로 먼 거리를 떠나왔다는 것이 놀라웠다. 보통은 편한 호텔에서 지낼 텐데 굳이 불편한 유스호스텔을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열정이 넘치는 사람인지 알려주기에 충분했다.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한편으로 그녀의 건강이 걱정되는 나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캐리어를 활짝 열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서 약을 엄청 많이 가지고 왔어요. 내 나이가 되면 먹어야 하는 약이 엄청나다오. 휴~! 하하~"
간단히 짐을 정리하면서 멋쩍게 웃어 보이는 그녀의 미소가 아름다웠다.
반가움의 수다도 잠시 배가 출출해진 우린 함께 아침을 먹으러 내려갔다.유스호스텔 내에 있는 식당에는 젊은 여행자들로 아침부터 활기가 넘쳤다. 그들 틈에 껴서 할머니와 못다 한 담소를 나누며 천천히 아침 식사를 마쳤다.
해리포터와 앨리스를 만날 수 있는 Oxford
든든히 배를 채우고 아침부터 여행을 시작했다.낯선 도시의 첫인상이 새롭다. 건물들의 통일된 색감이 단정하고 차분했다. 거리에 세워진 자전거조차 낭만적으로 보였다. 중심지인 하이스트리트로 향했다. 나의 발걸음은 이미 이곳에서 오랜 시간 머문 사람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일요일 아침!
잊고 살았던 평화로운 주말 아침이다. 한가로운 거리를 걷고 있는 이 공간이 따사롭다. 더 이상 시간에 쫓기며 관광할 필요 없는 오늘을 맘껏 즐겨보려 한다. 내 안의 자유로운 영혼이 깨어났다.
얼마 걷지 않아 '래드클리프 카메라'(Radcliffe Camera)가 나왔다. 이곳이 정녕 도서관이란 말인가! 화려한 외관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뒤를 돌아가니 탄식의 다리라고 불리는 'The hertford bridge'가 보였다. 학생들이 성적표를 받고 허탈한 마음으로 다리를 건너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탈리아의 탄식의 다리와는 전혀 다른, 생각보다 작고 아기자기한 느낌이다. 관광지라고 하긴 그렇고 유명한스폿들이 지도에서 본 대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단체관광객들이 '뉴칼리지'(New College)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따라 들어갔다. 캠퍼스의 고급스럽고 웅장한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건물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잔디가 깔린 작은 정원이 나왔다.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걷고 있는데 바로 앞에 있는 건물에서 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대충 봐도 수학여행을 온 고등학생들 같아 보였다.
저 안에 뭔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시선을 돌리니 채플이라고 쓰여있는 작은 안내판이 있었다. 호기심에 들어가 본다. 좁다란 계단을 따라 올라간 곳에는 작은 예배당이 나왔다.
'우와~~ 영화에서만 보던 분위기.. 해리포터 촬영지 아냐?'
안쪽으로 들어가니 영화 1편에 나왔던 식당과 흡사한 모습이 펼쳐졌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사람도 별로 없고 한적한 모습에 의아해하면서도 우연히 들어온 곳에서 만난 친숙한 풍경에 신이 나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뭔가 횡재한 듯한 혼자만의 기쁨을 한 아름 안고 밖으로 나왔다.
건물 하나를 지나가니 푸르름을 잔뜩 머금은 잔디밭이 펼쳐졌다. 아까 전에 마주쳤던 단체 관광객들이 한쪽에 서서 열심히 설명을 듣고 있었다. 다시 어디론가 우르르 떠나길래 본능적으로 따라가 봤다.
그곳에는 작은 정원을 중심으로 회랑이 둘러싸고 있었다. 둥근 아치형의 기둥이 운치를 더한다. 바로 이곳이 해리포터를 촬영한 곳이라고 한다. 인적이 드물어서인지 조금 우중충한 느낌이 들었다. 길게 펼쳐진 회랑 끝에서 금방이라도 긴 망토를 걸친 말포이와 해리가 나와서 대결할 것만 같다는 생각을 잠시 가져본다.
혼자만의 세계관에서 빠져나온 나는 발길 닿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모 마리아 교회(University Church of St Mary the Virgin)라고 쓰여있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일품이라던데..'
여행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타이밍이다. 갖고 싶은 물건을 발견했을 때 나중에 사야지 하고 지나치면 그걸로 끝나버린다. 여행자의 발걸음은 결코 지나간 길을 다시 걷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그것이 마지막이 된다. 잠시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어 안으로 들어갔다. 성당 내부는 고요했다. 안쪽에 앉아있던 직원에게 티켓을 구입했다. 안내에 따라 좁다란 계단을 올라가 본다.
'우와~~~~!!'
위에서 내려다본 경치는 아름다웠다. 오밀조밀 모여있는 건물들이 귀엽게 보였다. 그리 높지 않지만 멀리까지 시야가 탁 트였다. 무엇보다 아무도 없는 지금, 이 전망대를 전세 낸 것 같아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영상도 찍고 사진도 열심히 찍어 본다. 혼자만의 시간을 알차게 보낸 뒤다시 길을 나섰다.
멀지 않은 곳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중심가가 있었다. 작은 광장에서 한 일본인이 커다랗게 일장기를 걸고 모금활동을 하는 것을 보았다.
아차.. 스코틀랜드 펍에서 봤던 뉴스가 생각났다. 일본에서 대지진이 났다고 긴급속보가 났었다. 나무가 바람에 휩쓸려 순식간에 부러지는 장면과 집채만 한 파도가 도로 위에 있던 자동차를 삼키는 장면이 떠올랐다. 갑작스러운 재해에 다들 충격받았다.함께 있던 사람들과 할 수 있는 건 그저 안타까운 심정을 나누는 것뿐이었다.
마음이 좋지 않았던 나는 큰돈은 아니지만 오늘의 점심값을 기부하기로 했다. 자연재해로 더 이상 무고한 사람들이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함이 잘 전달되기를...
가까운 마켓에 들어갔다. 시장 구경도 하고먹을 것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일요일 아침, 마켓은 조용했다. 문을 연 가게가 거의 없었다. 골목 끝에 있는 꽃집만이 유일하게 불을 켜고 있었다. 마켓에서 나오자 맥도널드가보였다. 스카이섬 여행을 마치고 오는 길에도 햄버거를 먹었지만 문을 연 가게가 많지 않은 지금으로서는 이만한 곳이 없었다. 이미 점심값을 기부했으니 예산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이거라도 먹자.
하루아침에 생사를 달리 한 사람들이 지구 건너편에서 고통스러워하는데 나는 살겠다고 점심을 먹다니..
아이러니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해리포터를 만나기 위해'크라이스트 처치'(Christ Church)로 향했다.
"한 명이요."
티켓을 구입하고 거스름돈을 받았는데 이상하다. 생각보다 동전이 많았다. 잔돈을 많이 준 건가? 의심이 가면 바로 확인해봐야 한다. 동전을 천천히 세어보니 내가 받아야 할 금액보다 많았다. 계산에 착오가 있었나?
앗~~~!!
번개같이 스쳐간 생각에 나의 촉이 발동했다. 슬며시 다시 가서 입구에 적힌 가격표를 보니 성인요금이 아닌 학생요금을 받은 것이었다.
예전에 인도여행을 갔을 때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 사원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서 입장료를 사려고 돈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내 차례에서 직원이 외친 한마디..
"PASS!!"
'저.. 저기요? 저 돈 낼 건데 패스라니요?'
키가 작은 나를 학생으로 오해한 직원이 그대로 통과시켜 버린 것이다. 당황한 나는 의지와 상관없이 뒤에서 밀려오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대로 무료입장이 되어버렸다.앞서 갔던 친구는 티켓을 구매했는데 말이다. 황당함에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던 일화는 훗날 재밌는 안주거리가 되었다.
그런 내게 10년 만에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생겨버렸다. 애가 있는 아줌만데 학생요금이라니! 다시 정정하기에는 매표소 앞에 줄이 너무 길고 정신없었다.
이상한 나라에 들어가는 기분이 이런 것인가.. 찝찝하지만 티켓을 구매했으니 일단 가보기로 한다.
캠퍼스를 감상할 겨를도 없이 와르르 사람들이몰려가는 곳으로 들어갔다.널찍하고 웅장한 계단이 나왔다. 화려한 천장 장식이 고풍스러웠다.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탄성을 자아낼 일이었던가!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며 안으로 들어가자 이곳이 진짜 해리포터 촬영지였던 그레이트홀이란 것을 깨달았다. 어쩐지 아까 갔던 곳은 규모도 작고 사람도 없더라니.. 혼자 착각하고 감격해서 구경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밖에 나지 않았다.
사람들 틈에 섞여서 천천히 구경해 본다. 벽면에 걸려있는 초상화들이 인상적이다. 중간지점부터 안쪽까지는 들어갈 수 없게 막아져 있었다. 오히려 사진 찍기도 편하고 멀리 서지만 천천히 구석구석 둘러볼 수 있어서 좋았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초록초록한 톰 쿼드(Tom Quad)가 나왔다. 해리포터와 친구들이 마법의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 것 같지만, 잔디 위에 검은색 모자와 롱코트를 입고 서있는 아저씨를 보자 시계토끼가 먼저 떠올랐다. 넓은 잔디광장의 중심에 우뚝 서있는 타워와 잘 어울렸다.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며 금방이라도 원더랜드로 데리고 갈 것만 같다는 상상이 떠오르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무도 없는 이곳은 참으로 평화롭다. 벽에 새겨진 낙서들 조차 의미 있어 보였다. 벽에 걸린 전등마저 예뻤다. 눈에 보이는 정경을 마음에 담고 카메라에 저장했다.
그렇게 한참을 거닐며 캠퍼스를 누볐다. 오래된 캠퍼스의 추억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그 시절의 나처럼 여기서 공부하는 학생들 역시 열정적으로 청춘의 특권을 누리고 있으리라.. 한 떨기 봄꽃처럼 금세 시들어버린 나의 젊은 날을 되새기며 혼자만의 캠퍼스 투어를 마쳤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념품숍이 나타났다. 이번엔 진짜 시계토끼 입간판이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듯했다. 아기자기한 외관에 반해 슬며시 들어가 본다. 앨리스를 기념하는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천천히 구경하다가 책을 발견했다. 'Alice in Wonderland'책을 원서로 소장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귀여운 책이 마음에 들었다. 아직 여행 초반인데 가지고 가야 할 짐들이 이렇게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다.
길을 따라서 정처 없이 걸었다. 오후의 거리는 한산했다. 사람들의 발걸음에도 여유가 묻어났다. 돌아가야 할 곳은 있지만 해야 할 집안일이 없는 나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편안하다. 얼마 가지 않아 작은 강이 나왔다. 오래된 다리가 놓여있었고 사람들이 곳곳에서 주말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었다. 새순이 빼꼼히 나온 나무들이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했다.
낭만 가득한 어느 봄날의 모습이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것만 같은 나의 발걸음은 다리 앞에서 멈추어 섰다.이 다리를 지나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호기심이 가득하지만 아침부터 돌아다니느라 고생한 몸뚱이는 새로운 곳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다시 돌아가는 길을 생각해야 했다. 아쉽지만 오늘의 관광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발길을 돌렸다.
오후 5시가 넘은 거리에는 문 닫은 상점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저녁식사를 해야 하는데...자칫하면밥을 먹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다시 번화가로 들어섰다. 아직 영업 중인 중식당을 발견했다. 다행이다. 굶지는 않겠구나.. 살며시 식당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부는 조용했고 사람이 많지 않았다. 혼밥 하기 딱 좋은 분위기였다. 이번에는 과감하게 정중앙 벽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본다. 출입문이 훤히 보이고 주방과 카운터에서 일하시는 직원분들도 잘 보였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금방 얘기할 수 있는.. 알고 보니 명당이었네.
마음의 여유가 생긴 나는 메뉴판을 훑어봤다. 해산물 볶음면을 주문했다. 분명 'Seafood crispy noodle'이라고 쓰여있었는데 내가 받은 음식은 상당히 기름져 보였다. 아무렴 어때.. 그저 먹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며 야무지게 그릇을 비워 나갔다.
혼자 하는 첫 여행지에서 나는.. 낯선 곳을 거침없이 누비며 '이상한 나라의 해리포터'가 된 기분이었다. 어색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달리 홀로 도시 곳곳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여행했다.만족스러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