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눈이 떠졌다. 역시 시차적응은 새벽에 깨야 제맛이다. 다들 잠들어 있는 깊은 밤 나 홀로 정신이 말똥말똥하다. 오랜만에 가져보는 고요한 시간이다.
하루의 시작은 늘 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정신이 없었다. 먼지 한 톨 날아다니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지금의 정적이 어색하지만 좋다.일상의 피로보다 여행의 피로가 더 달콤하기 때문이다. 개운하게 기지개를 켜며 굳어있던 몸을 깨워본다.
긴 하루를 보내야 하기에 부지런한 일행들과 이른 아침부터 힘차게 출발했다.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바로 전설의 괴물이 산다는 '네스호'이다. 전설의 괴물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비슷한 형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설렘 가득한 나의 마음은 엉뚱한 생각도 허용할 정도로 여유가 넘친다.
네시는 어디에...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그때 어디선가 커피 향이 솔솔 나기 시작했다. 맛있는 냄새에 이끌린 우린 하나같이 카페로 발걸음이 향했다. 네시를 보러 왔는데 어디로 가면 될지 물어봤다.
카페직원은 우리가 너무 일찍 왔다고 했다. 박물관(Loch Ness Centre)은 9시 30분에 문을 연다고.. 대신 바로 앞에 어커트 캐슬 (Urquhart Castle)이 있는데 들어가진 못해도 먼발치에서 볼 수는 있을 거라 했다.
아악!!!
아침부터 부지런 떨며 달려왔는데 오픈시간 전에 도착해 버린 것이다. 아쉽지만 외부에서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햇살이 부서지며 강물 위로 윤슬이 반짝이고 있었다.아무래도네시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다. 대신 수백 년 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요새를 멀리서 지켜보며 기념사진을 살며시 남겨본다.
저 강물 어딘가에 살고 있을 네시를 상상하며..
다시 길을 떠났다. 아침 드라이브를 즐기며 한참을 달리자 눈앞에 구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3월 중순이지만 아직까지 하얀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자연의 풍경은 장관이다. 끝없이 펼쳐진 도로 끝에 내려앉은 구름이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그냥 지나치기엔 아쉬우니 잠시 차를 세우고 구경하기로 했다. 바로 옆에 펼쳐진 눈밭 뒤로 얼음이 깔려있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앗 차가워!"
밟으면 뽀드득뽀드득 소리 나는 찰진 눈을 생각하고 겁도 없이 한걸음 크게 내딛는 순간, 발이 눈을 뚫고 쏙 들어갔다. 순식간에 양말까지 젖는 바람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공기가 발을 감쌌다.
'아.. 신발이 하나밖에 없는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당황한 나머지 웃음만 나왔다. 옆에 있던 언니가 걱정하며 휴지를 건넸다. 말리면 된다고 쿨하게 대답하며 휴지로 젖은 발을 닦았다.
눈앞에 펼쳐진 대자연에 잔뜩 홀려버린 나는 이까짓 거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지금의 순간을 사진으로 남겼다. 갈길이 먼 우린 작은 해프닝을 길 위에 남겨놓고 다시 출발했다.
홀로 당차게 서있는 Eilean donan Castle
얼마큼 달렸을까.. 오전에 네스호박물관에서 허탕 친 것이 아쉬워서 가는 길에 있는 '에일린 도난성'에 잠시 들리기로 했다. 어느새 지도를 보며 찾아가는 길에 익숙해졌다. 창밖에는 아름다운 하이랜드의 풍경이 펼쳐졌다. 끊임없이 펼쳐지는 대자연의 파노라마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지역을 이동하면서 하늘의 변주가 시작됐다. 맑고 쨍하던 하늘엔 어느새 먹구름이 들어섰다. 조짐이 좋지 않다. 저 멀리 흐린 하늘 속에서 에일린도난성이 우중충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웅장한 성이 더 커 보였다.
맑고 예뻤던 하늘.. 순식간에 회색빛
예전엔 요새로 사용되었다가 중간에 폐허가 된 뒤로 다시 복구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는데 겉모습으로만 봐서는 1200년대에 지어진 모습 그대로였다. 넓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다리를 건너서 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앞에서 잠시 기념사진을 남겨본다.
근처에 있는 기념품숍에 잠시 들러 구경했다. 여행을 가면 그곳을 기억할 수 있는 기념품을 꼭 사 온다. 하이랜드 풍경이 멋지게 담겨있는 사진을 집어 들었다. 호수 위에 떠있는 구름의 반영이 아름다운 사진이다.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가려는 바로 그때, 장대비가 억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흐렸지만 하필 이 타이밍에내리다니!
한눈에 봐도 거리가 꽤 있어 보이는 성을 두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차로 달려갔다. 막 퍼붓는 거센 빗줄기를 가르며 먼 길을 달려갈 자신이 없었다.
"유럽의 성은 다 비슷비슷하니까.. 별게 있겠어?"
"내부는 사진으로 보면 되지!"
"비싼 입장료 굳히고 맛있는 거 사 먹자~!!"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비에 젖은 우린 긍정 에너지를 한껏 뿜어내고 있었다. 여러 명이 움직이면서 모두가 한마음으로 함께 하기가 어려운데 그 힘든 걸 해내고 있었다.
오늘 안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서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청량함이 가득한 Portree
약 1시간 정도 달렸을까? 꿈에 그리던 '스카이섬'에 진입했다.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청량한 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 푸른 호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색감이 펼쳐졌다. 탁 트인 풍경이 어서 오라고 환영의 인사를 건넸다.
드디어 영국 최북단의 섬에 도착했다. 마을을 둘러보기 전에 식사를 먼저 하기로 했다.
영국에서는 절대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면 안 된다. 맛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배고픔에 이성을 잃은 우린 눈에 띄는 아무 식당에 들어갔다. 햇살이 잘 들어오는 창가 테이블에 자리 잡은 우린 저마다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했다. 음식들은 대부분 양이 푸짐했다. 일반 가정집에서 먹는 맛~ 아늑한 분위기와 어우러진 음식은 다행히 입맛에 맞았다. 어쩌면 배고픈 사람 여럿이 먹어서 맛에 관해서는 별생각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엽서 속 풍경
신나게 점심식사를 마친 우린 천천히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저마다 개성이 넘치는 건물들 사이를 걷다 보니 아기자기한 소품가게가 보였다.
우리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가게 안으로 향했다. 좁은 공간의 가게 안은 구경할 것이 많았다. 공장에서 찍어낸 똑같은 상품이 아닌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한 수공예품들이 우리를 현혹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물건의 가치만큼 가격이 나갔다.한참을 신나게 구경만 하고는가게를 나와 길을 따라 걸었다.
그곳에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파란 호수가 있었다. 유유히 떠있는 배들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보고 있는 듯했다.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엽서에서 보던 장면이 나왔다. 알록달록한 집들이 나열되어 있는 'Colour House'이다. 비현실적인 풍경에 마치 그림 속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소녀소녀한 일행들과 함박웃음을 지으며 한참 동안 우리의 추억을 기록했다. 다시 오지 않을 이 순간을..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이곳에서의 시간을 그냥 흘러 보내고 싶지 않았다. 동화 같은 풍경만 찍고 가기엔 뭔가 아쉽고 부족했다. 기왕 먼 길 떠나온 거 섬 주변을 짧게 둘러보고 가기로 했다.그래, 언제 또 올지 모르는데 이대로 떠날 순 없지!
자동차여행의 진정한 매력이 시작됐다.
섬을 빠르게 반바퀴 정도만 돌아보기로 했다. 끝없이 펼쳐진 자연을 벗 삼아 지도를 보며 길 따라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스코틀랜드 전통음악이 들려오는 듯했다. 아니다! 한국 가요를 틀며 신나게 질주 중이다. 이유야 어떻든 천혜자연 속에서 드라이브하는 기분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자연이 깎아 놓은 언덕 위엔 양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바로 지금이야! 차가 한 대도 없는 도로 위에서 우린 가던 길을 멈추고 내렸다. 땅을 밟으며눈부신경치를 만끽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나는 지금, 자유롭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웃음소리를 내고 있는 중이다. 이곳을 진심으로 즐긴 우린 밀려오는 서운함을 떨쳐버리고 다시 길을 떠났다.
지도 한 장 들고 떠나는 여행
집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여정이 시작됐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고 있지만, 새로운 곳으로 다시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다채로운 자연의 모습에 계속해서 감탄을 자아냈다. 오는 길에 눈여겨봐두었던 마을을 다시 지나가게 되자 본능적으로 멈춰 섰다. 차를 한편에 세워두고 가만히 경관을 눈에 담아본다.
하얀 구름이 물 위에 비치며 환상적인 데칼코마니를 자아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행복이다. 우연히 멈춘 낯선 마을에서의 시간을 뒤로한 채종착지인 집으로 향했다.
다시 돌아온 인버네스에서 이른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근처에 있는 맥도널드로 갔다. 햄버거를 먹으면서도 머릿속엔 온통 돌아가야 할 길 생각뿐이었다. 눈보라를 맞으며 힘겹게 넘어왔던 가파른 산길을 또 지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위험할 거 같았다.
가방에 들어있던 지도를 꺼내서 유심히 길을 살펴봤다. 국립공원을 가로지르는 길 말고 북쪽으로 돌아가는 길이 눈에 띄었다. 다행히 길 주변으로 공원이나 산이 보이지는 않았다. 지도를 보여주며 일행에게 의견을 물었다. 언덕배기에서 시동이 꺼졌던 경험을 했던 터라 모두가 돌아서가는 길에 찬성해 줬다.
모 아니면 도다! 일단 가보자!
운전대를 잡은 J를 도와서 새로운 길로 열심히 안내했다. 이정표와 지도를 번갈아서 보며 GPS까지 확인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쭉 뻗은 자동차도로가 시원하게 펼쳐졌다.
바로 이거지!
밝게 빛나는 가로등이 새삼 반가웠다. 차가 한 대도 없는 시골길이 아닌 오랜만에 도시의 길을 달리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옆으로 쌩쌩 지나가는 자동차들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험난했던 도로에서 혹독하게 신고식을 치렀던 J의 운전실력이 몰라보게 늘었다. 뻥 뚫린 넓은 하이웨이를 신나게 질주하고 있는 중이다.
지도 한 장에 의지한 채 무작정 떠나온 여행.. 출발부터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결국엔 해내고 말았다! 잊지 못할 추억을 한 보따리 만들고 출발했던 곳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Home sweet home~!
어느새 정들었던 이곳을 내일이면 떠나야 한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버킷리스트에 있었던 '스카이섬'에도 다녀왔다. 일상과 바꾼 여행의 시작이 정신없이 끝나버렸다. 이제 진짜 혼자가 되어 여행을 해야 한다.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