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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K Jul 12. 2024

계획대로 되지 않는, 여행의 매력

Highlands

이른 아침, 약속장소로 하나둘씩 모였다.

예전부터 동경하던 '스카이섬'에 가기로 한 날이다. J의 친구들도 함께 하기로 했다.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어제 예약해 두었던 렌터카를 찾으 공항으로 갔다.


문제는 지금부터 시작됐다. 4명이 떠나기로 한 여행이 5명이 된 것이 화근이었다. 어젯밤 펍에서 만난 친구가 스카이섬에 가고 싶다고 즉석에서 합류했다. 직원은 5인승 차량은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승용차에 탑승 기준이 이렇게 까다로울 줄이야.. 뒷좌석은 3인승이 아니었던가!


출발하기 전부터 난감한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렌터카 직원이 가능한 차량을 수소문해 주기로 했고, 그렇게 무한 대기시간이 시작됐다.


꿈에 그리던 하이랜드 여행이 무산될까 걱정됐다. 지금이 지나가면 다시는 오지 못할 수도 있기에 나에게는 더욱더 간절한 여행이다. 그 처음을 이렇게 망쳐버릴 수는 없다.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 일행들과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이 또한 여행의 과정인 것이니.. 딱딱한 공항 의자에 앉아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뭐라도 먹으면서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아니한가!


에너지를 한껏 끌어올리며 신나게 수다 떨고 있을 때 다행히 우리의 긍정신호에 화답이 왔다. 기쁜 마음으로 한달음에 달려가서 차를 받았다. 음.. 차가 더 커진 것도 아니고 내가 빌린 차와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반나절이 지난 뒤지만 어쨌든 출발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다만 자동차 기어가 스틱이라 2종 면허를 갖고 있는 나는 운전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 하~ 국제 면허증까지 준비해 오며 광활한 대자연을 질주하겠다는 나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유일하게 1종 면허를 갖고 있는 J가 홀로 운전을 해야 했다. 전을 시작한 지 한 달 밖에 안 됐는데 장거리운전을 오롯이 혼자서 해내야 한다. 걱정스러운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J는 해맑게 웃으며 A4용지를 꺼냈다. 커다랗게 L(Learner)이라고 적은 뒤 차 뒷유리에 붙였다. 이렇게 하면 모두가 피해 다닌다고 멋쩍게 웃었다.


좋아! 어쨌든 출발다. 가보자고!


차에는 다행히 GPS가 있었다. 혹시 몰라서 준비해 온 지도를 가지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GPS

지금처럼 화려한 그래픽의 내비게이션이 아닌 작은 LCD화면에 초록색 바탕으로 근거리의 방향만 나타내주는 초창기 GPS 모델이다. 직진 몇 미터 뒤에서 좌, 우로 가야 하는지 안내음성이 나온다. 화면이 밑에 달려 있어서 음성안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공항을 빠져나가서 처음 얼마동안은 시내길을 운전해야 해서 J는 잔뜩 긴장했다. 정말 놀라운 것은 모두가 알아서 잘 피해 간다는 것이다. 천천히 간다고 누구 하나 경적을 울리거나 앞질러 가지 않았다. 양보해 주고 비켜주는 차들의 뒷모습이 이토록 아름다울 줄이야!! 급할 것 하나 없는 도로 위에서 품위가 느껴졌다.


L 사인의 힘이다!


조심스럽게 시내를 빠져나오며 자동차전용도로가 나오자 모두가 긴장을 내려놓으며 언제 그랬냐는 듯 수다를 이어갔다.


GPS안내 음성이 줄어들었다. 직진 코스로 신나게 주행 중이다. 지도와 이정표로 가는 방향을 더블체크하며 수다를 떠는 와중에도 웅장한 스코틀랜드의 자연에 감탄하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차들도 별로 없고 쭉쭉 뻗은 도로를 달리고 있자니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어느새 음악까지 트는 여유가 생긴 우린 진심으로 이 여행을 즐기며 만끽하는 중이다.

새하얀 눈밭


아찔한 추억의
Cairngorms National Park



얼마나 달렸을까?


멀리 보였던 산이 점점 가까운 시야로 들어왔다. 쭉 뻗은 도로는 어느새 굽이굽이 난 산길로 바뀌었다. GPS신호는 이미 끊어진 지 오래됐다. 이정표와 방향 감각으로만 목적지를 찾아가야 한다. 경사진 비탈길이 계속되자 J는 다시 초집중 모드로 들어갔다. 그런데 경사가 점점 심하게 가팔라지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은 역시 현실이 된다.


액셀과 클러치를 세밀하게 조절하는 것이 초보에게는 유난히 어려운 일이다. 가장 경사가 가파른 곳에서 시동이 멈춰버렸다. 밝고 즐거웠던 차 안에는 금세 정적이 흘렀다. 모두가 긴장하고 있었다.


자.. 지금부터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섬세한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경력자가 없는 이 상황에서 누구 하나 나서서 조언을 해 줄 수가 없었다. J도 머리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지만 쉽게 발이 떼지지 않는다고 했다.


예전에도 이와 같은 경험이 있었다. 학과 사람들과 시험공부를 하다 말고 야식을 사러 편의점에 갔다 오는 길에 하필 언덕 위에서 차가 멈췄었다. 다들 비명을 지르고 아수라장이 된 차 안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렸던 운전자가 셀과 클러치를 현란하게 밝으며 차가 붕 떠서 앞으로 튕겨나갔었다. 감사하게도 별다른 사고 없이 지나갔지만 언덕에 대한 트라우마는 여전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그때, 사이드 미러로 뒤에서 올라오고 있는 차를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얼른 문을 열고 뛰쳐나가서 차를 세웠다. 차가 시동이 꺼져서 그러니 도와달라고 외쳤다.


인상이 좋은 아저씨가 흔쾌히 한쪽에 차를 세우고 와주셨다. 다시 차에 올라탄 조수석 창문 너머로 아저씨는 침착하게 얘기했다.


"단 사이드브레이크를 채워야 해요. 시동을 걸면서 기어를 1단에 놓아요. 클러치를 조금만 떼고 바로 액셀을 밟는 거예요. 겁먹지 말아요. 할 수 있어요. 천히 부드럽게 해 봐요."


아저씨는 진지하게 조언을 해주셨다. 용기를 얻은 J는 집중해서 알려준 대로 시도했다. 다행히 차는 다시 시동이 걸렸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우린 일제히 창밖으로 감사의 인사를 외다. 아저씨도 뛸 듯이 기뻐해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한차례 고비를 넘긴 우린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저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생겼다. 하지만 평화를 되찾은 것도 잠시 차는 끓임 없는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는 중이다.


안개가 짙어졌고 길 위에는 눈곳곳에 쌓여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눈보라까지 날리기 시작했다. 한시름 놓은 것도 잠시 다시 차 안에는 긴장감이 돌았다. 이 길로 가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높고 가파른 언덕과 짙은 안개, 좋지 않은 도로상황 등.. 모든 것이  영화처럼 느껴졌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왔다는 생각이 들 무렵 창밖에 난데없이 스키장이 나타났다. 와.. 이렇게 높은 곳에 스키장이 있다니! 더군다나 앞도 잘 안 보이는 안갯속에서 스키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곳을 그냥 지나치면 다시는 사람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급히 차를 세우고 이제 막 스키장을 나서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길을 물었다. 다행히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맞다고 했다. 우리는 지금 하이랜드 한가운데 있는 국립공원을 넘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 길이 나온다!


정상에서 험난했던 구간을 지나자 평화로운 내리막길이 시작됐다. 언제 그랬냐는 듯 내리던 눈이 그치고 안개도 사라졌다. 오랜만에 보는 한줄기 햇빛이 반가웠다. 해가 비추기 시작하자 모든 풍경이 뽀송뽀송해졌다.


정갈하게 나열된 네모 반듯한 건물들이 줄지어 나왔다. 이름 모를 마을이 나오자 긴장이 풀린 우린 이곳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고 조용한 마을은 아무 일 없단 듯이 평온했다. 짙게 내려앉은 오후의 햇살이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일들을 폭풍우처럼 맞아서 지쳐버린 마음을, 괜찮다고 이제 다 끝났다고 위로하며 감싸주는 것 같았다.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한다.


렌터카 일로 반나절을 낭비한 우린 스카이섬에서 1박을 하기로 한 계획을 변경했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달려가도 늦은 시간에 도착할 것이다. 체력을 다 써버린 J에게도 휴식이 필요했다.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가까운 도시인 인버네스에서 숙소를 구하기로 했다.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를 향해 다시 힘차게 달려본다.



우연히 Inverness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쯤 인버네스에 도착했다. 우선 오늘 밤 지낼 숙소를 알아봐야 했다. 시내를 걸어 다니며 지낼만한 곳이 있는지 찾아봤다. 관광지의 시내엔 보통 숙소가 있기 마련이다. 교통의 중심지이자 유명 관광지까지도 이동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석양이 아름다운 인버네스


몇 걸음 걷지 않아 유스호스텔 발견했다. 조심스레 들어가서 방이 있는지 물어봤다. 일행이 함께 지낼 방이 있었다.


여행을 갈 때 늘 교통수단과 숙소는 미리 정해놓고 가는 편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일정이 급작스레 변할 때엔 현지에서 정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흥여행의 매력을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마음이 편해진 우린 짐을 옮겨놓고 간단히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마트로 갔다. 은 시간이라 딱히 갈만한 곳이 없었다. 숙소에 주방이 있어서 간단히 조리해서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사 왔다.


걸스 나잇이 시작되었다.


간단하게 조리한 볶음밥과 소시지로 저녁식사를 했다. 다 같이 모여서 거드니 일이 빨리빨리 진행됐다. 식사 후 정리까지 일사천리로 해치운 우린 공용공간에서 보드게임을 했다. 긴 하루를 보내서 피곤했을 테지만 함께 보내는 처음이자 마지막 밤을 신나게 보내는 중이다.


그때 누군가 고스톱을 꺼내왔다. 외국 유스호스텔에서 고스톱이라니! 웃음이 끊이지 않은 우린 늦은 시간까지 청단에 고도리까지 외치며 광란의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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