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이라는 평범한 단어가 내뿜는 강렬한 에너지로 스코틀랜드에서 첫 아침을 맞이해 본다. 가족을 사랑하지만 나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하는 이기적인 여자니까.. 낯선 곳으로 떠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공항 밖으로 나와서 깊게 심호흡을 했다.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찔렀다. 바다냄새가 났다.상쾌함이 찌뿌둥한 몸속을 가득 채웠다. 이른 봄날의 따스한 햇살이 반갑게 맞이해 줬다.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온몸 가득 행복감으로 기운이 솟은 나는 캐리어 손잡이를 힘차게 움켜쥐었다.
아직 이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캐리어를 끌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Union square로 향하는 727번 버스에 올랐다. 창밖으로 보이는 우중충 하면서도 정갈한 스코틀랜드의 건물들이 인상적이다. 목적지에 내려서 다음 버스 정류장인 Music Hall로 갔다. 나의 발걸음은 마치 예전부터 이곳에 살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이미 출발하기 전부터 친구 J의 집까지 가는 길을 수없이 보고 왔다. 구글맵으로 모든 경로를 파악하고 수첩에 가는 길을 지도로 그려왔다. 준비성이 철저한 덕분에 지금까지 일사천리로 잘 찾아왔지만 문제는 지금부터다.
저 멀리서 기다리던 버스가 천천히 진입했다.
"안녕하세요. bield side역에서 내려야 하는데 혹시 도착하면 알려주실 수 있나요?"
버스기사아저씨께 티켓을 사면서 말을 걸었다. 시내에서 달리는 버스에는 정류장안내가 전광판에 나오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안내방송도 나오지 않고 전광판에는 누군가 하차벨을 누르면 오로지 STOP이라는 글자만 나온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불편함이 없겠지만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분명 긴장할 것이다.
몇 정거장을가야 하는지 이미 다 세고 왔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리 버스기사 아저씨께 목적지를 당부하고 캐리어를 한쪽에 세우고 섰다. 고개를 돌리니 유모차에 앉아있던 아기가 상큼한 미소를 보여줬다. 찡긋이 눈인사를 하며 아기의 사랑스러움에 감탄하고 있을 때부드러운 인상의 아기 아빠가말을 걸어왔다.
체구가 작은 동양인 여자가 자신의 몸만 한 캐리어를 들고 버스를 타고 있으니 이 멀리까지 무슨 일로 왔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한국에서 왔는지 물었다. 스페인 여행 중 한국인 여자를 만나서 알게 되면서 한국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나는 한국에서 왔고이곳에살고 있는친구를 만나러 왔다고말했다. 아저씨는 내려야 하는 곳이 어딘지 알려주겠다고 했다.
예쁜 여자 아이의 이름은 '마야'라고 했다. 동글한 눈망울에 뽀글뽀글 금발머리가 귀여웠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인형 같았다. 아저씨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주고받다가 내릴 때가 되었다고 해서 내리려는데, 빨간색 모자를 쓴 여자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혹시 Newton Dee로 가는 게 맞나요?"
본인도 그곳으로 가는데 한 정거장 더 가서 내리는 게 가깝다며 길을 안내해 줄 테니 함께 내리자고 했다. 처음 만난 친절한 사람들에게서 따스함을 느꼈다. 그렇게 아저씨와 마야에게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작별인사를 하고 빨간색 모자를 쓴 여자를 따라서버스에서 내렸다.
그녀는 친구를 만나러 카페에 간다고 했다. 가는 길에 J가 일했던 카페를 발견했다. 그녀가 가려던 카페라고 했다. 이런 우연이 있나! 내가 4년 전에 이곳에 왔었다고 얘기하자 놀라워했다. 반가운 마음에 잠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안에 들어가니 한국분이 일하고 있었다. 그분은 놀랍게도 J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특별한 인연들을 만난 덕분에 머나먼 낯선 땅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행복한 커뮤니티
J는 스코틀랜드에 있는 복지시설에서 일을 하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일반 가정집에서 함께 지내면서 도움이 필요한 노인분들이나 장애인 분들을 돌보는 것이다.
이번에 새로 온 곳은 채광이 잘 드는 예쁜가정집이었다.가운데 넓은 거실이 있고 긴 복도를 따라서 곳곳에 방과 욕실이 있었다. 거실 옆 또 다른 공간에는 주방이 있었다. 마치 개미집과 비슷한 구조가 신기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J와 함께 지내는 하우스마더가 반갑게 맞이해 줬다. 복지시설의 대표를 '하우스마더'라고 불렀다. 하이톤의 목소리로 밝고 명량하게 인사를 건넨 그녀는 자신도 어린아이가 있다면서 아이를 두고 홀로 여행하는 내가 대단하다고 했다.
그녀는 출산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와서 집안일을 했다며 한국의 산후조리원 시스템에 연신 놀라워했다. 정말 짧은 시간에 많은 얘기들이 오고 갔다. 그녀는 다행히도 빈방이 있다면서 J의 옆방을 선뜻 내어주고는 빠르게 점심을 준비해 줬다. 이곳에서 지내는 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준비한 점심메뉴는 라자냐와 샐러드였다.
그들의 따뜻한 환영에 무한 감동을 받은 나는 맛있게 점심식사를 했다. 특히 양파와 오이, 토마토가 들어간 절인 샐러드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맛이다. 분명 어떻게 만드는지 옆에서 지켜봤는데도 도저히 흉내 낼 수가 없다.
즐겁고 수다스러운 식사시간이 끝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J가 일하러 간 사이 내일 필요한 렌터카를 알아봤다. 재빠르게 여러 렌트사 사이트에서 가격을 비교한 뒤 가장 저렴한 것을 찾았다. 외국사이트에 가입하는 것이 번거로워서 전화로 예약을 마쳤다.
할 일을 끝내자 무료해진 나는 잠시 나가서 동네 한 바퀴 걷기로 했다. 무작정 걷다가 눈에 띄는 가게로 들어갔다. 밀려오는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생수 한 병을 집었다. 계산대에 있는 미니지도를 함께 결제한뒤 펼쳐보지도 않고 가방에 집어넣었다. 만약을 위한 보험이니까.. 지도가 가방 속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든든했다.
거리는 깨끗하고 조용했다. 단정하게 늘어선 대저택들의 건축양식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유럽의 느낌이 강한 런던 주택과 달리 시원하게 뻗은 직선의 건축물이 인상적이었다. 똑같아 보이지만 은근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주택의 모습이 여유로워 보였다.
'이런 집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문득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홀로 되뇌며 걷고 있을 때 우연히 J의 친구를 만났다. 그녀는 하우스마더의 아들을 산책시키고 있던 중이었다.
유모차 안에는 쪽쪽이를 물고 있는 남자아이가 타고 있었다. 아들과 동갑인 파란 눈동자의 꼬마 친구를 보자 집에 있는 아들이 생각났다. 밥은 잘 먹는지, 잠은 잘 자는지.. 걱정되는 것도 잠시 새로운 일행과 집으로 돌아갔다.
저녁이 되어 J와 오랜만에 펍에 갔다.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가고 싶은 곳은 바로 'PUB'이었다. 처음 영국에 왔을 때 매일 같이 출석도장을 찍은 곳이다. 동네에 있는 펍은 흔한 술집이지만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만남의 장과도 같은 곳이다.
집 앞에 있는 펍에서 라이브공연을 한다고 찾아간 것이 시작이었다. 좁은 공간에서 기타와 드럼연주에 맞춰 노래 부르는 밴드의 공연은 평생 잊을 수 없다. 공연이 끝나고 앨범을 들고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다니는 멤버들이 신기했었다.
한국인 여자친구가 있다는 매니저가 일하는 또 다른 펍은 어느새 아지트가 되었다. 외국인 친구들과 매일밤 주크박스에 동전을 넣고 신청곡에 맞춰 춤도 추고 빙고게임도 했다. 요일마다 하는 다양한 이벤트는 빠질 수 없는 소셜라이프였다.
콜롬비아에서 온 정들었던 친구의 이별파티를 위해 경찰에게 양해를 구하고 새벽까지 놀았던 기억도 새삼 떠오른다. 영국에 와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기에 이별파티도 화려하게 했었다. 펍은 영국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연 많은 곳이다.
바로 그 PUB에 지금! 가고 있다!!
한껏 들뜬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쪽에 놓여있는 당구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디를 가든 비슷한 구조와 실내 인테리어가 정겹다. J의 친구들도 함께 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지만 예전부터 알고 지낸 것처럼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것이 신기했다.
오랜만에 마시는 기네스.. 쌉싸름한 맛에 부드러운 크림이 조화로운 맛.. 바로 이 맛이야!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마시는 맥주는 정말 시원하고 맛있다.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렇게 짧은 시간의 즐거운 만남을 뒤로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J와 나는 한국에서 가지고 온 음식들을 풀어헤쳤다. 라면으로 2차전을 시작한 우린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풀었다.
밤늦게까지 친구와의 수다.. 푸짐한 야식.. 얼마 만에 느껴보는 자유인가! 일상에서 일탈을 꿈꾸던 나의 간절했던 바람은 드디어 현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