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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K Jul 26. 2024

유럽에서 비행기 연착은 흔한 일

기다림의 연속

맑고 쾌청한 아침이 밝았다. 지지배배 지저귀는 새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왔다. 을 꾼 듯 코틀랜드에서의 마법 같은 시간을 뒤로하고 벌써 떠나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쉽지만 또 다른 여행을 위해 짐을 다시 꾸려본다. 옆방에 사는 언니가 샌드위치를 만들어줬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따 마음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J와 동네에서 가벼운 산책을 했다. 자연과 어우러진 작고 조용한 마을이 참으로 좋았다. 좁다랗게 난 오솔길이 속에 들어온 기분 들었다. 조금 걷다 보니 호수가 나왔다. 가만히 들여다봤다. 잔하게 흐르는 물결에 마음이 차분해졌다. 맑은 햇살에 비친 오리와 거위의 깃털이 유난히 하얗게 반짝였다. 반가운 마음에 살며시 다가가 본다.

아침 산책


급할 거 하나 없는 평온한 아침이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을 정말 알차게 보내고 있는 중이다. 금 이 순간을 아주 소중하게..



삶과 죽음


상쾌했던 아침 산책을 마치고 렌터카를 반납하기 위해 J와 다시 공항으로 갔다. 마지막 주유소에서 가득 기름을 채웠다. 늘 그렇듯 여행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은 아쉬움에 복잡한 여러 감정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런던으로 가면 또 다른 여행이 시작될 것이다. 진정한 혼자만의 여행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차를 반납하고 비행시간까지 여유가 있었다. J와 근처 카페에 가서 잠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J는 오늘 함께 여행한 사람들과 장례식장에 간다고 했다. 여기서 생활하다 보면 양한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고 했다.


외국의 장례문화는 우리나라와 다르다.  같이 지내던 분들이 돌아가시면 일주일정도 지내던 방에 모신다고 한다. 그동안 가족, 친지, 친구분들이 방문해서 함께 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고인과 작별인사를 한다고 했다. J는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일상이 되다 보니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고 했다. 오히려 곤히 잠든 모습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방식은 다르지만 고인이 된 분을 추모하는 마음은 같을 것이다. 얘기를 듣다 보니 낯선 장례식장에서 잠시 스쳐가며 고인을 배웅하는 것보다 살던 집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것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결 편안한 분위기에서 살아생전을 추억할 수 있을 것이다.


J는 나중에 자신이 죽으면 슬퍼하지 말고 모두가 와서 웃으면서 보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음악도 틀고 춤도 추고 술도 마시며 늘 그랬던 것처럼 즐겁게 놀다가 가라고..


무덤덤하게 죽음을 바라보고 미리 생각해놓고 있는 J의 생각을 듣다 보니 나보다 더 어른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절반도 살지 않은 나는 과연 죽음 앞에서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진중한 얘기를 뒤로하고 다시 신나게 수다 떨다 보니 어느새 출발할 시간이 되었다. J와는 며칠 뒤 런던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기다림의 연속


오후 2시에 출발 예정이었던 비행기는 시간이 다 되어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유난히 유럽여행을 할 때 비행기가 연착된 경험을 많이 했었다.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돌아오던 날 밤도 오랫동안 비행시간이 지연됐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서 항의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기계결함, 날씨 등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무엇 때문에 연착됐는지 잘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그저 기다리라고 할 뿐..


안전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로 인해 스케줄에 문제가 생겨서 손해 보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나 역시 이미 일정에 맞춰서 한국에서 교통수단을 미리 예약하고 왔다.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으면 티켓은 무용지물이 된다. 최저가로 구입했다 하더라도 돈이 눈앞에서 날아가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


조금 있자니 전광판에 비행시간이 떴다. 출발시간은 오후 7시..


Oh! My GOD!!!!!


작 5시간을 이 작은 공항에서 보내야 한다. 그것도 혼자서! 뭘 하면서 보내야 하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수다를 떨어줄 친구들도 더 이상 없다. 여행 중 어떤 최악의 상황이 와도 긍정마인드로 버텼었는데 그 마음에 빨간불이 켜졌다.


공항 TV에서는 연신 축구경기만 중계하고 있었다. 유럽축구가 아무리 재밌다고 하지만 홀로 쓸쓸히 보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지루하니 슬며시 일어나서 걸어본다.


그때 서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뭐라도 읽자. 요즘 재밌는 책이 뭐가 있는지 구경했다. 가장 생각 없이 읽기 편한 책으로 한 권 집어 들었다. 계산을 하고 나와서 다시 안락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책장을 한 장, 두 장 넘기는데 생각처럼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모든 신경이 온통 핸드폰시계로 가있었다. 이미 오늘의 여행지인 옥스퍼드에 도착했을 시간을 훌쩍 넘겼다. 지만 내 발은 아직도 아버딘공항에 묶여 있을 뿐이다.


공항 내에서 운 좋게 무료 와이파이를 연결했다. 하지만 공용 와이파이는 속도가 엄청 느리다. 핸드폰도 더 이상 재미없었다. 지루함과 따분함의 연속인 시간은 거북이처럼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일뿐이었다.


어떻게든 시간은 흘러간다.


기나긴 인고의 시간 끝에 드디어 비행기에 탑승했다. 후~~ 이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어쨌든 발할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짧은 비행이 끝나고 런던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다시 런던에 왔다!


기쁨도 잠시 캐리어를 찾자마자 해야 할 일이 있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옥스퍼드행 코치를 알아봐야 한다. 이미 결제를 마친 종이티켓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다. 현실을 탓하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서둘러서 버스 시간을 확인한 뒤 티켓을 구입했다. 휴~~ 출발시간까지 약 1시간 정도 남았다. 도착하면 자정이 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상황이 인간의 본능을 깨운다.


늦은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M&S(Marks & Spencer)로 갔다.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마끼를 집어 들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맛이 어떠한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굶주린 배를 채우기 바쁘다. 홍콩공항에서 수줍게 첫 저녁식사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3일 만에 아줌마의 본능은 공항 한복판에서 끼니를 때우는 데 성공시켰다.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잠들지 않는 도시
Oxford


배가 불러서 행복한 나는 버스를 타러 유유히 걸어갔다. 마지막 여정은 여유 있게 출발해 본다. 버스에서 바라보는 런던풍경이 눈물 나게 반가웠다. 야경이 아름다운 도심보고 있자니 문득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가 생각났다.


미리 예약한 택시를 타고 브라이튼까지 가는 내내 바라보았던 창밖 풍경이 오버랩됐다.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에  반사되어 온통 주황빛으로 물든 집들이 인상적이었다. 하나같이 크고 예뻤다. 이렇게 큰 저택에 가족들이 산다고? 얼마나 대가족인 거야? 하며 감탄했던 것이 엊그제 같다. 시간이 흘렀는데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이 신기했다.


한참을 부지런히 달리던 버스는 마침내 옥스퍼드에 진입했다. 뭔가 교육의 도시답게 정갈하고 단정한 분위기겠지.. 하는 나의 짐작은 1분도 안 돼서 깨져버렸다. 거리에서는 흥겨운 음악소리가 울려 퍼지고, 멋진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모여서 신나 토요일밤을 보내고 있었다. 자정이 넘었는데도 그들의 파티는 이제 막 시작한 듯 한껏 분위기가 무르익어 보였다.


시끌벅적한 구간을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을은 다시 어둡고 조용했다. 하루를 통으로 날려 보내고 드디어 옥스퍼드에 무사히 도착했다. 숙소는 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어 방향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난감해하던 차에 다행히 같은 버스에서 탔던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달려가서 길을 물었다.


그 남자는 한쪽 끝을 가리키며 그리로 조금만 걸어가면 숙소가 나온다고 했다.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깜깜한 밤길을 혼자 걷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겁이 많아서 늦은 시간에는 잘 다니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길을 홀로 걷고 있는 기분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덜덜거리는 캐리어 바퀴소리만이 유일한 길동무가 되 주었다.


그렇게 홀로 씩씩하게 길을 걷던 중 드디어 저 멀리 불 켜진 숙소를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남자가 반갑게 맞아해 줬다.


바로 앞에 있는 리셉션 뒤로 보이는 화려한 인테리어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누가 봐도 젊은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오렌지톤의 내부엔 다양한 소품들이 자유롭게 장식되어 있었다. 치 시간을 거슬러 다른 세계로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바람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한 바깥세상과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쿵짝쿵짝 들려오는 음악소리마저 시원다. 오늘의 피로가 한방에 풀리는 순간이다.


"안녕하세요. 예약했는데 비행기가 지연돼서 늦게 도착했어요. 핸드폰 연결도 안 돼서 연락을 못 드렸어요. 죄송해요."


"괜찮아요. 기서는 흔한 일인 걸요. 혹시 여행 중에 YHA에 또 머물 계획이 있나요? 멤버십가입을 하면 다음번 할인받을 수 있어요."


고 유쾌한 목소리에 홀려서 나도 모르게 회원가입을 하고 있었다. 런던에서도 같은 유스호스텔에서 머물 예정이만 이미 예약을 마친 상태이기에 혜택을 받지는 못할 것이다. 마음과 다르게 손은 부지런히 펜을 움직이며 빈칸을 채우고 있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방을 찾아갔다. 살며시 문을 열자 원목으로 된 2층 침대가 나란히 양쪽 벽에 놓여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침대 번호는 단번에 찾을 수 있었다. 이미 깊은 잠에 빠져있는 룸메이트들에게 방해가 될까 조심스레 짐을 내려놓았다. 잠시 앉아서 호흡을 가다듬어 본다. 이제야 진짜 여행 온 기분이 났다. 캐리어 맨 위에 넣어 둔 세면도구를 꺼내서 씻고 나왔다.


두 다리 뻗고 대에 웠다. 고단했던 긴 하루디어 끝났다. 내일 느긋게 하루를 시작바라며 잠을 청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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