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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K Oct 11. 2024

흐린 하늘 아래 홀로 반짝이는 캐슬

Leeds Castle

스코틀랜드로 돌아가는 J를 배웅하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계속 혼자였다면 몰랐을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나에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막까지 최선을 다 해서 자유를 즐겨보리라! 텐션을 끌어올려 본다. 오늘은 런던 근교로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오려 한다.


름다운 성이 많은 나라, 영국. 정작 성 투어는 해본 적이 없다.


아! 처음 영국에 왔을 때 브라이튼에 있는 '로열 파빌리온(Royal Pavilion)'에 방문한 적이 있었구나!


인도 고딕양식의 수려한 겉모습이 눈길을 사로잡은 곳이다. 눈에 띄는 외관에 걸맞게 내부 인테리어도 호화스러움의 극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상하게 주방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각종 도구와 식재료들이 걸려있 현장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국에 가면 성은 꼭 가보자 했었다. 


이번 여행에서 우연히 '에일린 도난 성'과 '아룬델 성'에 다녀왔지만 안타깝게도 내부는 보지 못했다. 런던 근교에도 아름다운 성이 많기에 어디를 갈지 알아봤다.


그 첫 번째 후보 '윈저 성(Windsor Castle)'. 


인터넷에서 본 사진만으로도 압도되는 규모와 화려하고 웅장한 외관을 자랑한다. 다소 투박한 느낌의 거대한 성곽은 적이 침입해도 끄떡없을 모양새를 갖췄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애정하는 윈저성에서 실제로 거주하며 주말을 보내기도 했던 곳이다. 하지만 대한 성을 혼자서 둘러볼 자신이 없었다. 유명하고 사람 많은 윈저 성이 조금 부담으로 다가왔다.


두 번째 후보 '리즈 (Leeds Castle)'.


영국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한 성이다. 성을 에워싸고 있는 해자 위에 둥둥 떠있는 듯한 느낌, 사진에서도 느껴지는 우아한 모습에 한눈에 매료됐다.


그래, 바로 여기야!


더 생각하고 비교해 볼 것 없이 목적지는 정해졌다.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Leeds Castle


이른 아침 서둘러서 기차역으로 향했다. 빅토리아 역에 있는 음식점에서 대충 아침을 해결하고 'Bearsted'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마지막 기차여행이 시작됐다.


이번엔 런던에서 동쪽으로 내려간다. 창밖의 풍경에서 유난히 시선을 떼지 못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경치를 하나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담고 있는 중이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로 풍경에 흠뻑 취해있었다. 눈 깜짝할 새 기차는 작은 시골역에 내려주었다.


음~ 역시 공기가 다르구나... 기차역 밖으로 나오니 마치 경춘선을 타고 이름 모를 시골 마을에 도착한 기분이 들었다. 간이역처럼 생긴 작은 역사 밖에는 사방에 막혀있는 주차장만 있을 뿐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홀로 덩그러니 서있었다.


"리즈성으로 가시나요?"


한 아저씨가 말을 건넸다.


"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기 보이는 버스에 타세요. 리즈성까지 가는 버스예요."


아저씨가 손으로 가리키는 끝에는 흰색 승합차가 있었다. 리즈성까지 가는 셔틀버스가 있었구나...


"감사합니다."


뭔가에 홀린 듯이 자연스레 왕복티켓을 구입했다. 버스 안에는 커플로 보이는 남녀가 타고 있었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며 좌석에 앉았다. 그렇게 단출한 인원을 태우고 버스는 출발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온통 초록빛깔 나무뿐이었다. 잔뜩 풀향기만 맡기를 시작한 지 5분 정도 됐으려나.. 성은 온데간데없고 초록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철문 앞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숨겨진 미지의 성을 찾아서 마치 비밀의 화원으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성인 1명이요."


"아... 저... 이 돈은 구화폐라 사용이 불가해요."


"네?"


"은행 가서 새로 바뀐 화폐로 교환하셔야 해요."


맙소사!!


영국에서 함께 생활했던 친구가 출발 전에 20파운드짜리 지폐를 줬었다. 수첩에서 발견했다면서 맛있는 거 사 먹고 힐링하고 오라고...


보다 의미 있는 곳에 쓰고 싶어서 리즈성 입장권을 구매하려 했는데 옛날 화폐라니!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았는데 그사이 지폐가 바뀐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통용이 불가했다. 아쉬운 마음에 리즈성 입구를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게 찍어본다.


우리가 보냈던 시간이 과거의 저편에 남겨져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영원한 건 없다. 오직 사진만이 추억할 뿐...


지금 남긴 기록도 이미 과거가 되었다.



푸르름을 가득 머금은 정원은 온통 초록세상이다.


산책로를 따라 걷는 와중에 만난 공작새 친근하게 다가왔다. 오래된 나무는 건장하게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광채 나는 초록잎을 자랑하고 있다.


고요한 산책길은 지금까지 걸었던 길 중 가장 신비로웠다. 그렇게 한참을 자연과 함께 거닐다 보니 저 멀리 리즈성이 자그맣게 보이기 시작했다. 흐린 하늘 아래 홀로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영롱한 모습에 반해 한달음에 달려갔다.


같은 셔틀버스를 타고 온 커플 이미 아름다운 성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기념사진을 찍어줬다. 덕분에 나도 성을 배경으로 전신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성을 둘러싼 해자를 건너기 위해 튼튼하게 지어진 돌다리를 건넜다. 우리가 아는 그 모습! 성으로 들어가는 둥근 아치형의 문이 바로 눈앞에 보였다. 양쪽에 철갑을 두른 중세시대 병사들이 창을 들고 서있을 것만 같은 배경이었다.


하지만 왕비들이 사랑했던 고풍스러운 성은 전쟁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호숫가에 가지런히 핀 수선화와 길가에 이제 막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한 벚꽃이 봄이 정취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감성을 파고드는 성의 외관을 천천히 바라봤다. 이곳에 와야 할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었다. 건물뒤로 걸어가니 잔잔한 호수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초록의 물결이 싱그러웠다. 세월을 엿볼 수 있는 성벽을 따라 걷다 보니 자그마한 출입문이 나왔다.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가 봤다. 커다란 오크통이 양쪽 벽면을 잔뜩 메우고 있었다. 보통 성안을 구경할  화려한 응접실이 먼저 나오기 마련인데 어두침침한 와인 저장고를 통해서 들어가는 것이 신선했다. 위로 올라가자 그제야 꽁꽁 감춰뒀던 화려한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왕의 침실, 욕실, 응접실을 시작으로 세미나룸, 드레스룸등 실생활 공간들을 볼 수 있었다. 그 시절 사용했던 가구와 소품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복도를 지나가며 우연히 바라본 창문 너머의 풍경에 발걸음이 멈췄다. 시선 둘 곳 많은 내부와 대비되는 온화한 경치가 일품이다.


다이닝룸에 들어서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내가 좋아하는 민트색으로 꾸며진 내부 공간은 가장 환한 햇살이 들어오는 곳이었다. 하얀 레이스의 커튼이 산뜻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테이블 위에 놓인 싱싱한 꽃바구니가 화사함을 더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곳에서 식사를 하면 안 먹어도 배부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간 곳은 서재였다. 벽면을 빼곡히 채운 책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풍요로워졌다. 어릴 적 꿈꾸었던 내 방의 모습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났다.  안락한 소파와 공간을 따스히 데워 줄 벽난로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만족스러운 투어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 해가 살며시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번엔 야외정원으로 향했다. 흙냄새 가득한 꽃밭은 봄맞이 준비로 한창이었다. 스프링클러가 빙글빙글 돌며 시원하게 뿜어내는 물줄기는 투명구슬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봄이구나! 알 수 없는 따스함이 온몸을 감쌌다.


어느새 사람들이 모여들어 돋아나는 새싹을 구경하며 햇빛을 쬐고 있었다. 사람들의 온기가 더해지니 볼 것 없는 정원이 밝고 활기찬 공간이 되었다.


이번엔 다듬어진 미로 정원에 들어가 봤다. 성공적으로 도착해서 전망대에 올라가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다. 사실 모두가 일행이 있는 가운데 혼자서 길을 찾는 것이 재미없었다. 슬쩍 둘러보고 빠져나왔다.


자연과 어우러지는 놀이터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득 집에 있는 가족들이 생각났다. 함께 왔더라면 더없이 좋았을 텐데... 좋은 것을 혼자 누리자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돌아갈 때가 되었는지 오늘따라 유독 가족들이 보고 싶다.


다시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으로 위안 삼으며 마지막 풍경을 눈에 담았다. 잔잔한 호수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백조가 눈부시게 예쁘구나... 이번 여행에서 원 없이 만나고 있는 백조친구다. 그러고 보니 정말 가는 곳마다 물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새하얀 백조가 자리하고 있었다.


평온한 백조와 성의 전경을 다시 한번 눈에 담으며 왔던 길을 되돌아서 나왔다.


"이건 가게 영수증이에요. 버스티켓을 보여주세요."


"네?"


다시 보니 내가 내민 건 버스티켓이 아닌 물건 구매 영수증이었다.


난감하다.


가방을 아무리 뒤져도 뭐가 나오지 않는다. 분명 출발할 때 왕복티켓을 끊었었다.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당황한 채 어쩔 줄 몰라하자 아저씨는 일단 버스에 타라고 하셨다.


항상 물건은 정해진 곳에 둔다. 급하게 서두르지도 성급하게 물건을 꺼내지도 않기에 오리무중인 티켓의 행방이 의아할 뿐이다. 카메라 역시 다니는 내내 손에 쥐거나 어깨에 메고 있었기 때문에 가방에 물건을 넣었다 빼면서 흘렸을 리 없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까지 열심히 좁은 가방 안을 뒤졌다. 가방 안에는 지갑, 입장권, 배터리, 수첩이 전부였다. 수첩! 혹시 몰라서 수첩 안을 뒤적거렸다.


하.... 요 녀석!


갈피 사이에 숨어 있던 티켓을 발견했다. 버스기사 아저씨께 정중히 사과하며 되찾은 티켓을 보여줬다. 휴... 혼이 쏙 빠졌네! 길고 긴 여행이 지속되자 나사가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다. 긴장의 끈을 열심히 조여대는 사이 다시 'Bearsted'역에 도착했다.


작고 아담한 기차역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하늘색 제복을 입은 역장아저씨 다가왔다.


"사진 찍어줄까요?"


"네? 아, 네~~!! 감사합니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역사(驛舍) 배경으로 마지막 기념사진을 남겼다. 나의 지금은 또다시 과거가 되어 사진 속에 저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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