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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계약직, 1년 후 퇴사하다

내게도 번아웃이 올 줄이야

by 별다기

퇴사를 고민할 때,

부모님은 만류했고 친구들은 옹호했다.


퇴사 후 이젠 조금 쉬고 싶다고 했을 때,

'뭐 한 10년 일한 사람처럼 그러니, 취업은 언제 하게'

라며 부모님은 나를 나무라셨고,

'그래, 푹 쉬고 맘껏 놀고 와'

하며 친구들은 나를 응원했다.


철없는 불효자식(?)이 된 것 같아 부모님께 죄송하지만

'퇴사'라는 내 선택에 한 치의 후회도 없다.

알만 한 사람들은 안다는 ‘번아웃’, 그 녀석이 나를 휩쓸고 갔기 때문이다.


작년 7월부터 파견 계약직으로 대기업에서 근무했고

(파견 회사에서의 헤드헌팅으로 취업, 자세한 건 나중에 추가 기록할 예정)

일한 지 6개월 만에 번아웃이 와서 퇴사할 뻔하였으나...

주변의 조언과 병원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버텨 1년을 채우고 퇴사했다.


지금이 퇴사한 지 딱 한 달 되었는데,

번아웃을 겪고 퇴사하게 된 과정을 기록해보고자 한다.




7월에 입사해 8,9월은 일을 열심히 배웠고 10월부터 본격적으로 실무에 투입됐다.

보통 큰 기업들은 연말에 행사가 있으며..

10월 말부터 아주 바빠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0월 말부터 12월 중순까지 정신없이 지나갔다.

한낱 계약직인 나조차도 밥 먹듯 야근을 했으니..

팀장님 부장님 과장님 할 것 없이 모두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렇게 2023년은 하얗게 불태우며 마무리했고

비교적 널널한 2024년의 새해가 되었다.

조직 개편이며 인사이동이며 부산스러웠지만 업무는 붕 떠서 비교적 한가했다.

하지만 나는 안정적인 신분이 아니었기에..

정규직으로의 이직 준비를 해야 하는데,

드디어 뭔가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는데..!

이럴 수가. 손 하나 까딱하기가 힘들었다.


모든 일상이 괴로웠다.

왕복 2시간 반의 출퇴근은 겨우 해냈으며

씻으러 가는 것, 하물며 밥 먹으려 숟가락을 드는 것조차 큰 결심이 필요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기력 그 자체였다.

귀찮아서, 의지가 박약해서, 노력을 안 해서가 아니고..

귀찮아할 힘도, 노력할 에너지도 없는 것...

부모님께 걱정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다.

집에서 이런 나의 상태를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니

스트레스는 쌓여만 갔고 한계에 도달했을 때,

가까운 친구들과 애인에게 고백했다.


'나, 번아웃이 온 것 같아...'

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뭐 얼마나 대단한 걸 했다고, 스스로 우습다고 생각했다.

다들 이렇게 사는데, 나만 왜 이렇게 나약한 걸까.

하지만 그 누구도 나를 비웃지 않았다.

오히려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며 많은 공감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그 슬픈 사실에 위로를 받았다.


이십춘기를 지나는 많은 이들이 번아웃을 겪는다.

특히 한국에서는 너무나도 흔한 증상일지도 모른다.

아마 부모님 세대에선 번아웃이라는 것을 자각할 겨를이 없으셨거나

그게 번아웃인지도 모르고 지나셨을 것 같다.

이런 나의 추측 때문에 부모님께 털어놓기 어려웠다.

때로는 친구들에게만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있으니까..


번아웃이 왔다는 것을 자각한 뒤로부터

남은 반년을 채우는 것을 목표로 출퇴근을 반복했다.

이렇게 힘들게 열심히 일했는데 1년도 못 채우면...

경력으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퇴직금도 못 받으니까.

그렇게 되면 최선을 다해 일한 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버틴 1년이었지만,

이 1년은 내 인생의 큰 획을 그은 아주 중요한 1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2년 같았던 1년, 길게 느껴졌던 짧은 시간이다.


그 1년이 나에겐 성장통이었는지,

스스로가 많이 성숙해졌다고 느낀다.

내가 그런 1년을 버티고 결국 해냈는데, 뭔들 못하겠어?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요즈음이다.


퇴사한 후 내 생활의 여유를 찾게 되니 번아웃 증상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번아웃 때문에 힘들었고 퇴사까지 하게 되었지만

열심히 살아내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언제든 겪게 될 수 있는 증상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번아웃이 또다시 나를 찾아온다면,

좀 더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길.

미래의 나에게 미리 응원과 위로를 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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