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철학자 강신주 박사가 방송에 출연해 말했다. 그는 "한 끼를 해치워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먹는 음식은 식사가 아니라 사료에 가깝습니다"라며 식사와 사료의 개념 차이를 설명했다.
- 이기주, <언어의 온도>中 p.185
예뻐가지고.... 왜 사료를 잘 안 먹는 거니.
욘석이 요즘 사료를 거부한다. 문득, 재재가 원하는 것은 이깟 사료가 아니라 한 끼의 다정한 식사인가, 하는 생각.
이 책에서 말하는 언어의 온도에 대해서는 별로 감흥이 없었지만 읽을 당시 이상하게 이 부분에서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 그동안 내가 사료를 처묵처묵 했구나 하는 생각. 해치워야 한다는 의무감은 나이가 들수록 더 심해진다. 20대 때에는 그냥 뭘 먹어도 상관없고 띄엄띄엄해도 혹은 심지어는 안 먹어도 괜찮았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수록 안 먹으면 어지럼증을 동반한 이상한 증상들이 몸 곳곳에 나타난다. 실제로 내 주위에도 이젠 안 먹으면 현기증이 온다는 말을 많이들 한다. 어린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은 대체로 서서 먹는다. 나도 그랬다. 서서 밥을 대충 퍼 먹거나 과자 부스러기들, 그냥 아이들이나 가족들이 먹다가 남긴 것을 끌어다 먹거나 것도 귀찮으면 밥 대신 수면이나 휴식을 달라고 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잘 먹는 것, 잘 자는 것, 게다가 좋은 음식뿐 아니라 영양제까지, 운동까지 해도 체력이 달리고 뭔가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로 접어들 때가 많다. 이제는 정말 한 끼를 해치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렇지만 삼시 세 끼를 먹고사는 문제는 늘 어렵다. 내 몸을 지탱해 주는 것의 대부분이 잘 정제된 한 끼 한 끼의 식사이겠지만 다른 정신적인 토대 이를테면 직업인으로서의 일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거나 육아나 집안일(육아나 집안일은 육체가 아니라 어느덧 정신이 해내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것도 아니면 성실한 글쓰기 노동자로써의 소임을 다 하다 보면 제대로 된 끼니를 먹을 수가 없다. 내 몸이 지금 당장 아작 나지 않는 한 나는 나를 제대로 보살피지 않는다.
조금씩 몸의 쇠락을 맞고 있는 모든 이에게 다정한 한 끼의 식사를 권하고 싶다. 지금, 어느 곳에서, 나처럼, 사료를 먹고 있는 이에게. 사료를 먹고 있으면서도 사료를 먹고 있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이에게 말이다.
이틀 전, 저녁식사.
매일 뭐 해 먹냐, 오늘은 뭐 먹니, 이러고 얘길 하다가 지인들끼리 서로의 식탁을 찍어 공유하는 지혜를 짜내기에 이르렀다. 이틀 전의 저녁은 부산 어묵탕, 두부구이, 진미채 무침, 미역줄기 볶음, 주꾸미 볶음, 양배추쌈. 소박하지만 나의 다정한 한 끼. 특히 요즘 양배추쌈에 부쩍 빠져있다. 품을 들여야 하는 일은 식사의 개념과 맞아떨어지는 일이다. 양배추쌈과 곁들일 쌈장을 만들어 보았다.
재래된장에 야채와 멸치, 다시마를 넣어 우린 육수(다른 요리를 할 때 끓이던 것을 몇 스푼 넣었다)를 넣고 마늘과 양파를 아주 작게 칼질하여 다져 넣는다(마늘이 씹힐 수 있게 으깨지 않는다). 쪽파를 쫑쫑 썰어 넉넉하게 넣고, 견과류를 으깨어 넣는다(보통 잣을 쓰는데 마침 집에 호두가 있어서 칼 뒷면으로 곱게 으깨어 넣었다). 고춧가루와 깨소금과 참기름으로 마무리하면 된다. 내가 만든 쌈장의 포인트는 육수와 다진 마늘과 견과류에 있다. 이 조합이면 과하게 짜지 않고도 달큰 짭조름한 쌈장이 된다.
가면 갈수록 먹는 일이 거룩하게 느껴진다. 이것을 해내고 사는 일도 말이다. 누군가를 위해 뜨거운 불 앞에서 무언가를 끓여내는 일, 말이다. 엄마는 평생 어떻게 밥을 하고 살았을까. 밥을 지으며 사는 일은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품을 많이 들이는 일이다. 밥을 하는 무수한 과정 속에서 나는 오랜 망설임과 지루함을 견뎌야 했으며 창의성과 꾸준함과 인내와 배려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무엇보다 힘든 일이라는 것을 살면서 깨달았다. 나는 밥을 지으면서 어른이 되었다. 물론 가족을 위해서도 하지만 그것은 나를 보살피는 일이었다. 매일매일 쌓이는 나의 식탁, 나는 저런 밥을 먹으며 저런 밥을 지으며 한 명의 구성원으로 어른으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