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닝닝하고 밍밍한 Apr 13. 2020

꽃그늘에서

- 지금은 조용히 걸을 일이다.

  코로나의 나날이 길어지고 있다. 

  국민행동 지침, 종교시설 지침, 직장인 행동지침, 사업주 행동지침 등을 발표하며 그에 따라 전 국민이 사회적 거리두기에 기꺼이 동참하고 있다.

  그중 수원시청에서 펼치는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은 무척 감각적이고 흥미롭다. 특히 가족 편을 보고는 배꼽을 잡았다. "네 목소리면 된다. 여기 올 생각은 말어. 손 잘 씻고, 집에 붙어 있어라. 나는 미스터 트롯 보면 된다" (https://blog.naver.com/suwonloves/221840605122)


그랬다. 부모님들은 미스터 트롯을 보며 사회적 거리두기에 성공하셨다. 본방, 재방, 삼방. 보고 또 보고 말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은 잠시 멈춤 캠페인, 집콕족, 기승전집, 홈카페 챌린지(남양), 우리 다음에 보자(Daum), 브랜드 로고 거리두기 참여 등 기발한 아이디어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과히 코로나 19 확산 방지를 위해 전우주가 참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가장 특별한 당신, 도 말이다.


  몇 주전부터 재택근무에 돌입한 남편은 한참이나 등한시했던 새우에 다시 애정을 쏟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엔 수영, 저녁엔 헬스의 시간을 보내던 남편은 이제 그것도 할 수 없으니 새우나 드럼 같은 취미생활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우리 집 거실은 운동기구로 넘쳐나지만 바깥에서 남들 시선 느껴가며 하는 운동과 집안에서 우리 셋이 오며 가며 쳐다보는 가운데 행해지는 근력운동은 썩 재미가 덜한 가보다. 그러더니 계속해서 어항들을 새롭게 사들이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새벽부터 며칠간 계속해서 새우 어항에 세팅해야 할 물품들이 쏟아지듯 배달됐다. 먼저 커다란 어항들이 속속들이 배달되고 어항에 깔 흙이라든가, 어항에 장식할 나무와 수초들, 히터, 물을 안정시켜주는 약품들, 갖가지 사료들, led 조명, 온도계, 여과장치 등등 내가 일일이 다 말할 수 없는 물품들이 우리 집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남편은 한 번 꽂히면 끝까지 가는 편이다. 캠핑을 좋아하는 남편이 화로를 보며 불멍을 때리듯이, 이번엔 어항을 들여다보며 물멍을 때리고 있다. 그러나... 한 오 년 전쯤이었나. 에프킬라 살포로 새우 400마리가량을 몰살시킨 장본인으로서 나는 아무 말 않기로 한다. 나는 분명히 실수라고 말했지만 남편은 며칠간 충격과 실의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유기농 시금치를 사서 삶은 뒤 새우의 간식으로 줬으며 새끼를 밴 새우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아이들의 이름은 체리 새우, CRS, 터키옥, 블랙 다이아, 갤럭시 피쉬본 등등이다.





  나는 나대로 많이 바빴다.

  공부도 해야 하고, 글도 써야 하고, 세끼 밥에 아이들 학습도 봐줘야 하고 재택근무를 하는 남편도 챙겨야 했다. 원래도 학원을 안 다니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지만 안 나가는 것과 나가지 말라고 해서 강제로 못 나가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새우 똥구멍이라도 들여다볼 기세로 우리는 이상한 것에 자꾸 꽂혔다. 다들 허기지듯이.

  코로나는 우리에게 따로 또 같이의 생활을 충만하게 부어 주었다. 갑자기 닥친 코로나로 인해 우리 가족은 내내 부둥켜안고 서로 뒹굴며 포개어 지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 방 저 방으로 몰려다니며 혹은 거실에 옹송그려 앉아 그동안 모른 척하던 서로의 진심들에 조금 더 가까이 갔다. 더 많이 놀고 싶은 마음, 지쳐서 더 많이 자고 싶었던 마음, 아무렇게나 드러눕고 싶었던 마음, 쌓아놓고 읽는 만화책 같은 기분, 아무렴 어때 하고 늘어지고 싶은 마음, 외로웠다는 듯이 영화 몇 편을 내리보는 마음 같이 모든 진부한 것들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우리는 이 시간을 보냈다. 아무리 봐도 해석이 되지 않는 뱃살의 나날들까지 말이다. 그동안 너무 바빴지. 그동안 너무 갈증 났지. 그동안 너무 기진맥진했지. 닥쳐온 일들을 속수무책으로 견뎠지 말이다. 우리는 휴식하는 일에 너무 인색했다. 잘하려고 애쓰는 모든 일들이 사실은 우리를 너무 갉아먹었다.

  



  콩나물 재배기와 노란 콩나물콩을 샀다. 아이들과 콩나물을 길러 먹으려고 말이다. 사서 먹는 게 편하지만 애써 그리해보았다. 콩을 불려뒀다가 받침대 위에 불린 콩을 올려두고 뚜껑을 닫아 놓았더니 안 본 사이에 쑤욱 쑤욱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콩나물 뿌리가 하얗고 꼬불하게 생겼다. 올챙이처럼. 이틀 정도 지나면 콩나물 국이나 무침이라도 먹을 수 있겠지 싶었다. 아이들이 하루 4-5번 물을 뿌려준다. 생명은 참 결사적이다. 뿌리와 줄기는 평생 서로를 못 알아보겠지만 말이다. 가습효과도 있다고 하니, 이미 어항에 치인 마음이지만 뭐 그런대로 기대해 본다.

  

  아이들과 달고나도 만들어 먹었다. 어찌나 모양이 예쁘게 나왔는지 흐뭇해서 먹지를 못한 건 아니고... 달다, 달다 하면서도 입에 달고 먹었던 거 같다. 설탕을 저렇게 잔뜩 뿌려놓으니 아무렇게나 달라붙지 않고 예쁘게 모양이 만들어졌다. 나는 달고나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사실 그렇게 많이 해보지도 않았고 그저 학교 앞에서 할아버지가 해 준 달고나를 돈 주고 몇 번 사서 먹은 게 다 였던 것 같다.  학교 앞이나 문구사 모퉁이에서 나무젓가락을 휘휘 저으며 만들었던 기억은 많지는 않다. 그렇지만 어쨌든 내 어린 시절의 기억 속 한 모퉁이에 사진을 찍듯 그 장면이 살아 있다. 아이들도 알까. 희한하게 이런 것들이 마음이 될 때가 있다. 마음에 내려앉는 것들은 사실 별 것 아닌 것들이다.


  어느 심심했던 날은 초코펜을 사서 식탁 의자에 넷이 둘러앉아 과자에 잔뜩 그리며 놀았다. 오랜만에 창의 미술활동이라 내가 더 신난 모양이다. 내 것이 제일 예뻐서 먹지 않고 싸놓았다.

  어렸을 때 많이 했던 부루마불의 세계는 이제 현실감 제로여서 그런지 별로 재미있지는 않았다. 의무감에 쫓겨 너무 많은 나라 많은 도시에 내 흔적을 남겼다. 돈은 홀라당 다 털리고. 그러나 내가 파리나 런던에 빌딩과 호텔을 지을 일도 없을 테고 게다 무슨 보드게임이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린담... 하며 하품을 계속했다. 순수한 마음으로 아이들과 시작했는데 아이들의 마음과 나 사이에 난데없는 시차가 생긴다.

  꽝 없는 판 게임은 아이들이 당첨 선물을 정했는데 자기들 위주다. 치킨, 게임, tv 시청 같은 거 말이다. 그게 뭐라고 빡빡하게 굴었는지. 옛다.


  코로나의 날들 동안 집에서 많은 것들을 해 먹었다.

  다 사진에 남기지 못했지만 말이다. 파스타, 새우 감바스, 잡채, 제육볶음, 순댓국, 짬뽕, 김치전, 닭죽, 무쌈말이, 무 유자 무침, 오리고기와 달래무침, 마약 계란, 호박전 등등.




  특히 중화면을 사서 짜장, 짬뽕, 우동을 만들어 먹었는데 갖가지 야채와 해물을 넣어 만들었더니 정말 먹음직스러웠다. 이런 면요리는 남편이 잘한다. 남편은 '오늘은 내가 요리사' 버전으로 아이들과 나에게 끊임없이 '맛있지?'를 연발했다.

  예전에는 먹을 생각을 안 했는데 꾸준히 먹게 되는 음식이 있다. 그중 하나가 순댓국이다. 차를 타고 가다가 순댓국집이 있으면 눈여겨보다가 한 번씩 들리게 된다. 순대만 먹으면 좀 텁텁하던 것이 따뜻한 국물과 같이 먹으면 속까지 뜨겁게 데워지는 그 맛 때문에 순댓국이 가끔 그리워진다. 요즘은 밖을 거의 나가지 않으니 게다가 외식도 거의 하지 않으니 순댓국 생각이 간절했다. 나는 또 집에서 아침부터 순댓국을 대차게 끓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떡볶이를 프라이팬 가득 빨갛게 끓여 먹었고, 부지런히 라면 7봉의 역사를 깨트렸으며, 닭다리와 원수질만큼 입에 기름칠을 하고 손에 비린내를 품고 다녔다.

  

  현실감각이 사라졌지만 다행이다. 우리는 한 이불속에서 꽃잎처럼 포개어 잠들고 과도하게 내추럴한 모습으로 처음처럼 사소해졌고 더불어 몸의 윤곽이 쓸데없이 둥글어졌다. 괜찮다. 모든 일에는 일종의 후유증이 생기는 법. 몸을 잃고 마음을 얻었으니 썩 괜찮은 거래다.




  오늘 오랜만에 아이들과 걸어서 장을 보러 갔다. 우리 동네의 산책로에는 지금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것도 모르고 집에만 줄기차게 붙어 있었다. 봄이 왔는데도 한껏 껴안지 못하고 지금은 없는 계절 인양 그렇게 보냈다. 벚꽃 아래를 걸어 장을 보러 가는데 문득 꽃그늘 아래 우리의 그림자에는 마스크도, 근심도, 불안도 보이지 않았다. 꽃그늘 아래 모든 게 멈춰있다. 어느 시에서처럼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하며 내리는 꽃잎. 꽃이 피면 꽃그늘이 있기 마련이다. 지금은 그늘 아래 조용히 걸을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마스크 쓴 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