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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닝닝하고 밍밍한 Oct 06. 2020

폐간 즈음하여

ㅡ 어쨌든 문학잡지 하나가 사라졌다.


  [출처: 중앙일보]  사적 질문에 술자리 강요?…'위계 권력' 논란에 '시인동네' 폐간키로

  (https://news.joins.com/article/23833538)


   2020년 9월호를 끝으로 <시인동네>가 폐간된다는 기사를 접했다.  <시인동네>에 대한 최초 고발자는 이유운 시인이었다. 이 시인은 과거 <시인동네> 신인문학상에 투고한 뒤 고영 발행인 겸 시인으로부터 부적절한 내용의 전화를 받았다고 폭로했다.



   고 시인이 전화를 걸어 나이와 대학, 사는 곳, 좋아하는 시인 등을 물어보며  "목소리가 어리다. (좋아하는) 시인도 내가 키운 것이다. 등단하면 내 제자가 되는 것이다. 잘 키워 주겠다"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이 시인은 "집요할 정도로 사적인 질문을 과도하게 받았다"라고 말했다(일요신문 참조).


  시인동네의 홈페이지에 가 보면 '당신도 모르는 당신의 배후가 되겠습니다'라는 문구를 걸고 있다. 시 문예지가 점점 늙어간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시인동네는 다른 시 문예지에 비해 젊고 활기차고 패기 가득한 시들이 꽤 많았고 젊은 시인들의 감성이 담긴 시와 에세이, 그리고 중견 시인들의 대담 등 읽을거리도 제법 풍성했다. 그런 시인동네가 정말로 누군가의 배후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힘들었다.


  최근 문인들 사이에서 문단 내 위력에 의한 강요 및 성희롱, 성폭력에 대한 폭로가 잇따라 터지고 있다. 내가 참 좋아했던 김경주 시인이 3년 전 발표한 세월호 추모전시 비평문이 사실은 후배 무명작가가 원작자라는 사실을 뒤늦게 고백한 것이라든가(후배 작가는 김경주라는 스승의 대필 제안에 거절하기 힘들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최영미 시인이 고은 시인과 관련하여  '괴물'이라는 시를 발표하여 문단 내 성폭력과 남성 중심 권력문제를 폭로한 일이라든가 말이다. 이 뿐이겠나 문인의 윤리를 저버린 이들이 말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어릴 적 나의 글 읽기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신경숙의 표절 사건은(실수가 아니라 대놓고 저질렀던) 또 어떤가 말이다.


  다시 시인동네로 돌아가서, 고영 시인은 그동안 행해왔던 시인동네 신인문학상 '본선 진출자와 사전 통화'에 대해서는 본인의 판단과 방식이었다고 말하면서 이것은 본인 확인이나 표절 여부, 타 매체의 등단 여부 등의 결격 사유를 확인하기 위한 업무였고, 그 과정에서 간단한 신상 정보를 물었다고 설명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푸는 이유는 꽤 오래전 나도 같은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유운 작가의 폭로를 보며 너무 놀랐다. 시인동네에 시를 접수하고 난 뒤 이유운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시인동네 편집장인데 본인에 대해 알고 있냐고 먼저 물어왔다. 잘은 모르지만 홈페이지나 검색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을 몇 가지 말씀드렸다. 그러고 나서는 내 시가 비유가 참신하고 좋다고 했다. 오래 시를 쓴 것 같은데 나이는 얼마이고 어디에 사는지 어느 학교 무슨 과를 나왔는지에 대해 물었다. 마찬가지로 목소리와 이름과 나이의 상관관계를 캐듯 나에게도 어려 보인다는 식으로 질문을 했다. 시의 발상도 좋고 표현도 좋다고 했다. 내 시에 대해 몇 가지 부분에 대해서 물어보기도 했다. 너무 얼떨결에 받은 전화라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정확하게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질문은 또렷이 기억이 난다. 그리고 신인문학상을 보낼 때의 형식에 대해 이것저것을 설명해주고 제목은 어디에 써야 하며 페이지는 어떻게 구성하는지에 대해 쭉 설명을 하며 그 부분을 다시 고쳐서 재응모를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 좋은 결과가 있지 않겠냐는 식의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모르는 것이나 궁금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연락을 하면 도움을 주겠다는 식의 말을 하며 전화통화를 마무리했던 걸로 기억이 된다(그래서 내 전화기에는 그의 전화번호와 카톡과 문자가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물론 안타깝게도 그 찬스를 아직 단 한 번도 쓰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 전화를 받은 후 오래 생각했다. 내내 생각했다. 나는 시를 접수하고 최종심에 몇 차례 들었을 때도 단 한 번의 전화도 받지 못했다. 그저 당선한 이의 기사를 통해, 그 심사평에 본심에서 논의되었던 이름 중에 내 이름이 올라온 것을 봤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는지를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 시인의 이런 태도들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나의 시에 대한 호감과 그가 느꼈던 미숙한 원고 처리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었겠지만, 문학상의 최종 결정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결과의 성패를 쥐고 있는 편집위원이, 문학상에 투고한 등단을 앞둔 어떤 이와 어떤 식으로든 연락 내지 본인의 사적인 감상을 포함한 교류를 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고영 시인에게 내 입장을 밝힌 문자를 보냈고 나는 재응모도 하지 않았다. 그건 내 방식이 아니었다. 형편성에 맞지 않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장렬하게 떨어졌지만.



  그 후에 나도 모르게 쭉 시인동네를 지켜보았다. 홈페이지에도 간혹 들락거리며 그들이 쏟아내는 글을 읽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번 사태를 맞으며 고영 발행인은 이것 또한 자신의 방식이라며, 독단적인 입장문 게재와 폐간 소식을 알렸다. 이에 일방적으로 통보받을 수밖에 없었던 시인동네의 편집위원들과 수많은 문인들, 그리고 독자들에게 잡지의 폐간은 책임의 한 방법일 수는 있으나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입장들도 있다. 이미 발행된 문예지는 한 개인의 것이 아니기에 발행인의 잘못과 논란으로 그 존폐를 단번에 결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의견이다. 끝까지 잡지를 지켜내지 못한 것에 대해 편집위원들이 사과를 했다. 어쨌든 문학잡지 하나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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