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는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고, 평소 이것저것 따지고 재고 선을 보고 선을 긋고 했던 P의 모습 때문에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평범한 남자를 택했다는 사실과 그 남자 때문에 지방으로 근무처를 옮기기까지 한다는 얘길 듣고 사실 크게 놀랐다. 뒤늦게 남편과는 도서관에서 어쩌다 만났다는 얘기를 듣고 P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 원래 P는 그런 애였지. 이제야 P 답다고 나는 속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아주 오랜 예전에 우리가 하나의 무리를 이루며 지냈던 그런 시간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래 그런 시절이 있었지.
L과 C, J와 P 그리고 나, 우리 다섯은 조금 특별한 조합이었다.
대학 내내 붙어 다니며 일종의 세를 형성할 만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더욱 독립적이고 강하고 매력적이고 특별했다. 아무도 끼어들지 못할 만큼.
그렇지만 우리가 우리라고 부르는 이 다섯 명 간에도 적절한 위계와 선과 취향과 이기심과 시기, 질투 그리고 어른스러움을 흉내 내는 무심함이 있었다.
L은 처음부터 우리보다 8살이 많았고, C는 개인적이었으며, J는 왜 시니컬했는지, 그리고 P는 너무 착해 빠졌고, 나는 너무 혼자였다.
C와 P는 조금 더 친했고, J와 나도 조금 더 특별했다. 그렇지만 C와 J는 조금 닮았고, P와 나도 조금 닮아 있었다. P는 C를 위해 많이 헌신했고, J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나 때문에 불편해했고, J와 L은 그런 의미에서 허물없이 친하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우리의 관계는 다시 조율됐다.
C는 독자 노선을 걸었고, 특별한 일이 아니면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러리라고 예견된 것처럼 C는 자연스레 멀어졌고 한 번도 서로 그것에 대해 서운함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남은 우리는 그것을 이기심이라고 생각했고 C는 말 그대로 그녀의 삶을 누구보다 빛나게 살았다. 처음부터 온전히 까다로운 아이였고 그래서 우리와는 조금은 다른 아이였으니까.
L은 늦은 나이에 축복 속에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오면서 동시에 이혼을 했다. 왜 그랬어야 했는지, 물을 수 없었다. 나는 그게 어른스러운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말해볼걸.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보고 함께 울어 주고 그럴걸. 어른스러움을 흉내 낸 이후에는 정말로 더 이상 다가가는 일이 힘들어졌다. 그 후에도 그녀는 조금은 특별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얘길 들었다. 나는 L에 대해 손톱만큼도 몰랐던 것이다. 그게 참 이상하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는데도 그 사람의 일생을 조금도 가늠할 수 없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이상하다. 시간의 세례를 받은 모든 것들이 생각보다 그리 견고하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관계도 마찬가지겠지.
P와 J 그리고 나는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는데 착해 빠졌던 P는 우리 중에 제일 영악한 아이가 되었다. 공무원이 되더니 제대로 앞길을 사는 아이가 되었고, J와 나는 이제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은 편한 사이가 되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무심했고 쓸데없이 다정한 척을 하는 사람은 못 됐다. 예나 지금이나. 내가 나를 설명하는 일이 그때도 지금도 어렵다고 하면 뭐라고 말할까. 나를 아는 사람들 중에 많은 이들이 내가 평범한 주부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의외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정한다. 나도 내가 뜻밖의 사람이 되어 순하게 이 길에 서 있다고 말한다. 물론 내가 무엇인가 큰 성과를 거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거나 뭔가 조금은 특별한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겠지만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이제야 조금 평안을 찾았다. 그들에게 이런 나를 설명하기는 여전히 힘들지만.
뭐 어쨌든 다들 어떤 식으로든 변한다. 변했고, 앞으로도 변할 것이다. 스물 언저리에 있던 우리는 온갖 계획들을 동경했었다. 소설을 쓰고, 시를 읽고, 여러 가지 글을 쓰고, 앞 일을 계획하고, 누군가를 앞지르고, 연애를 하고... 그랬었다.
지금은 우리 모두 생활의 안정을 전시하는 삶을 살고 있다.
잘 나가는 남편과 자신의 커리어, 아이들의 조기 교육, 아파트와 개인적인 취미와 여행의 모든 것들이 디오라마처럼 재현되어 있다.
그렇기에 C와 더 이상 친해질 수 없고, 건너건너 듣는 이야기처럼 각자의 삶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L의 사연을 알지 못해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P의 세상살이가 영악해 보여도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도 하고, J는 내가 말하기 전에 섣불리 나에 대해 묻지 않고 궁금해하지 않는다.
내가 맺어온 인간관계든, 내가 벌인 일이든, 사랑이든 간에 나는 이런 변화들이 가끔은 고맙다.
여전히 몹쓸 동경 속에 웅크리고 있지 않고,
그때 그 시절 우리가 알지 못했던 다른 삶에 골몰해 있는 것, 이것이야 말로 바람직한 현실이지 싶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