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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닝닝하고 밍밍한 Mar 01. 2022

나는 왜 시를 쓰는가

  나에게 시는 어떤 의미와 어떤 무게를 가지고 있을까, 오래 생각했다.

  나는 왜 시를 쓰는가.

  시가 좋아서 쓴다, 라는 지극히 나이브한 대답 말고. 그게 시를 쓰게 했던 처음 마음은 아니었다.

  시는 아름답고도 경계심이 많은 장르다. 상처와 불안과 콤플렉스를 어쩌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나와 닮아 있었다.

  

  다시, 나는 왜 시를 쓰는가, 에 대해 몇 가지 답을 시인들에게서 찾았다.

  김이듬 시인은 김도언과의 인터뷰에서 상처를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실 시를 왜 쓰는지 생각해보면, 궁금한 게 많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왜 엄마는 나를 버렸으며, 아버지는 왜 그랬나.

  그러면서 인간이 대체 뭔지를 알고 싶었던 거죠.

  그리고 그것은 결국 인간과 사랑이라는 주제와 연결되는 것이었어요.

  거기에서 파생되는 문제들을 이해하고 싶고 용서하고 싶은 거죠.

  용서의 문제와 창조의 문제거든요.

  내가 감히 다다르고 싶은 보편성은 말하자면 질문을 하고, 이해를 하고, 용서를 하는 거예요.

 - 김도언 인터뷰집, <세속 도시의 시인들> p. 248


  

  결국 상처다. 모든 의문은 상처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시가 의뭉스러운 삶에 위로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슬픔에 최적화된 사람이 시인이다. 감히 용서와 창조를 접붙이는 시인에게 나 또한 위로를 받았다. 슬픈 사람이 최후에 다다르고 싶어 하는 곳은 결국 용서라는, 가장 무르고도 겸연쩍은 이상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시인.

  심보선 시인의 <형>이라는 시를 읽을 때마다 어떻게 이렇게 슬픈 시를 쓸 수 있을까 생각했다.




  두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며 쓰는 게 시니까 말야"

   - 심보선, <오늘은 잘 모르겠어> 중 <형> p.70



  읽을 때마다 애틋해지는 시, 시를 쓰는 이유를 어렴풋하게 깨닫게 만들었던 시다.

  슬픔을 목도한 사람이 시를 쓴다. 자명한 사실이다.

  두번째로 슬픈 사람은 그래서 크게 울지 못한다.

  더 슬픈 사람 때문에.

  

  두번째로 슬픈 사람은 첫번째로 슬픈 사람을 결코 넘어설 수 없다. 그래서 공허하다.

  같은 내상을 가졌지만 첫번째로 슬픈 사람은 슬픔 그 자체를, 두번째로 슬픈 사람은 가공된 슬픔을 앓는다.

  그렇기 때문에 두번째로 슬픈 사람은 슬픔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

  슬픔의 밖에서 슬픔을 끊임없이 목도하는 사람, 슬픔의 곁을 지키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무너지는 사람 옆에서 오래도록 미안해하는 사람, 나는 첫번째로 슬픈 사람과 끝끝내 슬픔을 겨룰 수 없다. 그래서 시를 쓰는 거겠지.

  

  슬픔을 번역하면 시가 되겠지,

  슬픔을 오역해도 시가 되겠지.

  슬픔은 왜 이렇게 완강한 건지, 오래 뒤돌아보게 만든다.

  슬픔에도 계급이 있다면 나는 늘 둘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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