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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닝닝하고 밍밍한 Oct 18. 2019

아무 죄책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 고통(가족)은 통찰의 형제였고, 시의 길잡이였다.

  누군가에게 미안해지는 일이 자주 생기다 보면 어느 때부터는 그 사람이 싫어져 피하게 되더군요.
  참 미안한 일이지만, 사람은 미안할수록 멀어집니다.
 
- 이만근, <계절성 남자> p.149


  책을 읽다가 문득 나에게도 이런 관계들이 있지, 하고 떠올려 본다. 


  어디로부터 고통은 우리에게 다가왔는가?
  어디로부터 그것은 왔는가?
  고통은, 까마득히 먼 옛날로부터
  통찰의 형제였고,
  시의 길잡이였다.

- 시인 나지크 알 말라이카 (존 버거,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중 p.122)


 가족은 늘 내 삶의 화두이고, 모든 인과관계를 떠나 미안함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들이고 그리하여 함께여도 다분히 멀어져 있는 것이 내게는 가족이다. 고통을 알게 했던 것도 가족이었으며 나에게 지금 쓰는 이런 글 따위들을 끊임없이 긁적이게 했던 것도 본의 아니게 가족의 힘이었다. '고통은 통찰의 형제였고, 시의 길잡이'라는 말에 격렬히 공감을 하면서 저 '고통'의 자리에 '가족'을 넣어도 똑같은 값이 성립하겠구나, 했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라고 말했던 황인숙 시인의 말처럼 가족도 침울하며 소중하다. 소중하며 동시에 침울하다.


  시를 열심히 쓰던 동기들은 모두 어머니가 아팠다. 암부터 관절염까지, 최근에 흰머리가 늘었다는 것도 쉽게 병으로 바뀌었다. 한 날 술자리에서  
  가장 아픈 엄마를 가진 동기가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우리는 은연중에 동의했다. 우리는 좋은 시를 쓰고 싶었다. 서로가 서로의 불행을 부러워하면서, 읽고, 찢고, 마셨다.

 ....

  우리는 서로가 모르는 부분만 걸러 듣고, 더 새로운 것을 알고 있어야 좋은 시를 쓴다고 생각했다. 덜 아픈 엄마를 더 아프게 생각하면서 우리는 모두 절실해졌다.
  때문에 더 새롭지 않으면 덜 새로운 시를 쓰고 있다고 믿었다. 자신이 덜 새로워질까 봐, 말을 아끼는 동기들이 늘어났다.

- 박성준, 「몰아 쓴 일기」 중 <대학 문학상> p.175-176


  나도 어느 순간 가족을 팔아 시를 쓰고, 나의 마음과 근황에 대한 글을 여과 없이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어느 순간은 내 슬픔을 과장할 때도 있었고, 슬픔을 슬픔으로 즐기기도 했고, 권태로운 모든 관계로부터 그저 떠나 있고 싶을 때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썼다. 슬픔의 집합체가 나였고, 그런 내가 가족 사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껴있기도 했고, 가족들은 나노 단위로 아프고, 누추하고, 가난하기도 했고, 목소리조차 불편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썼다. 아무 죄책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슬픔을 목도한 것도 나이고 그것이 자양분이 되어 나 이만큼 자랐다고 생각한 것도 나이고, 그래서 이렇게 쓰고 있는 나도 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나도 나이다. 


  언젠가 내가 쓴 글에 이런 문구를 넣은 적이 있다. '나를 이해시키기 위해 굳이 나의 과거에 누군가를 탑승시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나의 모습만으로도 나는 당신에게 충분히 매력적이어야 한다'라고 말이다(고백하자면 1, https://brunch.co.kr/@21-prospect/30). 그 말, 맞다. 그렇지만 또 반만 맞다. 살아있다는 것의 증명은 결국 자신이 깨달은 슬픔이라는 오랜 병마와 끊임없이 싸우는 일이고, 그것을 해체하고 해석하는 일이다. 그래야 나를 이해하고, 나를 이해시킨다. 좀 더 모진 경험으로 자신만의 서사를 갖고 싶어 했던 나의 친구는 그래서 내가 부러웠을 것이다. 내가 가진 부재와 가난을, 나의 얼룩진 정체성을 말이다.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이해한다. 우리는 모두 새로워지고 싶기 때문이다. 덜 새로워질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책 세 권을 번갈아 가며 읽다가 오늘의 더 새로워진 나를 만날 수 있을까, 문득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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