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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수 Oct 19. 2023

철조망 단상


  철조망, 긍정의 의미보다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는 명사다. 아파트를 걸어 나와 큰길을 건너면 숲으로 다닐 수 있는 산책로가 있다. 걷다 보면 까치와 참새들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다람쥐와 청설모는 높은 나뭇가지 사이를 곡예하듯 분주하게 오르내린다. 가끔 푸드덕 거리는 꿩의 날갯짓도 들린다. 비교적 낮은 산에다 조금 벗어나면 생활공간으로 연결된다. 이런 곳에 빠지지 않고 세워지는 게 있으니 단독주택이다. 빨간색 벽돌로 지은 2층이 고급스럽게 보인다. 집 뒤쪽으로는 키 큰 침엽수들이 숲과 어우러져 자연스레 병풍을 두른 듯하다. 여기서 끝이 되면 좋으련만 담벼락 위에 철조망이 띠를 띠우고 있다. 왜 철조망을 올려놓을까? 어떤 집은 불안한 나머지 깨진 유리 조각까지 잘 쌓은 담장 위에 날카롭게 장식하기도 한다. 그런 집을 보면 무슨 숨겨야 하는 보물이라도 있는지 궁금하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서 있는 CCTV가 위에서 두리번 거린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위화감(違和感)이다. 사전적 의미는 ‘조화되지 아니하는 어설픈 느낌’이라고 했다. 예문을 소개하면 ‘심각한 빈부의 차이는 계층 간에 위화감을 준다’고 했다. 몇 해 전 서울 둘레길 157km 한 바퀴를 걸어서 돌아본 일이 있다. 8구간으로 나누어진 코스를 9일간 걷는다. 평창동을 지날 때다. 길 위에 걸어 다니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었다. 담너머로 아름드리 소나무가 정원사에 손에 깔끔하게 다듬어진 모습으로 자리 잡고 서있다. 정원은 꽤나 넓게 보인다. 여러 해 전 아내가 평창동에 사는 친척집을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아들 친구들이 미니 야구를 할 정도로 공간이 넓다고 했다. 어디로 들어가서 어느 곳으로 나왔는지 모르겠다는 표현이 얼마나 넓을까 상상을 해본다. 그런 경제적인 여유가 행복이라는 가치와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각 자에게 주어진 몫을 누리며 사는 삶의 자리에서 꿈을 잃지 않고 매일 최선을 다하는 게 행복이 아닐까.


  군대가 있는 곳에는 녹슨 철조망이 있다. 설치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다. 비를 맞으며 녹이 슬었다. 녹슨 철조망은 부대 전체를 두른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 철조망은 외부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이다. 말하자면 인적 자원이나 물적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해야 하는 필요한 자구책이라 할 수 있다. 날이 어두워진 밤에는 후방에서도 예외 없이 곳곳에 위치한 초소에서 정해진 시간에 따라 불침번을 서야 한다. 자정 전후의 순서가 가장 힘든 시간이다. 자칫 졸다가 순찰하는 일직사관에 지적당하면 벌을 받기도 한다. 어느 날 새벽이 다가오는 시간에 보초를 서게 되었을 때 하순으로 접어든 달이 구름으로 가리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여인의 길게 땋아 늘어뜨린 머리 결이 구름 속으로 흩어지려 하네’ 라며 읊조렸던 추억이 뇌의 다락방 속에 남아있다. 철조망의 낭만에 대한 들은 얘기다. 매일 같은 시간에 보초를 서는 잘 생긴 청년이 출근하는 바깥의 아가씨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이 부대는 고급 지휘관을 교육시키는 기관이다. 근무하는 사병들 대부분은 대학을 휴학하고 입대한 우수한 학생들이다. 아가씨도 부대 가까운 곳에 살고 있으니 들어서 아는 부분도 있었으리라. 처음에는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어쩌다 초소에 혼자 있을 때면 스쳐 지나가는 아가씨에게 말로 인사를 건넬 수도 있게 되었다. 2년여의 진지한 교제는 마침내 결실을 맺었으니 철조망이 연결고리가 된 셈이다. 전역의 선물로 고향을 향해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들으면서도 미소를 짓게 한다.  


  그럼에도 철조망을 바라보는 감정은 무겁기만 하다. 시인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푸른 철조망>이라는 제목의 시의 내용이다.


  “방어진에서 감포 쪽으로 가는 길 나는 차창 밖으로 바다를 본다 바다와 나 사이에는 

녹슨 철조망이 줄곧 함께 달려가고 그리고 한 병정이 마치 정지된 시곗바늘처럼 

제 자리에 서 있다 어느 산 구비길을 돌아서니 웬 덩굴풀이 기어올라 십리길 철조망을 

파랗게 덮었다 나는 탄성을 지른다 얼마나 보기 흉했으면 풀조차 저렇게 애썼을까 “ 


  김포 쪽에서 서울로 오는 강변로 도로로 자동차를 운전하다 보면 한강 하류까지 이어지는 녹슨 철조망을 볼 수 있다. 물론 국가 안보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듯하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보기에도 좋지 않으니 철거하면 어떻겠나 하는 여론은 계속 진행형이다. 위에서 소개한 시

인의 시집 제목인 「철조망 조국」의 시에서 “산이란 산도 꼭대기엔 모두 군대가 들어서고 바다란 바다도 알짜배기 바다는 온통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으니 참담한 마음이 되어 혼자 터벅터벅 걷노라면....”다음 페이지에는 시 ‘고철 장수’가 있다. 동구권 어느 나라에선가 국경지역에 설치되었던 “이제 그대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철조망을 모조리 걷어다가 고철로 팔아넘기는 일을 도맡은 한 고철장수가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일부를 고철로 처리할지라도 남을 과제가 있다. 휴전선 155마일(249.448km)의 아픔이다. 이민족의 비극은 지구 위에 나라들 중 유일한 고통이다. 작은 땅 한반도에서 따지고 보면 한 뿌리인데 강대국의 하수인 된 듯 전혀 남남처럼 긴장하며 힘을 낭비하고 있으니 너무 야속하다. 나는 기회가 있어도 백두산 관광을 포기했다. 남의 나라로 돌아서 가는 게 싫어서이다. 동서를 가르는 철조망이 걷히고 언젠가 열릴 육로로 당당히 가기 위함이다. 어느 철학자의 얘기가 생각난다. ‘완장’ 때문에 통일이 안 된다고. 1980년대 발표된 윤흥길의 장편 「완장」은 보잘것없는 저수지 감시원의 완장을 찬 주인공이 달라진 걷는 모습에서 보이지 않는 권력의 속성을 그려내고 있다. 통일이 그래서 어려운지 모르겠다. 이 큰 숙제를 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이 엄청난 일을 하기 전에 할 일이 있다. 내 속에 숨겨진 얽히고설킨 가시덤불을 제거해야겠다는 말이다. 내 속에 녹슨  철조망이 자리를 잡고 있어 다른 이들과의 소통을 차단시키는 행동을 하는 것은 없는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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