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년 전의 일기장에서)
잠을 설치고 금식 2일째 희미한 새벽이 열린다. 차가운 이불을 벗기고 더듬더듬 물이 나오는 바위틈으로 가서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하니 정신이 번쩍 든다. 컵으로 물을 받아 약간의 소금을 입에 넣고 물을 마시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왔다. 방이라고 하기엔 아직 이르다. 그냥 흙바닥 위에 비닐을 깔고 그 위에 요를 펼치고 이불을 덮었으니 찬 공기가 온몸을 감싼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태복음 8장 20절)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생각난다. 이 교훈의 배경은 "한 서기관이 예수께 나아와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의 내용이었다. 이 내용을 읽으면 나는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있음이 감사할 따름이다.
바이블을 펼쳤다.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기록을 보면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갔다. "40주 40 야를 산에 머물며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더니."(구약성경 신명기 9장 9절)라는 기록이 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곳으로 전헤지는 시내산은 해발 2,285m다. 나무가 거의 없는 바위산이다. 거기에는 마실 물이 없고 먹을거리가 있을 수 없다. 혼자서 외롭게 하늘만 쳐다보는 곳이다. 나는 비할 수 없을 만큼 좋은 여건이 아닌가?
방학을 맞이하는 초등학생의 심정으로 이곳에서의 생활시간표를 그려 본다.
05:00 - 05:10 얼굴 씻기
05:00 - 06:10 명상의 시간
06:10 - 07:10 걸으며 산책하며
07:10 - 08:00 쉼
08:00 - 12:00 성경 읽으며 돌아보기
12;00 - 13:00 오후 걷는 시간
13:00 - 17:00 성경 읽고 명상하기
17:00 - 22:00 침묵의 시간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일찍 해가 기울어지면 깜깜한 어둠이다.
햇볕을 기대하고 밖으로 나갔다. 흐린 날씨에 가끔 하얀 눈 꽃도 하나 둘 춤을 추며 흐느적거린다. 배가 고파도 낮에는 절대 눕지 않기로 다짐을 한다. 산 아래 마을에는 아침밥을 짓는 연기가 집집마다 피어오른다. 문득 어머니처럼 다정했던 교우 한 분이 눈앞을 스친다. 스물여섯 나이에 시골 교회 담임 전도사로 임명되어 근무할 때의 추억이다. 며칠 출장을 갔다 오는 날이었다. 꽤 큰 암탉에 인삼을 넣고 삶아 뼈를 다 제거한 삼계탕을 갖고 오셨다. "전도사님, 피곤하실 텐데 드시고 힘내세요." 하는 게 아닌가? 갑자기 옛 일이 떠 오른다. 직접 닭을 잡아 검정 가마솥에 물을 붓고 아궁이에 불을 때서 끓였을 과장을 생각한다. 초가지붕에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마소 짓는 얼굴로 그림 되어 다가오는 느낌이다. 물만 조금씩 마실 계획이라서 떠오른 기억일까.
지난 주간에 이곳에 왔던 분이 오후에 하산을 했다. 그 방으로 옮겨 앉게 됐다. 저녁때가 되니 심부름하는 청년이 아궁이에 불을 피운다. 오늘 밤은 추위는 잊을 것 같아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