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아니라 여행이라 생각하면 된다.
기차를 타는 일이 일상이 될 것 같은 상황이 다가오니
새삼 기차와 얽힌 에피소드가 솔솔 기억이 난다.
무언가 작은 것이 계기가 되고 불씨가 되고 고리가 되어서 모든 일이 발생하게 되는 법이다.
고등학교 경주 수학여행 때 기차를 질리게 타기는 했다만(기차에서도 멀미가 나더라. 기름 냄새가 많이 났다. 그 시절의 기차에서는)
온갖 종류의 먹거리를 경험하다가(친구집들마다 김밥 모양이나 맛이 다 달랐다. 마치 김밥 경연대회날이었던 듯. 김밥이 아닌 볶은 김치 도시락을 싸온 친구 것이 제일 맛났던 것은 무슨 일일까?)
무한 수다를 떨다가 자다가 했던 기억만 난다.
그게 그 시대 고등학생으로서 할수 있던
최고의 재미였다.
대학에 합격한 후 처음으로 나는 혼자서
부산 고모네집으로 기차 여행을 가게 된다.
자축의 의미이자 부모님의 커다란 결단이었다.
기차만 타면 부산역까지는 가는 것이고
고모가 마중 나오는 일정이었으니
사실 진정한 의미의 혼여는 아니었고
고모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온 위로 여행이었던 셈이다.
기차를 탔는데 운좋게 주변 자리가 텅 비어있었다.
잘되었다 싶어서 창가에 노트를 꺼내서
기차 감성에 젖어서 글을 쓰고 있었는데
(그때도 글쓰기를 좋아라했었다.)
아마도 수원역쯤에서 대학생들로 보이는 남학생 여러명이 탔고(부산으로 놀러가는 듯 했다. 방학이었으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부산은 여행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하필 내 자리 주변을 뺑 둘러 그들의 좌석이었다.
처음에는 자꾸 이것저것 물어보던데
나의 반응이 별로이니 자기들끼리 먹고 떠들고 난리이다.(술 냄새가 고약했다. 그 시대는 그랬다. 기차통로에서 비틀대고 화장실에서 오바이트하는게 낭만이라고 잘못 생각했었다. 나는 그때도 질색을 했었다만.)
불편함이 몰려왔다.
하필 안쪽 좌석이어서 화장실 한번 가려면 양해를 구해야하는 그 좌석에 갇혀서
나는 부산까지 꼬박 잘 수도 먹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는 고문의 시간을 보냈고
줄기차게 창밖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는 기차나 비행기에서 복도쪽 좌석을 절대적으로 선호하게 되었다.
화장실을 편하게 다녀올 수 있다는 매리트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나에게는.
대학때 약간 썸을 타던 남사친과 신촌역에서 즉흥적으로 교외선 기차를 탔던 기억이 있는데
(아마 내 생일 기념으로 만났던 것 같다.)
어디가겠다고 정하지 않고 한 시간이 지나면
그때 멈추는 역에 내리자 했었건만
(이게 낭만적일수도 있는데 비계획적일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다.)
하필 내렸던 역이 논과 밭과 묘지만 있는
작은 간이역이었다.
세상에나 찻집하나 없었다.
돌아오는 기차가 오는 한 시간 정도 이야기만 하다가
아무런 변화가 없이 돌아왔는데 아마도 추워서 였을 것이다.
11월 첫추위가 매서웠다.
춥지 않았다면 주변을 돌아다녔을 것이고 무슨 일이 일어났었을 지도
그렇다면 내 인생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추운 것이 제일 싫다.
그리고 그 남사친과는 계속 남사친으로 지냈고
그날 이후 센 감기에 며칠간 시달렸다.
대학 수학여행 때 목포까지 밤기차를 타고 가서
(내 생애 최초이자 마지막 밤기차였을 것이다.)
제주행 여객선을 타기도 했고
그때 대전역에서 우동을 먹고 오겠다고 용감한 시도를 한 친구들 두 명은 기차를 놓쳤고
(다음 기차로 무사히 오기는 왔다만)
대학 졸업여행도 부산과 동해안 일대로 기차를 타고 갔었고
(그때는 아마도 다양한 게임을 하고 시끄럽게 놀았던 것 같다. 그 시대는 그게 낭만이었고 허용되는 분위기였다.)
기차는 그후로도 나와 그리 가깝지는 않은 교통수단이었다.
아마도 지방 출장 등의 목적으로의 탑승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내 머릿속으로의 기차 여행은 최고의 낭만 스타일이다.
오늘은 일때문에 기차를 타지만
그리고 주말에도 타야하지만
마음만은 낭만 혼자 여행이라 생각하련다.
물론 좌석은 복도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