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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정쩡한 일들

똑부러지는 일처리가 내 트레이드 마크였는데.

by 태생적 오지라퍼

이사한지 딱 2주가 지났다.

아직은 적응이 된 듯 안 된 듯 어정쩡한 상태와 일들이 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마음은 바쁘기만 하다.

연말이라 더더욱 그런 듯도 하다.

이곳이 서울 번화가가 아니라 사실 연말 분위기를 내는 장식들은 보기 힘든데도 말이다.


우려했던 고양이 설이는 이사 후 며칠간은

내 침대 내 발아래에서만 자고 나만 졸졸 쫓아다녔으나

이제는 새 집의 공간 파악이 끝났는지 거실 자기 5층 캣 타워에서 주로 잔다.

물론 아직 1층에서 자는 것이 신기하기는 하다만.

로봇 청소기도 첫 번째 사용할 때는 이리저리 맵핑을 하면서 달라진 공간을 돌아다니느라

부산하고 힘들어 보이고 중문이 없어서 높이차가 있는 현관앞에 고꾸라져 박혀있더니

역시 AI 기능 탑재라 똘똘하여 두 번째부터는 거침이 없다.


다른 사람들 때문에 발생하는 어정쩡함도 있다.

이사온 집 싱크대 하나 문닫는 자석이 이삿짐을 싸다가 튕겨나가서 완전치 않아

수리비를 주인에게 맡기고 왔는데 가타부타 말이 없고(해달라는 것은 미친듯이 톡을 보내더라만)

부여땅 등기이전에 포함된 일들이 시간이 걸릴 거라고 했는데 이후 연락이 없고(농사용 토지가 포함되면 이전 과정이 쉽지 않은 모양이다.)

12월말까지 연구하나를 마무리해야는데 야심찬 웹개발 담당자의 일처리가 지지부진하다.(천재과들이 대체로 발동이 늦게 걸린다. 자신의 역량을 믿어 의심치 않아서 그렇다.)

며칠전부터는 싱크대 수도에서 슬며시 물이 내려온다.

조임새가 느슨해져인듯 한데 또 주인에게 연락을 해야하나 생각중인데 아직은 어정쩡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문제는 나와 남편이다.

나는 아직 거실등 버튼을 어찌 눌러야 꺼지는지 완전 파악이 덜 되었고(어떤때는 꺼지고 어떤 때는 안꺼진다.)

중요하게 모셔둔 팬티는 결국 아직도 못찾아서

할 수없이 대형 마트에서 5개를 배송시켰으며

자동차 앞 연락처 표시 사인 마지막 숫자가 달아났는데 그거 만드는 키트도 분명 어디서 보았는데 못찾았고

아직 우편함을 못봐서 무언가 연말정산등을 앞두고 보내진 우편물들이 있을 법도 한데

(우편물 주소 이전은 싹 다해두었다.)

매번 지하주차장에서 집으로 올라오기 바쁘다.

우편함은 1일 1산책 나가는 남편에게 미션을 부여해야겠다만

오늘, 내일 서울에서 연말 모임이 있단다.

세상에나 이번 주 월요일에 항암 주사를 맞은 사람 맞나 모르겠다.

말려도 갈 것이 분명하니 애써 말리지 않으련다.


남편의 어정쩡한 일들은 비단 이사에서 촉발된 것이 아니고

평생을 집안일과는 담쌓고 살았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 말해 뭐하겠나.

전기를 아낀다고 전원 스위치는 보는대로 다 내리고

휴지도 아낀다고 조금 떼어서는 사용하고 곳곳에 구겨서 숨겨놓는다.

내가 질색을 하면 다음에 또 쓰려고 저장해둔 것이라 하는데

그게 절약이냐 집안을 개똥으로 만드는 것이지

쓰레기 집이 그런 마인드에서 출발한다.(차마 말은 못했다만.)

나 없을 때 귤이나 바나나를 까먹고도 그 껍질을

그 자리에 그대로 둔다.

음식물 쓰레기를 어디에 모으는지 분명 알려줬다만 아마 쫄쫄 따라다니는 비서 한 명이 있는듯한 마인드이다.

내가 담임이었던 반의 학생이 남편처럼 행동한다면

나는 참지 않고 조목조목 지도했을 것이다만

분명 모범학생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생각이나 행동은 영 모범스럽지 않다. 문제아 스타일이다.


어제는 어정쩡하게 힘든 날이었나보다.

초저녁에는 잠이 마구 마구 몰려왔는데

12시경에 깨어서는 너무 말똥말똥했다.

보통 중간에 깨더라도 2~3시 경이었는데 말이다.

아주 힘들면 푹 자고 어정쩡하게 힘들면 어제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더라.

일어난 김에 30일과 내년 1월 6일 기차표를 결제하고

(예매는 먼저 받고 결제는 오늘부터 하는 신기한 시스템이다. 코레일의 세계는 심오하다.)

그리고는 억지로 다시 잠을 청했는데

꿈속에서 아들이 가장 오래 사귀었던 그 여자 친구와 이쁘고 다정한 모습으로 나타났었다.

꿈속에서였지만 꿈이라는 것을 분명 인지했지만 좋았다.

어정쩡하기만 한 연말.

다음 주는 푹 쉬면서 성적처리를 하고 아직 남아있는 어정쩡함들을 모두 처리하는 한 주가 되었으면 좋겠다.

중요한 것은 오늘, 내일 강의가 남아있다는

그 어정쩡함이다.

두 시에서 네 시의 그 두 시간을 위해서 달려보자.

그나저나 똑부러지는 일처리가 나의 트레이드마크였는데 이제는 그게 무엇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새벽녘 여전히 나의 안부를 체크하느라

내 침대 머리 위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고양이 설이를 무한 애정한다.

설이에 대한 나의 사랑은 절대 어정쩡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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