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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적 노안

선물인듯 선물이 아닌

by 태생적 오지라퍼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안경을 썼으니 내 일생에

시력이 좋았던 적은 얼마되지 않았던 셈이다.

그 뒤로도 쭈욱 시력은 점점 내리막 급강하 곡선을 탔고

그 주된 이유는 책을 눈에 바짝대고 급하게 읽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때 당시 유명한 전집이 한쪽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친구 집에서 주로 독서가 이루어졌으니 말이다.

짧은 시간에 읽어야 할 책은 많았다.

그렇게 좋아하던 책읽기가 이제는

두통을 불러일으키고

더 이상은 즐겁지만은 않은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물론 노안이다.

지금까지 나는 돋보기나 다중렌즈를 사용하지 않고

안경을 벗고 읽거나 컴퓨터 작업을 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고

그 방법이 마냥 편하지만도 않으며

그러다보니 자꾸 어깨와 등이 굽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등을 빳빳하게 세우는 것은 어려서부터도

내가 잘 못하던 것 중 하나이다.

그때는 등을 빳빳하게 세우고 다니는 것이

가슴을 너무 드러내는 것 같아서 피하고만 싶었었다.

모든 일에는 말이 안되는 경우도 있다만 원인이 있다.


그런데 노안이 되면서 엄청 잘 보이는 것들이 있으니

먼지, 고양이 설이 털 그리고 물이 만드는 흔적이다.

왜 그런지 도대체 어떤 기작인지는 알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다.

3년전부터 그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설거지나 욕실 청소를 하고나면 깨끗이 지워지지 않은 물때가 자꾸 눈에 보이고

거실을 돌아다니는 설이 털과 그와 콜라보레이션을 하는 먼지 더미들이 자꾸 눈에 확대되어 보인다.

물론 학교나 집에서 내가 청소에 진심인 적은 많았다만

그 열의와 증세가 점점 심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자꾸 청소기를 돌리고 바닥을 닦고 있고 개수대를 닦고 세면대와 변기를 닦아댄다.

누가보면 청소업체에 취직하려고 열심히 기량을 닦는 사람인 줄 알거다.


오래된 아파트로 이사를 오니 물때가 특히 더 눈에 띈다.

오히려 거실 바닥은 색이 진한 것으로 바뀌어서인지 먼지와 물의 흔적이 그렇게 확연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다행이다.

지난 집 거실 바닥은 정말 물 한방울 떨어트리면

그 주위가 다 물의 흔적으로 더러워졌었다.

손가락이 부자연스러운 남편이 반찬이나 국을 흘리면 그 주위는 초토화되어서

쪼그리고 앉아서 물휴지로 닦고 마른 휴지로 다시 닦아내는 이중 수고를 치러야했다.

힘든데 너무 잘 보여서 안할 수가 없었다.


얼마 전부터 SNS에서 물 때 흔적 제거 약품을 검색하다가 드디어 하나 구입했다.

어느 것이 정말 좋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번 시도나 해보려고 말이다.

그리고는 오늘 퇴근 후 김치찌개로 이른 저녁을 먹고

몸은 천근만근 무거운데도

화장실 하나와 싱크대 물때 처리에 나섰다.

와우.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나 당장은 효과가 보인다.

반짝거린다. 기분이 날아갈 듯 하다.

선택적 노안이 가져다 준 내 생활의 변화이다.

그런데 매일 이렇게 닦을 체력은 없다.

차라리 책이나 글씨가 잘 보이는 것이 나을뻔 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거라면 말이다.

왜 그렇게 먼지나 더러운 것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냐. 괴롭다.

선물인 듯 선물이 아닌 선택적 노안이 불러온 내 일상의 변화이다.


(오늘 대문 사진은 옆자리 이쁘고 싹싹한 교수님이 주신 종강기념 선물이다. 짧은 편지까지 써주었다. 센스작렬이다. 퇴근 길 기력 보충으로 운전하다가 1/3씩 나눠먹으련다. 엄청 달달구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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