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생적 오지라퍼 Oct 27. 2024

늙은 과학 교사의 수업 이야기 88

재미와 의미, 두 마리 토끼 모두 잡기

3학년은 한 주 일 뒤 기말고사를 보고 성적에 들어가는 수업 과정을 마무리한다.

우리학교는 1월 말에 방학을 하게 되므로 무 2달 이상의  긴 시간이 남아있게 되는 셈이다.

이 소중한 시간에 각각 다른 목적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에게

어떤 의미있는 수업을 해줄 것인가가 요즈음 나의 최대 고민이다.

재미와 의미 두마리 토끼를 를 모두 잡아야 한다.


나의 공문을 꼼꼼이 살펴보는 장기를 발휘해보기로 한다.

경험에 따르면 다양한 단체와 기관에서 학교에 많은 기회를 부여하거나 예산을 주겠다는 공문들은

매년 1~2월에 가장 많이 도착한다.

그럴 수 밖에 없다.

학교를 제외한 다른 단체나 기관들은 모두 새로운 예산 년도의 시작과 한 해의 시작은 1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때 학교는 겨울방학 중이다.

교사들이 학기 중에서처럼 매일 매일 공문을 확인하지는 않는다. 방학중에는...

미루어왔던 여행을 가기도 하고 체력도 보충하는 쉼이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새 학년도에 내가 맡아야 할 업무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도 하다.

이것은 각 단체와 기관에서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공문이 잘 전달도 되지 않고

적절한 신청 등의 후속 조처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별다른 일이 없으면 방학때도 틈틈이 공문을 살펴보았었고

좋은 기회가 있으면 재빨리 우선 신청을 하고 보는 성향이니 선착순이면 당연히 성공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해서 올해 모기업의 디스커버리랩도, 예술체험활동도 갈 수 있었다.(물론 무료이다.)


또 한번 신청 공문이 몰려오는 시기가 있는데 그때가 10월이다.

11월은 옛날부터 멀쩡한 아스팔트를 깨고 길을 새로 만든다는 전설의 시기이다. (설마 요새도 그런것은 아니겠지요?)

이유는 있다. 각 단체별로 1년에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이 있는데

10월쯤 되면 얼마가 남고 모자라고의 구체적인 윤곽이 잡히게 되는 것이다.

예산을 남기면 내년도 예산 반영에 좋지않게 작용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10월쯤에 급하게 새로운 사업을 공모하여 예산을 모두 소진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10월의 일들은 대부분 공기업 한 곳과 소규모 단체 한 곳이 함께 그 일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소규모 단체들도 내년에 지속적인 예산을 받으려면 실적이 있어야 하니 말이다.


얼마전 공문을 살펴보고 중3의 긴 기간을 위해서 새로운 활동 한가지를 신청했었다.

A 라는 공기업과 B 라는 NGO 단체가 같이 계획한 사업이다.

조건이 있었지만 혹시 하는 마음으로 신청을 했고

다음 날 재빨리 해주겠다고 연락이 왔는데

3학년 3학급에다 다른 학년 하나의 학급을 더 추가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사실 그러기는 싫었는데(한 학급만 활동을 하면 진도 등 어려운 점이 발생한다.) 왜 그러는지는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예산을 딱 맞추어 소진하려면 4학급이 되어야 하는 것일게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고가고 시간표 등을 살펴본 후 2학년 1반을 추가해서 진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며칠 전 A  공기업 담당자에게 다른 번호로 연락이 왔다.

지금까지 나와 소통한 사람은 B 라는 NGO 단체 소속이었나보다.

둘 사이의 의견 교환이 없었는지 다짜고짜 하루에 3반 진행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3학년 3반의 수업이 모두 월요일에 들었는데 2반밖에 안된다 하면

어느 한 반은 그 활동을 하지 못하는 불평등이 생기게 되고

그것은 나의 교사로서의 양심에 걸리는 일이 된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 내용을 이야기하는 언어와 태도가 너무도 불손했다.

갑질의 느낌이 훅 들어왔다.

간혹 예산이 많지 않은 학교에 행사 지원을 하면서 갑질하는 곳들이 있다.

그 행사를 학교가 해주어야 그 기관의 실적이 되는데 말이다.

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 이야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학교에 이런 민폐를 끼쳐도 되는 것인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렇다면 나는 이 활동을 안하겠다고 다소 퉁명하게 이야기하고 전화를 끝냈다.


수업을 하고 나와보니 나와 소통하던 B 단체 담당자의 하소연 톡이 여러 건 올라와 있었다.

아마 강사 섭외 등의 실질적인 일은 B 단체가 하는 것이고 A 기관은 예산만 지원하는 것일게다.

그곳에다가도 갑질을 해댔겠지만 그래도 을이 될 수 밖에 없는 B 단체는

일정 등을 모두 학교에 맞추어 줄 수 있다면서 생각을 다시해달라고 간곡하게 이야기하였다.

어찌할까 하다가

B 단체 담당자의 안타까움이 느껴졌고

우리 학생들에게 좋은 기회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활동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제 강사님들과 멋진 커리큘럼만 진행되면 된다.

물론 내가 강사님에게 받아야 할 서류만 다섯 가지가 넘고

내부 결재를 두 번 이상 맡아야 하고

학생들에게 이 수업활동의 목적과 취지에 대한 안내도 해야 하고

내가 하는 수업보다 더 바른 태도를 주지시켜야 하는 어려움은 오롯이 나의 몫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과정에서 NGO 단체도 그곳에서 애쓰는 강사님들도 발전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공기업에 계신 분들이여...

예산을 지원해준다고 갑질하지는 맙시다.

그게 본인 돈이 아닙니다. 우리가 낸 세금입니다.

오늘은 간만에 무거운 이야기를 최대한 가볍게 써보았다.

이렇게 공을 들이는 활동이 재미도 있고 의미도 찾을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서울 골목 투어 스물 다섯번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