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과학 교사의 수업 이야기 96
첫눈이 불러온 나비효과
첫눈이 흠뻑 내리는 날의 학교는 축제날이 된다.
눈발이 조금만 내려도 난리가 날텐데 오늘은 거의 하루 종일 눈이 내렸다.
우리는 출근길을 걱정하고, 미끄러짐을 걱정하고, 날이 추워져서 도로가 얻어불을까를 걱정하느라 그리 기쁘지만은 않은 아침인데
(그래도 출근길에 흑백사진 하나는 건졌다)
아이들은 아침 등굣길부터 신이 나서 콧노래를 불러댄다.
오늘 아침 눈은 습한 눈이라 잘 뭉쳐지지도 않아보이는데
애써 눈을 뭉쳐서 덩이로 만들어서 서로의 볼에 대고 후드티 모자에 넣고 낄낄대고 있다.
그리고는 옷이 젖었다고 벗고는 반팔 차림으로 공부를 하니 감기에 걸릴까 걱정이다.
3층 과학실 창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낭만적이고 평화로운 눈 내리는 날 오전이지만
저 눈 때문에 고생하는 많은 분들이 있을 것이다.
교사 첫 해 첫눈이 내리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마지막 시간이었던 것 같다. 흐릿흐릿하더니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한 학급에 거의 50명 이상이던 그 시기에
아이들이 한꺼번에 입을 모아 밖에 나가서 눈싸움을 하자고 보채기 시작했다.
아마 아이들도 내가 초임교사라는 것을 그래서 자기들의 요구에 못이길 것을 알았던 것 같다.
(아이들의 눈치가 빤하다. 될만한 투정만 부린다.)
세상 물정을 모르던 초임교사 나는 결국 아이들의 등쌀에 못이겨서 운동장으로 나갔고
한 시간이 끝날 때 즈음에는 내가 더 신이 나서 눈싸움을 즐겼던 것 같다.
그리고는 그 당시의 체육부장님께 불려가서 한참을 혼났다.
운동장은 체육 교과 수업 장소이다.
사전에 약속되지 않은 수업 장소 방문은 체육 수업에 방해가 될 수 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마라는 요지의 꾸중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운동장에서 과하게 눈싸움을 하다가 학생들이 다칠까봐 걱정되서였던 마음이었을게다.
오늘 그런 일이 벌어졌다.
수업 시간에 운동장에 나가서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했나본데
두 학생이 서로 미끄러지면서 부딪혔던 모양이다.
그냥 살짝은 아닌 정도인 듯 하고 두 학생은 집에 연락하고 병원으로 갔다하는데
퇴근할때까지 심하다는 연락이 안온 것으로 보아 그만그만 한 것 같다. 다행이다.
아마 그때 나에게 한마디 하신 체육부장님은 지금 나의 연배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도 오늘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나가서 눈사람 만드는 것은 조금 우려된다는 의사를 표한 것을 보면 말이다.
눈사람만 만들겠다고 굳게 굳게 약속하고 나가기는 하나 막상 운동장에 나가게 되면 눈싸움과 술래잡기로 백퍼 이어지게 된다.
안그러면 10대가 아니다.
아이들과 눈싸움을 하기에는 나는 너무 늙었고 잘못하면 아이들이 다치게 되고 그러면 교사가 너무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팩트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오늘 운동장에 절대 아이들을 내보내지 않았다.
눈싸움과 눈사람 만들기가 기억나는 것은 유명산 자연휴양림에 놀러간 날 뿐이다.
그날 마침 눈이 펑펑 와서 눈을 실컷 맞아보았고
큰 나무에 쌓인 눈털기를 즐겼고
돌아오는 길에는 질척거리는 길 위로 차량을 밀고 올라가야했었다.
친한 선생님들 가족들과의 모임이었는데
아쉽게도 그날 함께한 그 동료교사들 중 지금까지 연락이 되는 사람은 단 한명뿐이다.
첫 눈은 이렇게 과거를 돌이켜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누구와 함께였던 첫눈은 꼭 있는 법이다.
첫눈이 오는 날 만나자는 그런 막연한 약속은 이제는 아무도 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점심시간은 눈싸움과 눈사람 만들기 배틀 시간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학교에는 던지기 능력이 최상인 야구부 친구들이 있다는 점이다.
눈을 너무도 딱딱하게 뭉치게 되면 눈싸움이 아니라 돌싸움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야구부 친구가 던진 큰 눈덩이에 맞게 되면 멍이 들을 수도 있다.
매일 시끄럽던 강당이 조용한 반면 생전 놀지 않던 운동장이 만원 사례였다.
언제 그렇게 놀아보겠나.
오늘정도로 많은 눈이 내리는 날도 흔하지 않으니 그 나이에는 즐기는게 맞다.
나이가 들어보니 낭만적으로 내리는 눈은 실내에서 우아하게 구경하는게 제일 좋더라.
맛있는 차나 다과와 함께라면 금상첨화이고 말이다.
기후변화, 온실가스, 산성비 이런 것들과 이어서 산성눈이라는 이슈가 될 수도 있으니 더더욱 눈을 먹는 것은 안된다. 깨끗해보이지만 아니다.
일부 예능 프로그램에서 눈을 먹는 장면이 가끔 나오던데 그것은 정말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
아이들에게 이 내용은 주의를 주었다. 과학교사의 오지랍인데 잘 알아들었지 싶다.
점심시간을 격렬하게 보낸 학생들은 들어와서는 새침하게 실뜨개 놀이를 하고 놀았다.
오랜만에 보는 실뜨개가 갑자기 왜 등장한 것인지 그 맥락을 알 수는 없으나
볼은 붉게 상기되어 있고
머리는 축축하게 젖은 채로
실뜨개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니
지금이 2025년을 향해 가고 있는 시점인지 잠시 잊어버릴 정도였다.
나도 오랫만에 실뜨개를 같이 해볼까 하는 느낌도 잠시 들었다.(피곤한 엄마에게 같이 하자고 졸라댔던 실뜨개 놀이가 떠오른다.)
그리고는 언제 눈싸움을 했나싶게 전류계와 전압계 연결 및 꼬마전구와 멜로디폰 연결 실험을 열심히 수행하였다.
금요일 수행평가를 앞두고 있으니 말이다.
학교를 온통 하얗게 만든 첫 눈이다.
비록 내일은 모두 녹아서 질척거릴 수도 있고
그것이 운동화 바닥을 더럽힐 확률은 매우 높고
미끌 미끌하고 축축한 길거리를 만들고
마지막 낙엽들을 모두 쓸어갈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오늘의 첫 눈을 충분히 자신의 방식대로 즐겼다.
나는 나이에 어울리게 눈구경과 눈에 얽힌 기억 돌아보기였다.
저녁은 제주도 돌문어와 딱새우가 조금 들어간(냄새가 솔솔 난다만 실체는 없다) 컵라면을 긴 파김치를 얹어서 먹었다.
오늘의 날씨와 딱이었다.
몸이 노곤하고 정신이 몽롱한 효과로 지하철역 하나를 더 간 것은
그래서 다시 돌아오느라 15분 정도가 더 걸린 것은 첫눈 때문은 아니라고 해두자.
그것까지 첫눈 핑계를 대는 것은 조금 거시기하다.
(오늘은 두번째 눈이 여전히 내리고 있다.
이제 아이들은 별 관심이 없어진 눈치이다.
첫번째가 그런거다. 그만의 메리트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