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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지않는 혼밥 요리사의 비밀레시피 129

전우들과의 만찬

by 태생적 오지라퍼

어제는 오전에 생각지도 못한 격분의 시간을 보내고

오후에는 녹색기후상 수상을 위한 ZOOM 회의에 참석했다가

미래학교때 동료들과의 저녁 약속에 다녀온 매우 바쁜 날이다.

오전의 격분 상황에 대해서는 어제 이미 글을 썼고

저녁에 만난 교육청 높은 분(?)들에게도 흉을 봐두었으나 전달이 될까 모르겠다.

의견이 전달되기까지도 쉽지 않지만

변화가 일어나기란 더더욱 쉽지 않다.


격분을 했더니 배가 고파와서

정월대보름 나물은 대형 마트에서 종류별로 조금씩 되어 있는 것을 하나 샀고

(어제, 오늘 모두 나의 스케쥴은 꽉찼고

아들 녀석은 휴가를 쓰고 놀라간다고 하니 굳이 어렵게 내가 나물을 할 필요가 없다.

사는 것이 가격대비, 일 효율 대비 남는 장사이다.)

짜투리 남아 있던 잔반 모두 넣고 자작하게 된장찌개 끓이고

남은 고기 털어서 대파, 양파 함께 제육 볶아서 점심은 혼밥했다.

저녁은 양식이 예정되어 있으니

한끼는 밥을 든든히 먹어두는 것이 필요하다.

아들 녀석은 이 메뉴로 저녁을 먹으면 되게 준비해두었다.

역시 화를 냈더니 에너지 소모가 많아져서인지 밥맛이 좋았다.


기분좋은 수상을 위한 ZOOM 회의에서 느낀 점은 오전에 심포지움에서의 감정과 비슷했다.

10여명의 회의 참석자가 있고(다들 바쁜 사람들이다.)

행사를 안내하는 담당자의 자세한 설명이 있었는데

잘 듣지 않고 뻔한 것을 자꾸 질문한다던지(잘 좀 듣자. 수업이건 회의 안내건...)

본인 소속 기관의 특수한 상황인데 자꾸 일반화하여 질문한다던지(회의 후 개인적으로 질문하거나 메일 보내면 되는데)

이런 사람들 때문에 또 슬몃 화가 올라오는거다.

그리고 확인했다.

일을 잘 못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회의에서 자꾸 돋보이고 싶어서 쓸데없는 말을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런 사람들은 본인이 일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더 심한 것은 본인이 일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행사 자료에 실을 공적 요약문이나 만들어야겠다.


저녁은 나의 교사 생활 황금기였던 <대한민국 1호 미래학교> 근무 동료들과의 약속이다.

다른 바쁜 사람들이 나의 퇴직 기념을 위하여 시간을 냈다는 것만으로도

오전과 점심의 분노를 잊게 했고

그들과 함께였던 정동길을 오랜만에 천천이 걷는 그 순간이 찬란했다.

그 익숙했던 길에 곰탕집이 하나 새로 생겼고

불맛 오징어볶음집은 세상에나 대기 줄이 있었고

내가 그렇게 싫어했던 샐러드집은 파냐냐로 주 메뉴로 바뀌어 있었고

방학중이라 그리고 퇴근 시간 이후라 텅빈 학교 운동장은 여전했으며

우리가 열심히 의논해서 만들었던 학교 정문 지킴이실 건물의 부분 조명만 불이 들어와있었다.

그 곳에서의 5년은 정말 열정의 시간이었고

운동장 초입에 서니 그 때가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지친 하루라기 보다는 보람찬 하루가 더 많았던

그 시절을 함께 한 동료들과는 전우 느낌이 있다.

군대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그 시절 종종갔었던 추억의 회식 장소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고

그때의 이야기를 하고 당면한 어려움에 공감하고 맛난 것들을 나누어먹었다.

그 맛집의 모든 메뉴를 하나씩 다 시킨 듯

그 식당의 피자, 스파게티, 샐러드의 종류가

그리 많은지 처음 알았다.

그리고 와인 조금이 그 음식들과 그렇게 자연스럽게 어울린다는 것도 말이다.

와인의 세계에 입술만 담가볼까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은 처음이다.

그만큼 음식들과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이 소중한 시간이 나에게는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시간으로 남을 것이다.

누가 뭐래도 우리가 함께 했던 그리고 만들어나갔던 그 일들은 보람찬 일이었고

한때는 싫어하는 단어였지만 지나고 보니

우리가 쇄빙선의 역할을 했던 것도 맞았다.

아직도 학교에 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 같지는 않아보이니 말이다.(그래서 안타깝다.)

이쁜 꽃들과 맞춤형 케잌과 선물까지 두 손 가득 받아오면서 어젯밤 나는 로또 당첨자가 부럽지 않았다.

<마지막 출근길에 울지 않고 잘 마무리하셨던건(눈물을 훔치기는 몇 번 했었다.)

그만큼, 후회하지 않을만큼, 열심히 달려오신 시간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빛날 선생님의 내일을 응원합니다.>

고맙고 감사하고 이제는 후배들의 나를 뛰어넘는 발전을 기대한다.

그들이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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