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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내리는 아침

비에 폭싹 젖었수다.

by 태생적 오지라퍼

비 내리는 날을 좋아라하지 않는다.

비 내리는 날 창이 큰 카페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게 멋있다던 나와 생일도 똑같은 친구는

그래서 나랑 앞날을 도모할 수 없었나보다.

나는 그 창이 큰 카페에 갈 때까지의 축축함과 서늘함이 싫다.

예나 지금이나 비가 내리는 아침에는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진다. 그 좋아하는 출근마저도...

오늘 비 때문에 마지막 학교 야구부 시합은 다음주로 순연되었다.

응원한번 가주겠다 약속해서 오늘 그 일을 실현할까 했었는데 다음 주로 그 약속을 순연한다.

중요한 하남에서의 약속도 비 때문은 아니지만 연기되었다.

오늘은 이래 저래 할 일이 있었는데 없어진 날이 되었다. 다행이다.


쏟아지는 비를 대차게 맞은 기억이 있다.

한번은 대학교 3학년 제주 수학 여행길이었다.

한라산 등반을 계획한 날이었는데 출발할때는 다소 흐리기만 했다.

지구과학 전공이었으나 그때는 일기예보밖에는 기상 현상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 때이고

원래 높은 산 주변의 기상 현상은 변화가 심하다는 것을 알지도 못했을 시기였다.

한 시간 쯤 올라갔을 때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다. 다들 산행이 처음이고 신발도 등산화가 아닌 친구들도 있었고 그 전날 잠도 노느라고 푹잠을 자지도 않았었다.)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때 포기했어야했는데 어렵게 처음 도전하는

한라산 등반인데 포기하기가 싫었던 것 같다.

아니다. 30여명 중 누군가 먼저 포기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 힘들었을 수 있다.

그러다가 삼십분 쯤 더 지나고서는 거의 폭우 수준으로 세기가 변했다.

이미 우리는 생쥐꼴이 되었다.

할 수 있는 비가 아니었다.


그런데 참 생각의 변화가 묘하더라.

처음 조금씩 비를 맞을때는 그 비가 그렇게 거슬리고 싫더니

아예 쏟아부을 정도가 되니까 어쩔수 없다고 받아들여진 것인지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게 되고

앞도 안 보이는 한라산 등반에만 온 정신이 집중되어서(미끄러져서 다칠까봐)

빗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순간을 맛보게 되었다.

어찌저찌 피난할 수 있는 곳까지 간신히 올라가서는(아마도 라면을 먹었었나 싶다.)

전체 의견 조율을 통해서 더 이상의 등반은 위험하다고 결론 내리고 하산길에 나섰다.

하산길도 물론 폭우와 함께였다.

사람이 비에 폭싹 젖으면 어떻게 되는지

끝판왕을 본 날이다.

그렇게 비에 젖은 우리를 태워주신 제주대학교 스쿨버스 기사님께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 이후 나는 한번도 한라산 등반을 시도한 적이 없다.

처음이자 마지막의 강렬한 도전이었다.

아직도 많은 양의 비가 내리면 그날의 생쥐꼴이 기억나는 것을 보면 거의 트라우마 수준이다.


중학교 3학년때인가 나는 기말고사 한문 시험을

크게 망친 적이 있다.

부수를 쓰라는 서술형 문제인데

나는 몽땅 획수를 썼던 것 같다.

아니면 그 반대였을지도 모른다. 눈에 뭐가 쓰였던게다.

여하튼 그 문제가 다섯 문항 정도 되었고

한문은 항상 100점이었던 내 기록에 오점을 찍었고

그러니 전과목 평균을 내는 전교 등수에서 처음 보는 등수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성적표를 받게 되었다.

엄마에게 혼 날 일보다 나의 자존심이 더 아팠다.

그때는 전교 등수를 출입구 앞에 커다랗게 붙여두는 시대였다.

거의 매달 모의고사를 보고(고등학교 입시 시험을 볼때였으니)

일주일쯤 뒤에는 시험 성적을 대자보로 붙여놓았던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시대였다.


그 기말고사 성적표를 받는 날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꾸질꾸질한 내 마음을 아는 듯 그렇게 비가 왔는데

하필이면 집에 돌아오는 길에 오래된 우산살이 쑥 빠지고 망가졌다.

다른 날이었다면 친구와 함께 우산을 쓰거나 망가진 우산을 어찌저찌 쓰고 왔을텐데

그날은 그럴 마음이 안들었다.

세상 처량한 마음이 되어서

무슨 비련의 영화 주인공이라도 된 양

제법 세게 내리는 그 비를 쫄딱 맞으면서

버스 세 정거장 거리를 걸어서 집에 돌아왔다.

아마도 분함에 눈물 흘린 것을 빗물인양 감추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가방 속까지 빗물이 들어와서 물에 젖은 성적표를 말리면서

다음 시험을 가열차게 준비해보자고 굳은 다짐을 했었다.

폭싹 비를 맞고 들어온 나를 보고 엄마가 생각보다

덜 혼낸 것은 다행이었지만 말이다.

그 때 이후로 한문 시험 100점을 놓쳐본 적은 없다고 기억되지만

지금 한문을 써보라면 내 이름이나 쓸까 딱히 자신은 없다.

그래도 과학 용어중 한자가 많아서

한문을 조금이나마 아는것이 이해를 돕기는 했다.

한문을 안배운 지금 아이들이 과학 용어를 어려워하는것에 대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부슬 부슬 내리는 비와 함께 시작하는

아무것도 예정된 일이 없어진 오늘이다.

딱히 할 일은 없어도 하루는 어찌저찌 지나가더라.

기운이 안 나고 마음이 울적해져서 그렇지.

오늘은 거실 큰 창으로

내리는 비와 우산쓰고 바삐 걷는 사람들 구경이나 해야겠다.

내 앞에 발라당 누워있는 고양이 설이와 함께 텅빈 놀이터도 쳐다보면서.

나랑 생일이 같은 친구의 편지속에 등장한

그때 그 문구처럼 우아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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