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삭되어지는 시간이 좋다.
오랜만에 퇴직전 나의 마지막 학교를 방문했다.
3학년 야구부 아그들에게 우승 기념 햄버거 세트를 쏜다는 약속을 지키는 날이다.
그 이전에 오랜만에 보는데 늙어보이기는 싫어서 염색도 했다.(할 시기가 되긴 했다만)
내 기억과는 달리 수업은 3시 45분에 끝났고(조금 당황했다. 55분에 끝났었는데)
햄버거는 이미 배달완료했다고 연락이 왔다.
운동장으로 들어서니 수업을 마치고 창문에 있던 녀석들이 이름을 불러주며 환영을 해준다.
누군지 멀고 시력이 나빠서 보이지는 않지만 교실 배치도로 볼 때 3학년임에 틀림없다.
나는 현재 1,2학년은 수업을 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3학년일 것이다.
곧이어 3학년 야구부들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식당으로 들어왔고
나와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각자의 무용담과 실패담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결승타를 친 녀석도 멋진 수비를 한 녀석도 얼굴이 환하다. 역시 시합은 이겨야 한다.
그날은 부상중이라 시합에 못 뛰었지만
이제는 부상에서 회복하여 첫게임에서 홈런을 쳤다고 자랑하기도 하고
1이닝에 5실점 했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웃기도 하는 녀석들을 보니
오랜만에 내가 교사였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
그리고 고심끝에 선택한 수제햄버거를 맛나게 먹어주었고 선생님과 하던 과학수업이 재미있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이번에는 경주에서 시합을 하는데 결승에 올라가면 응원 와주실거냐고 물어본다. 물론이다.
이번에도 우승하면 맛난거 사주실거냐고 물어본다. 물론이다.
나의 마지막 학교에 야구부가 있어서
나의 잠들었던 야구 사랑을 복원시켜주었고
그 사랑이 <불꽃야구>로 이어져간 것은 운명이다.
그런데 학교에 들어서니 뒤편 세운상가쪽에서 검은 구름이 올라온다.
불이 난것임에 틀림없다. 빨간 불꽃은 보이지 않았는데 검고 회색의 구름이 계속 올라온다.
곧이어 타는 냄새도 퍼져온다.
나는 사진을 찍었고 119 신고를 해야하나 잠시 고민했는데 곧이어 소방차 소리가 들린다.
곧 진화되겠지 했는데 세운상가 을지로 3가 뒤편으로는 조그마한 소상가들이 밀집되어 있고
비어져있는 곳도 있고 염료 등의 화재 취약물들을 다루는 곳들도 많이 있어서 걱정이 되었다.
화재가 난 것을 직접 근처에서 본 것은 처음이다.
그렇게 순식간에 연기가 올라오고 탄 냄새가 퍼지는 것도 처음봤다.
원래 계획대로 오늘 병원을 방문했더라면 바로 그 시간쯤 화재발생지역 50M 이내에 있었을뻔 했다.
(그랬더라면 비상구로 대피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어제 내가 넘어질뻔했던 그 경사 깊은 계단이다. 당황해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알 수 없다.)
다행히도 병원을 어제 다녀왔고
나는 200M 근처에서 연기를 보고 그 탄내를 맡는 것으로 놀라움의 양을 줄일 수 있었다.
희생자는 없는 것으로 나오던데 천만다행이다.
마침 그쪽 방면에서 이른 저녁 약속이 있었는데
화재 연기 때문에 방향을 바꾼다.
평양냉면을 먹으려 했으니 같은 평양냉면을 파는 필동면옥으로 간다.
일행 중 한 명은 평양냉면이 처음이라하니
오늘 새로운 매니아가 탄생하느냐 아니면
포기자가 생기느냐의 기로이다.
여전히 사람이 많은 필동면옥에서 오늘은 평양냉면 포기자 2명을 만들었다.
올해 나도 세 번째 평양냉면이었는데
먹을 때 마다 컨디션이 난조였는지(그럴리는 없는데)
이제 그만 시도해야겠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물론 오늘 처음 먹어본다는 지인도 포기자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뭐 어쩌겠나. 평양냉면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평양냉면의 그 심오함에 나의 미적 감각이 따라가지 못한 것이니
노벨상 수상자의 강연을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평양 냉면을 먹고 지하철역으로 가다가 연습을 마치고 가던 농구동아리 녀석들을 만났다.
6월 14일에 농구 시합이 있다고 응원 와달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들도 우승하면 햄버거를 사줄거냐 물어본다.
정식 대회와 중구청 동아리끼리 하는 교류전과 어떻게 같은 급이냐고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대신 한번의 경험으로 사준다는 확언은 하지 않았다.
2학기에 다시 학교로 돌아오면 안되냐고 묻는다. 즐거운 과학시간이 기억난다고 이야기한다.
고맙다.
함께 과학공부하던 그 시간이 나도 무지 그립다.
사랑한다고 해주어서 무지무지 고맙다.
오늘 오후 네시에서 여섯시까지 참으로 버라이어티한 일들이 일어났다.
예정했던 일도 전혀 그렇지 않았던 일도
좋았던 일도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도 있었다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심심한 날보다 무지무지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