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와 고등학교편
중학교는 그나마 국민학교 동창들이 모두 다 같은 학교로 진학을 하는 시스템이어서
한 학년의 반은 알고 시작하는 셈이었다.
우리 학교 출신과 또 하나의 학교 출신이 반반을 차지하고
그리고는 조금씩 다른 학교 출신들이 섞여있는 그런 대규모 중학교였다.
그 때 당시 화곡동에 있던 유일한 여자 중학교였다.
믿을 수 없겠지만 김포공항 근처부터 지금의 강서구와 양천구 거주자들이 모두 다 다니던 여중이다.
그땐 그랬었다.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있으니 하루도 조용할 날이 있을 수 있겠나.
나중에 교사가 되고서야 알았다. 그때 선생님들 참으로 힘드셨겠구나.
우여곡절이 많았던 그리고 사춘기 시절을 보냈던 중학교 시절에
나는 딱히 큰 라이벌은 없었고 아마도 내 자신이 라이벌인 시대를 보냈던 것 같다.
자잘자잘하게 오늘은 저 친구가 거슬리다가 다음날은 또 괜찮고
그 다음 날은 다른 친구의 행동이나 말에 기분이 조금 나쁘고 그러다가 괜찮아지고 그런 날들이었다.
심한 사춘기였음에 틀림없다.
교복 치마 길이와(무릎이 보이면 안되었다.)
두발 단정화(귀밑 3cm였었나?) 시대였는데
미묘하게 교복을 줄이고 머리에 멋을 내고 교회 오빠들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을
한심하게도 또는 부럽게도 쳐다보았었다.
여하튼 중학교는 나타해지는 나와의 싸움을 하다가 지치다가 다시 힘을 냈다가 그랬던
나와의 라이벌 상황이 유지되는 그런 보이지 않는 전쟁 상태였다.
물론 매일 부글부글 샘솟는 화는 엄마에게 풀어버리는 못난 딸이었다.
고등학교에 갔더니 라이벌이 아닌 친구가 없었다.
화곡동 시골에서 시내 중심의 학교에 배정받은 것부터가 천지개벽할 일이었다.
매일 만원인 시내버스에 휘달리다가 간신히 학교에 도착하면 배는 고프고 멀미로 뱃속은 뒤집히고
머리는 멍멍하고 기운은 떨어졌는데 수업 내용은 무지 어렵다.
그 당시 학원도 과외도 받지 못하고 오로지 나 혼자 힘으로 공부하면서 갑자기 두 배는 어려워진 수업 내용을 따라잡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집에 오면 파김치란 말이 딱 맞았고 자도 자도 잠이 오는 그런 날들이었다.
아는 친구라고는 중학교에서 같이 갔던 한 두명 뿐.
그 친구들 마저도 각자도생하느라 엄청 힘든 상태였다.
그 암울하고 힘들었던 고1을 보내면서
처음 받은 중간고사 성적표를 들고서
나는 한강에 가야하나 한참을 고민했었다.
그런데 어찌저찌 버텨는 지더라.
이렇게는 안되겠다 싶어서 고3 이 되면서 나는 내맘대로 한 명의 라이벌을 지정했다.
그 친구는 나를 라이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을 것이다. 아마 지금까지도...
당시 자연계 1등이었던 권모양이다.
고3이 되었는데 자신감은 없고 목표도 딱히 없던 나는 무조건 독보적인 1등 권모양과 같은 반이 된 김에
철저하게 그녀를 벤치마킹하기로 했다.
학교에 늦게 오고 행동이 느릿느릿한 것만 빼고 말이다. 그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가급적 그녀 옆 자리에서 열심히 따라 공부하기를 수행했고
모르는 것을 자주 물어보았으며(자존심 따위는 버린지 오래되었다.)
그녀가 잘못하는 다양한 정보 수집등을 도맡아 함께 공유하는 최측근을 자처했다.
물론 내 마음속에는 라이벌이라는 위치가 또 있었다만...
그래서인지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오히려 막연하고 앞이 보이지 않았던 고1이 더 힘들었었다.)
고 3 수험생활을 보냈고
권모양은 물론 서울 시내 의대에 전액장학생이 되었고
그와 함께 과외를 한 친구들을 소개해주어
대학생활 내내 나의 역사와 기쁨을 함께 한
친구 그룹까지 얻게 되었다.
나에게 많은 것을 나누어준 친구이자 라이벌이다.
지금은 미국에 있어 얼굴을 본지 무려 20년도 넘었다만
나의 힘든 고등학교 생활에 이정표가 되어준 그녀를 나는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그때 함께 열공했던 양모양도 역시 미국에 있다.
우리는 한때 제법 잘 어울리는 삼총사였다.
저 사진의 기린 삼총사와 비슷했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던 그 삼총사가 딱 한번 야간 자율학습을 땡땡히 치고
안국동 거리를 거닐었던 적이 있었다.
영화를 보러 나선 길이었던 것 같은 생각이 나기도하고 아니기도 하다.
왜 그랬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그러다가 정말 우리에게는 재수없게(?) 저녁을 드시고 학교로 돌아오시던 담임 선생님과
딱 마주쳤는데 다행이도 너그러이 눈감아 주셨었다. 빨리 다녀오라셨던 것 같다.
담임 선생님과 마주쳤던 그 가슴 철렁하던 육교는
이제 철거되어 그 자리에 없어졌고
오늘 나는 작년을 함께 한 고1의 격동적인 시간을
막 보낸 제자들 격려차(아마 나만큼 힘들었을지 모른다.)
밥을 사주러 나의 모교 근방을 방문할 예정이다.
권모양과 양모양이 저절로 생각나는 길이다만
그들은 이제 권모할머니와 양모할머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얼마전까지는 카톡으로 가끔씩 안부는 물었었는데 연락이 끊긴지 꽤 되었다.
이 글을 쓴 것을 계기로 다시 톡을 넣어봐야겠다.
그들 덕분에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삶이 풍성해졌음을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