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와 말복 사이
오랜만에 다섯시 부근에 일어났다.
학교 출근 때는 이 시간에 일어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그러기 위해서 별일이 없다면 그 전날 일찍 잤었다.
초저녁잠이 제일 달고 맛난 상태로 평생을 살았었다.
그런데 퇴직 후 점점 초저녁잠이 없어지는 듯 하더니
남편이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 7월 이후
점점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게 되었다.
남편의 저녁 식사 시간이 늦어서이다. 온전히...
남편의 저녁 식사가 8시가 되고
반 공기 정도의 밥을 먹는데만 근 50여분이 소요되고(위암이니 빠르게 무언가를 먹을 수 없다. 손이 저리니 젓가락질이 쉽지 않다.)
옆에서 내가 같이 먹어주면 조금은 더 먹을까 싶어서 가급적 나도 그 시간에 밥을 먹고
(밥 먹고 금방 자면 살이 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조금은 있다.)
그리고 남편은 항암약을 먹어야하고(약이 많아서 준비하고 먹는데도 시간이 꽤 걸린다.)
그 뒤로 내가 설거지를 마쳐야하니
내 초저녁잠의 달콤함이 주는 그 시간대는
이미 지나가버린다.
요즈음은 그나마 식사 시간을 30분 앞당겨주었다만...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래서 9시 정도에 톡을 보내면 늦은 시간에 죄송하다는 말로 시작하였었다.
깨어있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중간에 일어나면 보겠지라는 마음으로 보냈다고 했다.
어제는 10시에 막내 동생에게 톡이 들어왔다.
무슨 급한 일인가 봤더니 달 사진이다.
운동갔다 오면서 보니 큰 달이 떴다고 보낸 것이다.
보통 달 사진은 내가 자주 주로 보내는데
요즈음 밤에 돌아다니는 일이 전혀 없다보니
달 사진을 안찍은지 꽤 오래된 듯 하다.
사실 아침 출근길에 보이는 달을 더 좋아라하기는 한다.
마침 잠이 안와 아들방 물건을 정리하는 중이어서
재빨리 옷걸이 분리수거를 핑계로 밖으로 나갔다.
거의 보름달의 형태인 달도 보고 사진도 찍어보고 소원도 빌어보려는 심보였다.
오늘 저녁 약속이 있긴 하지만 이틀동안 빌면 확률이 높아지겠지 싶어서였다.
소원 내용은 비밀이다.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다가 아들 녀석이 쑤셔박아둔 옷도 찾고
(옷걸이 더미 속에 넣어두었더라. 보물찾기도 아니고. 물론 중요한 옷은 아니긴 하지만 혹시 몰라서 다시 잘 가져와서 드레스룸에 걸어두었다.)
마침 멋진 달무리속의 거의 보름달도 보고
(오늘이 진짜 보름달이란다. 오늘도 찍어보련다.)
사진은 조금 더 멋지게 찍고 싶었으나 대문에 올린 사진이 최선이고
(그것도 휴대폰 성능이 건져준 것이지 내 실력은 아니다.)
2학기 강의를 위해 산 과학교양책을 조금 읽고
(잠이 안오면 책을 읽는다가 국룰아닌가?)
달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니 제자들의
좋아요와 댓글이 달리는 것을 살펴보다가 그렇게 잠이 들었다.
오늘은 스케쥴이 많은 바쁜 날이다.
미국으로 박사 학위 공부를 하러 곧 출국하는 후배 교사에게 복날 삼계탕을 사야하고
(후배라기 보다는 제자의 느낌이 조금은 더 크다.
아마 열정으로 힘든 유학 생활을 잘 견뎌낼 것이다.)
마지막 학교에서의 여름방학 방과후 특강을 마무리해야하고
(방학인데 열심히 참여해준 녀석들이 대단하다.)
내일 예정인 대학부설 영재원 특강 수업 준비물을 만들어야하고
(PPT는 만들었고 관찰 준비물만 손을 보면 된다.)
지인 장학사님들과의 저녁 식사 시간도 보내야한다.
(나의 재취업을 누구보다도 함께 기뻐해주었다.)
그 사이 시간이 비면 고양이 발톱에도 버틸 수 있는 소파 전시회 구경을 가려했는데
올해 졸업생들이 찾아올지는 알 수 없다.
기꺼이 소파 전시회쯤은 포기할 수 있다.
어제 방과후 수업 종료 시간을 두 명이 물어보았다.
아마도 깜짝 방문을 계획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굳이 기다리지는 않겠다.
기다리다가 안오면 조금은 실망하니 말이다.
고등학생인 그들도 신임 초빙교수인 나도 곧 매우 바쁜 일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바쁜 일정의 오늘 아침.
평소보다 일찍 깼다. 설이가 놀라더라.
남편 반찬을 준비해두겠다는 무의식의 발로일지도 모르겠다만
그리고 오랫만에 느끼는 아침의 청명함이 좋다.
방마다 창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아직 자고 있는 남편방 빼고는...
매미 소리도 한창 더웠을 때 처럼 빽빽거리게 들리지는 않는다.
매미도 더워서 신음소리를 냈던가 보다.
(아직 매미소리와 기온과의 연관성 논문은 찾아보지 못했다만.)
그리고는 자는 남편을 위해 아침 음악도 켜지 않은 채 이 브런치를 작성한다.
아참. 어제가 입추였다.
아직 가을의 시작 같아보이지는 않지만 절기의 힘은 누구도 어쩌지 못했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아마 그래서 오늘 일찍 깬 것일지도 모른다.
내 몸이 기억하고 있다. 절기를 말이다.
그런데 오늘 점심은 말복기념 삼계탕이다.
말복과 입추는 묘하게 그 시기가 얽힌다.
모든 일이 그렇기는 하다.
새로운 시작이 다른 하나의 끝과 닿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