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명절 휴가를 앞둔 솔직한 마음

어딜 가고 싶은 건지 아닌건지 알수가 없다.

by 태생적 오지라퍼

오늘 오전, 오후 강의는 무리 없이 끝났고

드디어 세 번의 도전 끝에 원소기호 키링 활동이 진행되었고

(장갑을 끼고 가내수공업으로 한땀 한땀 만들어주었다.)

점심은 푸드 전공 학생들이 만든 꽈리고추 갈비덮밥을 맛나게 먹었고

(밥만 조금 더 익혀주면 완벽하겠다. 양이 많아서 두 번에 걸쳐 나누어 먹었다.)

갑자기 할 일도 많은데 <과학을 생각하다> 라는 책에 꽂혀서 독서를 시작했고

이제 저녁에 진행 예정인 천체 관측 시간동안 하늘이 협조해 줄 일만 남겨두었다.

그리고 참가학생들에게 편의점 컵라면을 대접하고 나면(약소하긴 하나 더 나은 대안이 없다.)

길고 오랜 명절 휴가에 돌입하게 된다.

가을 방학인 셈이다.


이렇게 가을에 오래 쉬어본 적이라고는 난생 처음이다.

얼떨떨하기도 하고 아직 실감이 나지 않기도 한다.

명절이기는 하나 딱히 가야할 곳은 양로원에 계신 시어머님을 뵈러 가는 것 밖에는 없는데

그것도 남편의 건강이 안좋고 누가봐도 말라서 아픈 것이 틀림없어 보이니

어머님이 보시고는 큰 걱정을 할까가 두려운데

다행히 기억력이 떨어지셔서 곧 잊으시는 듯 하다.

하시던 말만 계속 반복하시니 말이다.

아들 녀석이 함께 가준다했으니 가까운 곳에

나들이겸 외식겸 다녀온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이천호국원에 모신 친정 부모님께는 추석연휴가 끝난 뒤에 찾아뵈려 한다.

호국원앞에 제발 휴가때를 피해서 와달라는 간곡한 주민들의 메시지가 붙어있었다.

아버지 생신도 있는데 집에서 과일만 올려놓고 간단하게 묵념만 할까 한다.

어려서 추석날은 엄마가 병 나는 날이었다.

추석 음식 장만만으로도 엄청 힘든데

아버지는 생신날 꼭 친구들을 하루종일 집으로 불러서

점심과 저녁을 먹이고 마작을 하셨었다.

안방가득 담배 연기가 쉴새없이 퍼져 나왔고

엄마는 돌밥, 돌밥을 하시고는 다음날

이마에 수건을 길게 묶고는 며칠간 드러누우셨었다.

옛날 드라마에 나오는 딱 그 장면이다.

긴 명절을 앞두고 물론 강의 준비는 틈틈이 하겠지만

딱히 갈 곳도 할 일도 없다는 것이 나를 편하게도 하고 울적하게도 한다.

휴식이라는게 그렇다.

하루 이틀 정도는 자고 먹고를 계속하는 것이 쉼이라는 기분이 들지만

사흘째만 되면 그것도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그때쯤 뭐 할 것이 없겠나 생각해보면

서울 시내 고궁 전시관 방문 혹은 주변 산책을 빼고는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다.

그렇다고 사람이 복작대는 곳을 방문하는 일은 더더욱 싫다.

생각만으로도 기가 빨리고 숨이 가빠진다.

늙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번 명절에는 서울을 공식적으로 뜨기 전 구석구석을 둘러볼 기회로 삼아볼 계획이다.

갔던 곳을 또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추억을 되살릴 수도 있고 추억을 묻고 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어디 가지 못하면 어떠냐.

그런 날은 고양이 설이를 근처에 두고 안경도 벗고 편하게 책이나 읽으면 되지.

다만 비가 우중충하게 내리는 날만 아니었으면 한다.

반짝 반짝 빛나는 날이라면 무엇을 하든지

안하고 가만히 있던지 모두가 의미 있는 날들일 것이다.

다행히 남편은 휴대폰을 찾았다고 점심때쯤 문자를 보내왔고

잠을 제대로 못잔 내 컨디션도 그만그만 한 것 같으니

망원경으로 달과 별만 잘 보인다면 괜찮은 하루로 마감될 듯하다.

물론 안내문 붙이다가 이미 스카치 테이프날에 손을 조금 베였고 피는 났고 밴드는 붙였고

강사님 방문차량 등록은 해두었고

학생들 컵라면 사줄 학교 카드도 받아두었다.

그러니 완벽한 일이란 없다.

그리고 완벽한 휴가도 없을 것이다. 어딜 가고 싶은 건지 아닌건지 알수가 없다.

어딜 가고 싶은 건지 아닌건지 알수가 없다.

또 모른다.

갑자기 어디로 떠날런지도 말이다.

급 번개라는 것이 있기는 하다.

어디를 가고 싶은 것인지 아닌지도 명확하지 않은 마음이다만

아무 계획도 없다가 갑자기 생기는 로또 같은 기회를 꿈꾼다.

이 나이가 되어도 헛된 꿈은 가끔 꾼다.

단 당일치기이다.

아픈 남편과 정에 굶주린 고양이가 걸려서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

누가 나를 멋진 곳으로 초대해주기를 내심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마음 나도 몰라.

keyword
작가의 이전글무소식이 희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