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만은 없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다.
주구장창 그랬던 것 같다.
아침에 눈이 반짝 안 떠지는 날은 우중충하고 습도가 높은 날이었다.
학교 가는 길이 신바람 나지 않고 빠른 가속도가 붙지 않은 날은 습도가 높은 날이었다.
하늘이 흐리고 비가 곧 내릴 것 같은 상대습도가 높은 날은
혈압이 이상하고 뒷골이 마구 땡기며 몸이 이유없이 무겁고 찌부퉁해진다.
그 전날의 활동량이나 수면 시간 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고
오로지 습도가 주요 변인이라고 파악한 것은 오래된 빅데이터 기반이다.
가을방학 중 벌써 며칠째 아침이 이렇다.
나는 목요일부터 수업이 없었으니 목, 금, 토, 일이 모두 비슷한 아침이다.
아니다. 목요일이 제일 반짝했었던 것 같다.
비오는 것을 좋아라한다는 나의 첫사랑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습도에 의한 우울증이다.
습도보다는 덜 하지만 온도도 내 삶에 미치는 영향이 대단하다.
가장 싫어하는 달이 11월인데
그 이유는 갑자기 서늘해지는 온도 하강을 처음 만나게 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11월 초 내 생일 즈음이다.
한 살 더 먹는다는 것도 싫은데 추위까지 몰려오고 하필 이상하게도
첫 추위는 내가 옷을 평소보다 얇게 입은 날 맞닥트리게 되는 징크스가 있다.
추위와의 악연이다.
추운 날은 나같은 에너자이저도 꼼짝하기 싫어지는 경향이 절로 생기는 것을 보면
온도와 습도가 얼마나 삶에 중요한 요인인지 알 수 있다.
누구에게나 중요할 것이다만 사람에 따라 그 차이는 천차만별인 듯 하다.
즉 객관적인 값이 아니라 그것 또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값이 있다는 뜻이다.
눈오는 것도 좋아라한다던 나의 첫사랑은 이런 감정도 아마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아이러니하다.
그 첫사랑과 나는 생년월일이 똑같다.
운명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온도와 습도는 자연적인 현상이고 내가 어찌 제어할 수도 바꿀 수도 없으니
나를 바꿔야하는 것이 맞다만(나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맞다만) 그것이 그리 쉽지는 않다.
비가 오면 공식적인 일이 아니고서야
길을 나서지도 않는 나의 오랜 스타일을
오늘은 한번 바꿔보려한다.
일부러 약속도 잡았다.
비오는 남산 주변을 돌아보는 일이다.
가을의 남산을 가본 적이 많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서울의 시그니처인
남산 케이블카 승강장 앞의
상징적인 장소를 사진에 담을 예정이고
(케이블카를 타지는 않을 것이다만)
여력이 된다면 후암동이나 신흥 시장까지를 돌아보겠다는 야무진 우중 산책길에 나서보기로 한다.
비가 안오면 정말 좋겠지만 비가 와도 할 수 없다.
우산을 쓰고 그 비를 조금 맞는 것으로
비를 피하지 말고 비와 맞서는 것으로.
함께 가는 것으로.
그런데 잘 될지는 모르겠다.
평생 피하던 비였으므로...
싫은 것은 피하기 일쑤였는데 정면 승부를 택하는
나의 오늘 선택이 어찌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