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가 조금 바뀐다는 것은.

조금은 불편하고 당황스럽지만 새롭기도 함

by 태생적 오지라퍼

아침 일어나자마자 첫번째 루틴은 화장실에 갔다가

3종 세트 약을 먹는 일이다.

(혈압, 고지혈증, 갑상선 호르몬약)

그리고는 이후 일들은 순서가 바뀌기도 하고 달라지기도 하는데 온전히 그날 그날 상황에 따른다.

약을 미리 안 먹으면 조금 지나면 먹었나 안먹었나가 헷갈리기 시작하고

어제 먹던 상황이 오버랩되기도 하는 혼란이 일어난다.

몇 번 그랬었다. 속이 탄다.

먹은 것을 또 먹으면 절대 안되니 말이다.

그래서 일어나서의 첫 루틴은 꼭 지키는 편이다.

오래전 부터이다.

갑상선 전절제 수술을 한지 10여년이 넘었다.


오늘 아침 6시쯤 습관적으로 누워서 휴대폰을 보니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들어와있다.

<비번 미기재로 지하 1층에 있습니다.> 오전 3:30분.

아뿔싸. 오랜만에 먹거리 새벽 배송을 시켰는데

그 분인가보다.

아파트 소독 아르바이트의 영향으로 배달 등 유사 업종 종사자들이 얼마나 힘든지를 잘 알고 있다만

지금까지 출입문 비번이 없었어도 잘만 집 앞 배송이 되었었는데 이것은 뭔 일이지 싶다.

무언가 배송 시스템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은듯도 한데 그래서인가

지금까지는 주간 배송만 받아서 그런가

사진도 없이 그냥 문자만 믿고 지하 1층에 내려가는

그 짧은 시간동안 걱정이 되기는 한다.

이것저것 생각을 하며 홀린 듯이 지하 1층 입구로 내려가서 배송물품을 찾아왔다.

다행히 내 물품만 얌전하게 놓여있었다.


그리고는 또 홀린 듯이 배송물품 상자를 오픈한다.

배송 물품은 즉시 확인하는게 또 내 루틴 중 한가지이다.

어떻게 바로 열어보지 않는 사람이 있는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무엇을 시켰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만

상자를 좋아라하고 기다리는 설이가 벌써 중문앞까지 마중나와 있다.

닭가슴살과 설이용 츄르와

내 강의 우수자 시상용 과자와(내가 좋아하는 1+1이더라.)

청국장 밀키트와 두부(청국장 및키트에 두부가 있는데 손두부는 또 왜 산거냐? 정신차려라.)를

꺼내서 정리하다보니

새로산 츄르앞에 코를 박고 있는 고양이 설이가 우스워서 조식 서비스를 즉각 실시한다.

새로운 맛의 츄르를 잘 먹고는

물을 얼려만든 아이스팩을 눈빠지게 관찰하더니

밀키트 뚜껑위에 앉아서 자신이 좋아라하는 박스를 사수하려고 지켜보고 있다.

이 아침. 설이는 행복하다.

행복한 설이를 보는 나도 행복하다.


그런데 먹거리 정리까지 싹 다 하고 났더니

내가 오늘용 약 3종 세트를 먹었나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잠깐의 시간을 되돌려본다.

화장실을 갔고 거실 불을 켰고 거기까지는 명확한데

그 다음이 기억나지 않는다.

약을 먹으려면 냉장고 문을 열어 약을 꺼내고

정수기 물을 받아야하고 한 모금으로만 약을 먹는지라

컵에 물이 남아있어야하는데 컵은 텅 비어있다.

안 먹고 그냥 직진으로 새벽배송을 처리하러 간 것임에 틀림없다.

루틴을 안 지키면 그 순서가 바뀌게 되면

이렇게 불편하고 당황스럽고 순간 아찔할 수 있다.

오늘은 그래도 심플하게 일찍 생각난 경우에 해당되는데

그 시간이 한참 경과할수록 내 동선은 더더욱 늘어나고

생각해야 할 변수는 더더욱 많아지고 시간 되돌리기 난이도가 점점 높아진다.

다행이다.

그래도 최근 시간의 일을 기억하는 것을 보니

아직 치매는 아닌 듯 하고

약은 먹었으니 되었고

오늘은 강의가 없는 날이지만

해야할 일은 있을 것이고(없으면 만드는 스타일이니)

무릎은 다른 통증이나 관찰시 특이 소견은 없다.

아침부터 청국장을 끓이는 것은 아닌 듯 하여

닭가슴살과 달걀 굽는 것으로 시작하려 한다.

오늘은 제발 비가 안와서 반짝 해를 만나고 싶고 선글라스 끼고 저 호숫가 주변을 산책하고 싶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다시 일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