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이 불러오는 나비효과

잘 먹었습니다.

by 태생적 오지라퍼

어제 올 3월 이후로 처음하는 공식적인 회식이었다.

교양교육원 전체 교강사 워크숍에서도 식사는 했지만 점심이었고 학식이었고

나는 오후 네시 반 이전의 행사에는 결코 약하지 않지만

야간 행사에는 젬병이다.

나쁜 시력 때문일 수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졸리는 것일 수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둠이 무서운 것일 수도 있다.

어두울 때 활동한 경험이 많지 않다.

우리 집은 9시 뉴스를 틀어놓고 자기 시작하는

조기 취침 스타일이었다. 그때부터 쭈욱이다.


강의를 마치고 회의까지 짧은 시간 틈에

오후 브런치를 하나 작성하고

오늘 평가시험 본 답안지 초검도 하고

회의에서 그래도 오늘은 입 한번 떼고

(그동안 신입이라 분위기 파악하느라 참은거다.)

두 번 가본 맛난 근처의 한정식집으로 간다.

더 기분 좋은 것은 회식 끝나는 시간이 언제쯤일지 몰라서

셔틀버스를 뒷 타임으로 예약해두었는데

(다시 학교로 돌아와야하는 길이 조금 된다.)

멋진 교수님이 판교역까지 차를 태워다주신다니 엄청난 행운이다.

귀가 걱정을 내려놓고 신나게 수다와 영양분 흡입에 몰두했다.

같은 식당을 3번째 방문하니 익숙하기도 한데

보리굴비는 지난 여름보다 눅눅하여 약간의 비린내가 나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고

(그 맛있던 최상의 상태가 아니었다.

녹찻물에 말아먹지 않아서는 아니다.

기온이 떨어져서 일 수도 있다.

바짝 말린 건조한 굴비가 맛난것인데

요새 너무 비가 많이 오고 습했다.

날씨가 보리굴비 맛에도 영향을 끼친다.)

나머지 밑반찬은 여전히 최고의 퀄리티라

오는 길에 집에서 먹을 것도 샀다.

이번 주 밑반찬 준비까지 마쳤으니

판교역이 더 화려하고 멋져보였는지도 모른다.

호박엿 하나는 엿러버 나에게는 최고의 디저트였는데

오랫만에 혈당 스파이크 최고치를 찍은 듯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졸려서 혼났다.

집에 돌아와서는 그냥 딱 누워 자고 싶었지만

아들 녀석 짐도 정리하고 데려다주느라 시간을 더 썼고

내가 제일 애정하는 <불꽃야구>도 제대로 시청하지 못하고 그냥 잤다.

저녁 회식이 불러오는 나비효과 첫 번째 노곤한 상태로 잠이드는 꿀잠이다.


아침 기상 시간 변화까지는 영향이 없다 생각했는데 아니다.

아침 루틴이 엉망진창이다.

일단 어제 많이 먹은 여파로(솥밥 하나를 눌은밥까지 다 먹었다.) 화장실이 급하다.

아침부터 신호가 오는 일은 많지 않은데 웬 떡인가 싶다. 상쾌하다.

그리고는 갑자기 내일 차를 가지고 학교에 가니

나의 얼마남지 않은 책과 기타 물건을 옮겨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게다.

열심히 가져갈 것을 챙긴다.

그러다가 이전 학교 선생님들께 물려줄 물건도 챙기고

주말 야구 경기 보러 갈 때(아직 티켓팅도 하지 않았다만) 후배에게 줄 물건도 챙기고

아침부터 짐정리에 몰두하다 보니

아침 약을 먹었나 안먹었나 또 헷갈리기 시작한다.

물컵을 보니 물이 하나도 없고 혓바닥도 건조한 느낌이다.. 안먹었다.

이렇게 평소 하던대로 안하면 이런 일이 생기더라.

아침 루틴 파괴가 어제 회식의 나비효과 두 번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배가 안고픈 현상이다.

보통 기상하고 두 시간쯤 되면 배가 슬며시 고파오는데 아직도 배가 빵빵하고 더부룩하다.

이 대로라면 오늘 점심때나 되어야 먹고 싶은 마음이 들것 같은데

현실은 남편 아침을 챙겨야 한다.

어제 제대로 못본 <불꽃야구>를 틀어놓고 아침 준비에 들어가면 된다.

내 배가 부르면 음식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만고의 진리이다.

나도 지극히 평범하 마음의 소유자이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세상의 모든 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내가 보기에는 갑자기 생긴 일도 어쩌면

다 서사와 이유와 근본이 있는 법일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운명론자로 회귀하는 이 마음은 무엇이냐?

날씨가 추워져서 내가 이전에 다쳤던

오른손 엄지 손가락과 왼쪽 엄지 발가락이

동시에 쑤셔오는 것처럼

내가 잊고 있거나 놓쳤던 것들이 스물스물

다시 기억나는 것은

비단 어제 회식의 나비효과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어젯밤 식당을 나오다가 본 눈썹달은 정말 이뻤다. 사진으로는 절대 담지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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