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한 가지씩만

그것에 만족할 수는 없다만

by 태생적 오지라퍼

멀티태스킹을 멋져라하고

멀티플레이어를 숭배하고

멀티포지션을 기꺼이 담당하는 삶을 살았었다.

그런데 이제는 힘에 겹다.

강의를 하고 집안일을 하고 가끔 연구 아르바이트를 하는 세 가지 역할에서

이제 조금은 버거움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일의 경중에 따라 순번을 정하고

그것대로 착착 일이 진행되었을때의

그 상쾌하고 기분좋음을 자주 느꼈었는데

(내 도파민 분출의 최고봉이었다.)

올해는 그런 날이 며칠 되지 않는 것 같다.

앞으로는 점점 더 그럴 것이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제 디지털 역량 평가에서 수준 미달을 받아서

더 그런 생각이 드는지도 모른다.


아들 녀석은 오늘부터 제주 출장인데

그 녀석이 마지막 점검을 함께 해주었으면 하는 일들이 점점 늘어난다.

집 난방 시스템도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오늘 갑자기 거실바닥에서 서늘함이 느껴진다.)

어제 세금계산서 발급도 함께 해주었으면 어려움이 없었을 듯 하고

가전 이전 설치 신청도 옆에서 봐주었으면 좋겠고

고장난 노트북 자판도 봐주었으면 좋겠고

버릴 가구와 가지고 갈 것도 최종 결정을 내려주었으면 하는데

아들은 내가 엄청 독립적으로 살기를 희망한다.

직장 생활에 바쁘고 귀찮아서일거라는 생각도 들지만 섭섭한 것은 사실이다.

남편은 아직도 시어머니와 매일 10분씩 통화하는 효자인데

나의 아들 녀석은 내가 뭐해?라고 보낸 톡에

왜요?라는 답만 한다.

세상 불공평하다.


그래도 아직까지 재미있기도 하고 잘하기도 하는 것은 강의인데

오늘은 중간 평가가 있어서 수업은 1시간씩만 진행하니 힘이 남아 돌아서 더더욱 열강을 했고

중간 강의 평가에 응답한 학생들의

긍정적인 응답 서술에 더 고무되기도 했다.

물론 응답을 다 읽어보지는 못했다.

학교에서의 시간은 왜 그리도 빨리 지나가는 것인지

강의하고 점심 먹고 다시 강의하면 퇴근이다.

그리고 중간 중간 해야할 일들이 몰려온다.

할 수 없다.

쉽고 작은 사이즈부터 빨리 빨리 잊어버리기 전에 처리할 수 밖에.

그래도 퇴근길에 어제 머리를 쥐어뜯었던 것 중 한가지인 <나라장터> 입찰 업체 신청

제대로 되었다고 메일을 받았으니 다시금 힘이 난다.

이제 교육청 연구 계약을 할 수 있을것 같기도 하다.

내일 행정 담당자의 검토과정을 거쳐야 한다만.


이제 에코스쿨 연구 최종 발표 자료를

수정 보완하고(양이 꽤 된다.)

새로 들어가는 탄소중립연구 킥오프 회의를 준비하고(일단 이야기를 나눠봐야 방향이 잡힐 듯하다.)

틈틈이 이사 준비를 하면 되겠다.

하루에 한가지씩만 하자.

그 정도만 하는 것에 만족하자.

더 이상 하려다가 오히려 역효과가 나고 지칠수도 있다.

일단 내일 오전은 은행일을 처리하고

오후에는 연구 관련 열일을 해보자.

지금은 그냥 한국시리즈를 배경 음악처럼 틀어놓고

(약자를 응원중이다만 이미 오랫동안 시합을 하다보니 많이 지쳐보인다.)

머릿속으로만 일을 하다가

(머리 속 정리가 더 중요하기는 하다.)

그래도 중간평가 채점은 마쳤고

하루 중 마지막 미션인 남편 저녁을 차리면 된다.

항암약 복용 시간때문에 저녁을 8시에 먹는다.

나는 벌써 조금씩 졸리기 시작하는데.

어제부터 자기 삼십분쯤전 전기담요를 약하게 틀기 시작했다. 그리고 끄고 잔다.

출근하기 전에 살펴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늘었다.

가스 끄기와 확인하기, 고양이 설이 밥 챙기기,

그리고 전기담요 코드 빼두기.

척척척 착착착.

여러 가지 일을 순차적으로 많이 거침없이 진행하던 그때가 그립기만 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디지털 역량 평가 미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