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바리움>을 보고
시골에서 온 한 남자가 와서는 그 법 안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청한다. (...) “가능하지만,” 하고 문지기가 말한다. “지금은 그러나 안 돼.” (...) “모든 사람이 법을 얻고자 노력할진대” 하고 시골 남자가 말한다. “이 여러 해 동안 나 말고는 아무도 입장 허가를 바라는 사람이 없으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요?” (...) “여기서는 다른 누구도 입장 허가를 받을 수 없었어. 이 입구는 오직 자네만을 위해 정해진 것이었으니까 말이야. 나는 이제 가서 입구를 닫겠네.”
- 프란츠 카프카, <법 앞에서> 중
<비바리움>.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영상 이미지화된 시(詩)를 보는(읽는) 느낌에 가까웠다. 모든 영화의 장면과 서사가 통째로 강렬한 비유 문구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비바리움>의 장르는 SF(공상과학영화)라고 했지만, 나는 이 영화가 오히려 드라마 장르로 느껴졌다. 영화의 모든 부분은 외계인이 아니라 인간의 현실과 삶에 철저하게 밀착해있었다.
매 장면의 의미와 인물이 함축하는 바에 관해 특정한 상(像, image)을 구축하며 영화를 시청한 입장에서, 이 텍스트는 두 가지에 대한 거대한 서사의 메타포, 그 자체였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나'로서 내가 벗어날 수 없는 '자아(나)'와 그 자아가 느끼는 공허함의 무한한 굴레에 관한 메타포이고, 두 번째는 관계 맺음과 그후, 상실의 과정에 관한 메타포이다.
'실제' 인물은, 극중 아이로부터 "엄마"로 불리는 주인공 '제마' 한 사람뿐이다. '제마'는 곧 '나'이다. 아이의 존재는 곧 '제마'의 자아를 의미한다. 아이는 곧 나의 '자아'이다. '톰'의 존재는 이별하는 과정과 이별 후의 연인(사랑한 대상)의 잔상에 해당한다. '톰'은 곧 '관계'이다. <비바리움>은 이러한 나, 자아,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 이 세가지의 삼중 무의식에 관한 메타포이다.
인간은 자신이기 때문에, 그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아무리 기나긴 도로를 돌아돌아 운전을 하고 직진으로 걸어나가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바로, 나자신이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나자신과 함께한다는 것이다. 나자신과 함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다름 아닌 나로서의 공허감을 견뎌야 한다는 의미이다.
사회적 자원을 완비하지 못하는 평범한 인간이라면, 인간은 누구나 적당히 우울할 수밖에 없다. 우울함은 흔히 슬픔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울은 공허감과 오히려 더 밀접하게 연결된다.
이 장소, 즉, 이곳(나)로부터 벗어나려고 무슨 일이든지 하지만, 인간은 나의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숙명과 함께한다. 다시말해, 공허함을 끌어안고 그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닌다.
'톰'은 '뭐라도 하고 싶어서', '뭐라도 해봐야 할 것 같아서' 앞마당에 깊숙이 땅을 판다. 아무런 수확도 이득도 없지만, 온 시간과 땀과 노동을 투자해서 어쩌는 수도 없이 기꺼이 그렇게 한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안 했다'는 생각만큼 인간을 괴롭게 하는 것은 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능할 수 있을 뻔한 것이라는 가능성의 틈이 부추기는 고통이다.
가능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것이 결코 가능하지 못하게 된 데 대한 자책감은 오직 나자신을 향한다. 스스로를 자책감과 자기 혐오로 끌어들이는 늪이다. 그 늪을 피하기 위해서, 인생이라는 주어진 시간의 궤도에서는 누구나 땀을 흘리며 무언가를 한다.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는 자신의 단편선 <법 앞에서>에서 이렇게 썼고("내가 (문지기로서) 이걸(귀중품을) 받는 것은, 자네가 뭔가를 소홀히 했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일 뿐이네."), 가수 이랑은 이렇게 노래했다("무기력감이나 공포심이 찾아올 때면 나는 우는 대신 자전거를 타고 밖으로 나가 달렸다 / 나처럼 웃는 방법을 잃어버린 많은 사람들이 어딘가에 돈을 내고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이곳(나)에 들어온 순간(태어난 순간)부터, 나는 어쩔 수 없는 나일 뿐이다. 이 장소를 벗어난다는 것은 오직 죽음으로서만 가능하다. 애인 '톰'의 죽음을 앞두고, '제마'는 절규한다. "이대로면 죽을 거야. 우리를 내보내준다고 했잖아!" 아이는 이렇게 대답할 뿐이다. "내보내질 때가 됐나보지(Maybe it's time to release)."
집(home)에 관한 정주감의 욕망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평생 집을 갈망한다. 그저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의미의 주거공간이 아니라, 받아들여진다는 느낌, 수용의 결정체로서의 정주감을 원한다. 그때의 집은 곧 물질이 아니라, 감정과 느낌을 의미한다. '제마'는 본인의 죽음 직전에 자루에 담겨선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저 집이 갖고 싶었을 뿐인데." 성인으로 자라난 아이는 대답한다. "무슨 소리야? 여기가 집이잖아." 이것은 결국 "집이란, 영영 벗어날 수 없는 나자신 속에서 추구되고, 좌절되는 감상(feeling)"이라는 메세지다.
아무리 물리적으로 이동해도 궁극적으로는 제자리로 돌아오게끔 설계된 지대 위의 집 앞에서, 갇혀버린 '제마'와 '톰'을 어떤 상자가 기다리고 있다. 상자 속엔 갓난아이과 함께 문구가 있다. "아이를 기르면 내보내진다(will be released)."
이 아이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공간에 영원히 갇힌 '나'의 '자아'의 현현이고 재현이다. 이 아이는 몸집이 금세 비대해진다. 비현실적일 만큼 빠른 속도로 자란다. 세계에 노출된 이상, 아이의 막힘없는 성장을 나로서는 저지할 길이 없다. 나의 자아는 그렇게 무럭무럭 자라난다. 아이를 기른다는 것은 곧, 자아의 성장을 도모함을 의미한다.
아이는 매일 아침 식탁 앞에 앉아서, '제마'가 따라주는 시리얼과 우유가 그릇에 무사히 안착되기 직전까지, 괴성에 가까운 알 수 없는 비명을 지른다. 그러다가 음식이 모두 준비되면, 그제서야 침착해지면서, 먹는다. 그리고 밤이 되면 잠을 잔다. 같은 맥락에서 '제마'와 '톰'은 매일 아침,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표정으로, 지난하게도 매일같이 양치를 반복한다. 이는 거부할 수 없는 육체의 돌봄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생존의 조건을 의미한다. 가수 이랑은 이에 관해서도 노래한 바 있다("나는 자주적인 삶을 살리라고 생각했다 / 그래서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에 두 번씩 생각해보았다 / 하지만 일상이라는 이름 아래 먹고 마시는 것이나 잠을 자고 움직이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절대 벗어날 수 없는 한정적인 공간에 갇히는 순간은 곧, 이별에 관한 메타포로도 읽힌다. '제마'의 자아에 해당하는 갓난아이가 점차 유아동-청소년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톰'이 느끼기에 더는 받아들일 수 없는, 타의로 막을 수 없는 '제마'의 자아의 성장이다. 관계에서 이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타협할 수 없는 지점에서 '제마'는 제마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자아를 지켜야 하고, '톰'은 아이('제마'의 자아)를 차에 가둬 굶겨 죽이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그 이후로 '톰'은 자신의 인생에 몰두한다(계속해서 땅만 깊숙이 파고든다). 이는 '톰'이 더이상 자신의 공허감을 '제마'와의 연인관계를 통해 해소할 수 없어지자, 자기 인생에 만연한 기존의 공허감을 떨치기 위해, 이젠 다른 무언가라도 시도/노력 해봐야 하게 된 형국에서 벌어진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사실 '톰'과 '제마'의 사이가 눈에 띄게 소원해진 기점('제마'의 자아에 대한 메타포인 아이를 '톰'이 죽이려고 하는 사건의 발발) 이전과 이후로 꼭 나누지 않더라도, 이미 이들의 관계는 '욘더'라는 공간에 갇힌 이후부터는 곧장 죽음, 그후였는지도 모른다. '제마'는 '톰'과 함께하고자 했지만, 결국 '톰'은 이미 자신의 인생에 '제마' 없이 골몰한다(앞마당에 땅을 판다). '톰'은 알고보면 '제마'가 자신의 무의식 세계(마을 '욘더') 안으로 끌고 들어온, 끝난 인연에 대한 잔상이다. '제마'는 다 끝난 관계를 쉽게 놓아버리지 못하고, 혼자 침상에서 고독한 기분으로 '톰'의 부재를 실감한다. 이 장면에서도 이랑이 노래한 것이 떠오른다("운동을 하고 차를 마셔도 잠은 오지 않았고 나는 부엌 식탁에 앉아 친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 친구가 돌아와 이층에 올라가 잠을 청하는 소리가 들려오면 그제서야 나도 멍하니 있다가 슬슬 잠이 들었다").
'톰'의 죽음을 앞두고, '제마'는 다 바스러져가는 시체에 가까운 '톰'의 육체를 자기 위에 뉘인 채 대화를 이어간다. 첫 만남의 경이로움과 그 기쁨에 관한 사사로운 추억 따위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현재에 없기에 더욱 아름답고 갈망되는 것이다. 가수 이랑은 또, 이렇게 노래했다("어쩌면 제일 즐거웠던 한 시간 모든 시간 아님 먼 하루에 그 기억을 둘 중에 하나만 갖고 우연히 만나게 되었을 때 또 그저 웃으며 인사하겠지만 사실 나는 모두 기억하고 있단다").
연인(관계)의 죽음 이전에는 공허함을 일시적으로나마 떨칠 수 있었던 게 '제마'의 삶이다. 그러나 마을 '욘더'에 꼼짝없이 갇혔음이 가리키는 것은, 사랑 없이 다시 공허해진 '제마'의 본질적인 인생이다. 공간 '욘더'는 곧 사랑 없는 공허감이 지배하는 개인의 삶의 근원적인 공간이다. '제마'는 결국 자신의 막을 수 없이 성장하는 자아(성인이 된 아이)를 바라보면서 나직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후회의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다. "네가 저것을 죽이려고 했을 때 내가 말리지 말았어야 했어." 하지만 자신의 자아를 죽여가면서 특정 타인과의 관계를 붙잡을 것인지 결정하는 순간으로 다시 되돌아간다고 해도, '제마'는 그저 '제마' 자신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신은 오직 자기 자신이 되려고 했어
- 함선영,
<당신이 숲이라고 말하자 나는 가슴이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