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추상 감정의 실존적 동기를 찾아서
fin. 2018. 12. 4. 화. P.M.11:56
(상실; 1. 詳悉; 내용을 자세히 앎, 2. 喪失; 잃어버림)
(추상; 抽象; 여러 가지 사물이나 개념에서 공통되는 특징, 속성을 추출해서 파악하는 작용)
우리가 채택하는 전망은 실존주의 모럴이다. 모든 주체는 투기(投企)를 통하여 자기 초월로써 구체적으로 확립된다. 그것은 다른 자유를 향한 부단한 자기 초월에 의해서만 자기의 자유를 완성한다. 무한히 열려 있는 미래를 향하여 자기 신장(伸張)을 도모하는 외에는 목전의 실존을 정당화하는 길은 달리 없다. 초월이 내재(內在)로 떨어질 때마다 실존은 ‘즉자 존재(卽自存在; 그 자신이 있는 그대로 독립적인 존재. 다른 사람과의 관계보다는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여 주관적이고 고립적인 상태에 있는 존재를 이른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사용한 개념이다.)’로 타락하고, 자유는 사실성(事實性)으로 타락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 성(性)』
모든 사회는 그 사회에서 중요시하는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은유적인 형태로 구현함으로써 체감토록 한다.
-레비스트로스, “구체성의 논리(the logic of the concrete)”
여자이기 때문에, 나는 아름다운 것을 취할 자격이 없다.
……나는 추한 남자들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의 머리카락과 당신의 눈동자는 내겐 금지되어 있다.
그렇긴 해도 당신의 머리카락은 길고, 그리고 좋은 향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르네 비비앙
기질이 강한 여성에게 파악(把握; 어떤 대상의 내용이나 본질을 확실히 이해함)적, 소유적 경향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에는, 그런 여성은 르네 비비앙처럼 동성애로 기울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자기가 여자처럼 취급할 수 있는 남성에게밖에 애정을 느끼지 못한다.
……남자의 품에서 스스로 육신(肉身)이 되기를 원한다. ‘남자는 아름답지 않아도 좋다’고 그녀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들어 왔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객체가 가지는 무기력한 특징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남성적인 정력과 완력을 찾아야 한다. 이리하여, 여자는 그녀 자신 속에서 둘로 나뉜다. 그녀는 자기를 부들부들 떠는 가련한 물체로 변화시켜 줄 거친 포옹을 갈망한다. 그러나 난폭함과 완력은 역시 그녀에게 상처를 입히는 불쾌한 방해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쪽의 욕구는 또 다른 한쪽의 욕구와 부분적으로 대립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에게 가능한 범위에서 타협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녀가 그에게서 얻는 것은, 그가 그녀에게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상(地上)의 짐승과 꽃, 보석이며, 시내[川]이며, 별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보배를 자기 손으로 잡을 수가 없다. 여성 신체 구조상 그녀는 거세된 내시처럼 어색하고 무력하게 머물러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소유의 욕망은 구체화할 수 있는 기관(機關)이 없기 때문에 좌절되고 만다.
-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 성(性)』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머릿속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유형, 그러니까 우리가 상상으로 눈앞에 떠올리는 어떤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그와는 반대로 우리가 상상해볼 수 없는 어떤 새로운 유형, 그러니까 실제가 직접 우리에게 드러내는 어떤 것이다.
-프루스트, 『생트-뵈브』, 87쪽
나는 비로소 추상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추상은 부재이면서 고통이다, 그러니까 부재의 고통. 그런데 어쩌면 이건 사랑이 아닐까?
- 롤랑 바르트, <애도일기> 중
1
평소처럼 아무 과제물도 수행하지 않은 무기력한 저녁 밤이다. 그러나 엄연히도 평소보다는 오늘 더 기분이 좋다. 사색에 잠길 수 있을 만큼의 딱 적당한 상실감. 상실(喪失)이라는 동기(動機) 없이는 사색으로 자아가 이끌어지지 못한다. 그러나 상실만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될 만큼 내 모든 순간과 신체가 파편, 파편으로 상실을 이루면, 막상 그것의 총체는 사색을 압도하므로 더는 사색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딱 적당한 상실감과 적당한 사색. 그러니, 적당함 속에서 그것의 초월을 발휘하여 깊이 있는 사색을 이루는 일이 내 평생의 진리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는 죽음이다. 첫 번째. 상실 아래 압도되어서 묵살(默殺)된 사색, 그 사색이 곧 나이므로 내 존재가 그렇게 압살당하거나. 두 번째. 여성은 사색 없이는 실존에 실패하므로. 그 두 가지는 “내 죽음이 양기(兩岐)로 길게 땋아 내린, 여자의 머릿결이다.”
2
내 사랑은 그곳에만 있습니다.
내 온 전체가 바라는 모든 추상체가 구체적으로 발현되는 한 곳.
그곳은 당신의 총체가 몸으로서 발 딛고 서 있는 자리입니다.
3
사랑을 이룰 수 없다는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성취될 수 없는 욕망들, 그래서 남은 것은 한낱 자기도취뿐입니다. 내가 도취 될 수 있는, 무한한 추상으로서의 자아가 내 안에 내재합니다. 그 추상들이 여태껏 그 실체 없이 답답하게 내재하여 머무르다가, 문득 내 앞에 피아(彼我), 즉, 내가 아닌 것으로서 처음 등장하는 감격스러운 순간입니다. 살아있다면 언제든지, 내가 놓치는 무언가가 있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나는 나의 상실을 상시 간에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그 구체적 상실(喪失)이 무엇인지도 볼 수 없는 채로 사경을 헤매는 편이 낫습니까, 아니면, 내가 잡지 못한 것을 선연하게 눈앞에다 두고두고서 현시하는 편이 낫습니까?
나에겐 선택권이 없습니다.
철학자 파르메데우스가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상실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없는 것이 버젓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음이 곧 그것의 없음을 증명하므로, 그것이 현실에선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오직 ‘난잡한’ 추상이라는 수단으로서 끊임없이 내재에 ‘있어야만’ 할 때, 나는 고문에 수렴하여서 괴롭습니다.
그러나, 영영 그것이 실체로서 내게 드러나 뵈지 않았던 이유란, 결코, 나에게 그것을 현실 목도(目睹)할 능력으로서의 시력, 통찰, 혜안이 없어서가 아니었음을 무려 증거 하는 존재가 바로 당신입니다.
4
나는 그동안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항상 알고 싶어 하는 채로, 항상 소실(燒失)하는 심장과 그 통증을 부여잡고서, 하루하루 걸어 마침내 이곳에 당도했습니다.
나는 보이지 않는 내 자아에 도취하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면 사색할 수가 없고, 따라서 그것은 곧 죽음입니다. 자기도취 하여서, 나 자신을 주체도 객체도 아니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자기도취는 그 효력이 빈약한 마법, 즉, ‘사기’입니다. 자기도취를 통해서는 그 누구도 주체이면서도 동시에 객체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거짓으로서의 사기(詐欺)입니다. 물론이요, 본문 총체의 자기 언약이 내 실존의 중요한 기틀이라는 뜻에서 그것은 사기(事機)이며, 거짓말이 지니는 파장에 의해 깨뜨려질 연약한 그릇으로서의 사기(沙器)이며, 지금까지 속아온 연유로 그간 누적된 자기 부아가 이제야 치밀어서 드디어 저항 불가한 힘을 얻어낸 기운, 그러한 자기 기운으로의 사기(士氣) 또한 맞습니다. 자기도취, 그것은, 가장 중요하게는, 목숨을 버릴, 죽음의 기간으로서의 사기(死期)일 것입니다.
5
자아 도취하는 여성은, 도취의 순간에 한사코 주체도 객체도 될 수 없습니다.
그녀는 자기도취인 것과 그것이 아닌 것 사이에서 방황합니다. 그녀는 이성애자도 동성애자도 되지 못한 양성애 인간이며, 남성도 괴물도 되지 못한 제2의 인간, 즉, 여성이며, 주체도 객체도 되지 못한 모든 추상(抽象) 총체입니다.
첫 번째. 보는 이의 시선을 기다리는 객체는 결코 자기만의 시선을 던질 수 없습니다. 객체가 하는 그러한 시도는 실행 즉시 변질하기 때문입니다. 시선의 결과는 곧 동적인 시선이 아니라, 정적(靜寂)인 대상의 일부(一部)이거나 그 객체-물체 자체입니다. 그런데 만일, 자기 시선을 안으로 굽이어서 자아(自我)에로 부단히 던지며 도취한다면, 그때의 나는 결코 객체가 아닙니다. 내 시선을 가졌으므로. 참고로, 자기 실존을 추구하는 길에서 객체로서의 자기를 확립하지 못 하는 일은 (주체로서의 자기를 확립하지 못 하는 일 못지않은) 현실적인 고통입니다. 주체가 못 될 바이면서 객체조차 되지 못한 이는 가장 끔찍한 상실을 영속 받습니다. 그 여성은 불투명한 물체이지만, ‘시선이 고정될 수 없는’ 타자, 그 역설로서 불온하게 존재합니다.
두 번째. 나는 보이지 않는 추상 자아를 좇고 있으므로, 내 시선의 방향성은 영원히 추상입니다. 오직 추상만으로 사물을 인지하는 인간은 주체 또한 되지 못합니다. 추상으로의 인지는, 알고 보면, 대상을 직시, 직면,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추상을 그리는 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추상이 포착하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의 내면입니다.
6
그 추상들이 여태껏 그 실체 없이 답답하게 내재하여 머무르다가, 문득 내 앞에 피아(彼我), 즉 내가 아닌 것으로서 처음 등장하는 감격스러운 순간입니다. 내가 도취 될 수 있는, 무한한 추상으로서의 자아가 내 안에 내재합니다. 성취될 수 없는 욕망들, 그래서 남은 것은 한낱 자기도취뿐입니다. 그런 나에게도 딱 한순간, 주체 시선이 있습니다. 내 시선이 인지한 그곳. 그 무엇보다 구체적인 즉물성(卽物性)을 내포한 ‘인간의 몸’을 내가 추상 언어로 정의할 수가 있을 때, 내 추상 시선은 한순간 현실에서도 무려 성립합니다. 내 사랑은 그곳에만 있습니다. 내 온 전체가 바라는 모든 추상체가 구체적으로 발현되는 한 곳. 그곳은 당신의 총체가 신체로서 발 딛고 서 있는 자리입니다.
사랑을 이룰 수 없다는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