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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트 Sep 23. 2022

내 심장에 스웨터를 떠줄 수 있니?

내 말들은요 아무데로도 가고 아무데로도 가지 않습니다

소현은 진녹색의 연필을 칼로, 빚듯이 깎았다. 연필의 나무 겉면이 살살 벗겨내지면서 나선형으로, 그러나 불규칙한 모양으로 길고 느슨하게 늘어졌다. 흑연 부분은 적당히 뾰족하게 갈았다. 소현은 길게 튀어나온 일정하고 둥근 두께의 심과 뾰족해진 그 끝을 보면서 흡족해졌다. 이제 쓸 수 있어. 무엇이라도.


이렇게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는 게 무슨 말인지 그때는 몰랐다. 행복은 사실은 옷장 서랍에 있고, 책상서랍 속에 들어있다. 행복해지려면 책상 앞 의자에 앉아서 책상서랍을 땡겨 열어서 행복을 발견해야 한다.


소현은 행복들이 우수수 쌓여있는 서랍 속을 가만히 보았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바로 오랫동안 찾아다닌, 문제였다. 문제가 되는 것들은 그때부터는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 너무 많은 것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이렇게 존재하기 위해서 의지하고 있는, 모든 쌓아올려진 것들을 기꺼이 가벼이 버리고 떠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몸을 유지해야만 했다. 너는 그걸 몰랐지? 그게 행복을 발견하는 사람의 조건이야. 몸이 무거운 사람은 책상 앞에 앉으려 해도 의자까지 걸어갈 힘이 없어. 몸이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굉장히 무거우니까. 무거운 솜뭉치 인간아.


웃기. 웃는 일이 가장 중요한 거였다. 어떤 순간에도 기억해야 한다. 지금 웃거나 나중에라도 얼른 웃어야만 한다는 것을. 소현은 갑자기 무거운 철근이 매달린 쇠사슬에서 풀려난 사람처럼, 커다란 자유에 압도 되었다. 푸른 들판 위에 두 발로 꼿꼿이 서서 양팔을 하늘로 훤히 벌린 채로 산들바람을 맞이하는 그런 상상이 들었다. 소현은 수백명의 자기자신이 소현을 감시하고 있는 원형감옥에서 이제는 풀려난 셈이었다. 오직 소현이 더 이상 감옥을 상상하지 않음으로써 가능한 해방이었다. 탈옥이나 탈출 과정 따위를 모색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가뿐하고 간편한 해방이었다.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소현을 늘 옥죄던 마음의 감옥은 하루 아침에, 모래 위에 지은 성처럼, 말그대로 ‘스르륵’ 사라져 버렸으니까.


이 말들은 모두 어디로 가나요. 내가 남들의 말을 귀로 들으며 살아가고, 그때마다 그 말이 내 마음에 들어오듯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마음으로 ‘들어오게 될’, 내가 하는 모든 말들에 대해, 나는 내가 져야 하는 책임이 너무나 무겁고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자유로워요. 내 말들은요, 아무데로나 가고요, 아무데로도 가지 않습니다. 이제 알기 때문에 나는 더이상 질문하지 않습니다. 이 말들이 모두 어디로 가는지를요.


소현은 정말 많이 아팠던 지난 겨울을 생각해봤다. 그 시절의 살갗을 파고드는 한기가 얼마나 고문이었는지를 떠올렸다. 소현은 추위를 좀처럼 타지 않는 체질이었다. 추운 지방에서 나고 자라서 그렇다고 친구들에게 웃으며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설명하곤 했었다. 그 질병은 정말로 많이 아픈 종류의 것이었다. 추웠고, 추위에 끝이 없었다. 마음이 시린 것은 어쩔 방도가 없었다. 내 심장에 스웨터를 떠줄 수 있니? 내 심장은 온통 얼어붙었어. 한번 냉동한 것을 해동하고나서 다시 얼리는 건 좋지 않다는데. 아마 내 심장은 음식물쓰레기로 분류되는 게 맞겠다, 그러면. 괜찮아, 내가 털모자와 스웨터와 장갑 그리고 목도리를 떴어. 여러번 녹았다 얼기를 반복한 내 심장은 분명히, 뛰고 있었다. 일정한 무게의 박동이었다. 자주색의 비트. 나뭇가지도 피해갈 수 없이 앙상해지는 추운 계절을 지나, 날이 풀리고 봄이 찾아왔을 때, 소현의 마음도 조금씩 녹았던 걸까. 괴로운 마음도 손을 내저어 저멀리 쫓아버릴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손을 내젓는 방법을 잘 몰랐었다. 아마 괴로운 마음도 괴로웠을 거야. 초대 받은 손님인 줄로 착각했는데 사실은 불청객이었다니. 아무튼 이곳은 당신의 자리가 아닙니다. 소현은 아팠던 지난 겨울에 얼어붙었던 감각이 뜨거운 여름을 지나 선선해지는 계절을 앞두고서야 진정으로 해동됐다고 느꼈다. 한번 해동했으니, 재냉동하지 마세요. 바로 드세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모두가 알아볼 수 있는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정말로 볼품이 없었다. 자기 이야기가 아닌 줄 알았겠지만, 그게 소현이었다. 내가 저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게 해줄 옷이 필요했었다. 동시에 강하게 유능함을 상징하는 유명인에 대한 동일시 욕구가 작용했을 것이다. 소현의 마음에는 색깔이 너무 많았고, 정말 많은 색들은 한 데 뒤엉켜서 아무색도 아닌, 검은색이 되었다. 세련된 취향을 고집하고 촌스러운 것을 혐오하던 마음은 정말이지 볼품이 없었다. 절대 그렇게는 살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살고 있었지? 눈을 감았다. 검은색이 보였다. 이게 사실은 무지개였다는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가지각색의 아름다움을 느껴보세요.


소현은 정말 많이 자유로웠다. 원고를 다 쓰고 나서 소현은 시원하게 뻗어나가는 온몸의 형상으로, 기지개를 켰다. 어제까지 빨간색이었던 우체통이 오늘은 메탈릭했다. 빛나는 silver.


독자들의 편지는 언제나 기다려졌다.


to. 소현님

소현님. 소현님의 글은 꼭, 잘못 끼워들어가져 있는 문장을 골라내라는, 문제집의 문제같아요. 낯선 조합이지만, 그런대로 그저 그 자리에서는 빛을 내고 있어요. (...)


끝까지 읽기 어려웠다. 그래서 끝까지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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