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켜쥔 손을 놓다: 제행무상과 명상의 시간

불안의 불길을 끄고 고요한 관조의 숲으로

by 하노이별

1. 맹렬한 불길을 끄는 지혜, 괴로움의 뿌리를 정면으로 응시하다

니체의 망치로 내 삶을 옭아매던 우상들을 모두 때려 부순 뒤, 나는 모든 것이 타버린 서늘한 잿더미 위에 섰다. 밖을 향해 사정없이 무기를 휘두르던 맹렬한 전투는 끝났지만, 망치 자루를 꽉 쥐고 있던 내 두 손은 경련을 일으키며 하얗게 질려 있었다.

거짓된 껍데기를 파괴하는 것만으로는 완전한 평온에 이를 수 없었다. 내 안에는 여전히 부서진 잔해들을 아쉬워하고, 알 수 없는 내일을 두려워하는 미세한 불안이 잔불처럼 남아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남은 불씨마저 완전히 끄기 위해, 나는 내 삶의 폐허 위로 두 번째 지혜를 조용히 소환했다. 작은 절의 노보살님이 건넨 따뜻한 위로를 안고 도서관 서가에서 뽑아 들었던, 바로 그 부처의 시선이었다.

불교의 이론 체계는 내 괴로움의 원인을 니체와는 전혀 다른, 아주 건조하고 명증한 시선으로 해부해 냈다. 부처의 렌즈로 보자면, 내가 평생 겪어온 이 끔찍한 고통의 본질은 아주 단순명료한 우주의 법칙을 외면한 데서 비롯되었다.

불교에서는 이를 '일체개고(一切皆苦)', 즉 삶 자체가 본래 괴로움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말은 인생이 그저 비관적이고 끔찍하다는 염세적인 저주가 아니다. 부처가 일갈한 괴로움의 진짜 뿌리는 세상의 민낯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캄캄한 '무지(無知)'에 있었다. 진실을 외면한 채 내가 믿고 싶은 대로만 믿으려는 그 억지스러운 고집과 착각이, 기어이 우리 삶을 펄펄 끓는 생지옥으로 만든다는 뼈아픈 지적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무엇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것인가. 첫 번째는 세상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 즉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피어난 꽃은 시들고, 흐르는 강물은 바다로 흩어지며,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르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찰나에도 내 몸의 세포들은 끊임없이 소멸과 생성을 반복하고, 나를 짓누르던 끔찍한 절망감도 불어오는 바람 한 점에 옅어지곤 한다. 청춘의 팽팽했던 활기도, 맺고 끊어지는 인연도 한순간도 멈춰있지 않고 흘러간다.

계절이 바뀌듯 너무나 당연한 우주의 순리건만, 우리의 미련한 착각은 끝끝내 헛된 환상을 품게 만든다. 내가 쥐고 있는 온기, 내가 사랑하는 존재, 나를 지탱해 주는 편안한 조건들만큼은 시간의 풍화 작용을 비껴가 영원불멸하기를 그토록 간절하고도 맹목적으로 부둥켜안는 것이다.

영원할 수 없는 것을 영원하라고 억지를 부리며 꽉 움켜쥐려 할 때, 바로 그 손아귀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고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강물은 흘러가는 것이 본성인데, 나는 내 뜻대로 강물의 흐름을 멈춰 세우고 두 손에 가둬두려 했다. 물은 기어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텅 빈 두 손을 보며 나는 세상이 나를 배신했다고 오열했던 셈이다.

두 번째 착각은, 영원하고 고정불변한 '나'라는 실체가 존재한다는 믿음, 즉 '제법무아(諸法無我)'에 대한 눈먼 무지다. 이 무아(無我)의 깨달음은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세계관인 '연기법(緣起法)'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텅 빈 들판에 흙과 햇빛, 한 줌의 비가 만나 한 송이 꽃을 피워내듯, 세상의 어떤 존재도 홀로 고립되어 생겨나지 않는다. 내 몸을 이루는 뼈와 살부터 매 순간 일어나는 얕은 생각들까지, 무수한 원인과 조건(인연)들이 정교하게 얽혀 지금 이 순간 잠시 '나'라는 임시적인 형태를 띠고 있을 뿐이라는 명징한 진리다.

세상 만물이 연기법에 따라 모였다 흩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을 겪어내는 '나'라는 존재 역시 매 순간 조건과 인연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유동적인 흐름일 뿐이다. 인연이 닿아 뭉치면 생겨나고 조건이 다하면 흩어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우주의 순리건만, 우리의 질긴 어리석음은 여기서 또다시 헛된 자아를 빚어낸다. 그런데도 나는 '유능한 팀장', '헌신적인 엄마', '착한 딸'이라는 특정 시기의 임시적인 역할들을 영원불멸한 '나의 본질'이라고 굳게 믿어버렸다. 나를 이루던 수많은 조건들 중 하나에 불과한 꼬리표들을 기어이 나의 진짜 영혼이라고 착각하며 어러석게 부둥켜안은 것이다.

실체 없는 것을 나라고 억지를 부리며 꽉 움켜쥐려 할 때, 제행무상에서 겪었던 피투성이의 고통은 내면에서 더욱 잔혹하게 반복된다. 회사가 나를 고용했다는 조건, 아이가 어리고 나를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인연이 다하여 흩어지면, 그 조건 위에서 생겨났던 '나의 역할'도 자연스럽게 소멸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입었다가 때가 되면 벗어야 할 임시적인 옷을 내 진짜 피부라고 착각했으니, 그 옷이 찢겨 나갈 때마다 내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끔찍한 비명을 질렀던 것이다. 결국 내 삶을 병들게 한 괴로움의 실체는, 연기의 법칙에 따라 무상(無常)하게 흘러가는 것을 영원하다고 믿고, 인연의 조합일 뿐인 무아(無我)를 고정된 '나'라고 고집하며 어떻게든 움켜쥐려 했던 그 불가능한 통제와 집착의 마찰음이었다.

이제 부서진 우상들을 향하던 시선을 거두어, 그것들을 억지로 쥐고 있던 내 손아귀의 탐욕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 변해가는 현상계(일체개고)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더 세게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힘을 빼고 쥔 손을 놓아버리는 것뿐이다.

부처의 지혜가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목적지는 바로 이 '놓아버림' 끝에 찾아오는 투명하고 완벽한 고요, 즉 '열반적정(涅槃寂靜)'이다. 열반이란 밖에서 거창한 진리를 얻어오는 것이 아니라, 나를 태우고 갉아먹던 탐욕과 집착, 분노의 맹렬한 불길이 마침내 후욱 하고 꺼져버린 상태를 뜻한다. 이는 곧 억지로 쥐고 있던 손아귀의 핏대가 가라앉고, 아무것도 쥐지 않은 본래의 편안함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이다.

불길이 꺼진 이 평온하고 텅 빈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나는 내 징글징글한 일상의 문제들을 부처의 깊고 고요한 지혜의 바다에 가만히 띄워 보기로 했다.


2. 핏줄이라는 영원한 환상: 변해가는 아이와 늙어가는 어머니

세상 모든 것은 멈춰 있지 않고 변해간다는 그 서늘한 진리를 가장 잔혹하게 거스른 뼈아픈 집착의 현장은, 다름 아닌 가장 가까운 핏줄인 가족이었다.

나는 아이가 내 몸에서 떨어져 나온 순간부터 이미 나침반을 쥐고 독립된 우주를 향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외면했다. 아이는 매 순간 성장하고, 바깥세상과 부딪혀 상처받고, 시시각각 새로운 감정을 흡수하며 형태를 바꾸는 유동적인 존재였다. 아이가 어리고 나의 전적인 보호가 필요했던 시절의 '조건'이 다했으면, 그에 맞게 부모로서의 역할과 태도 역시 해체되고 새로운 거리를 내어주어야 마땅했다. 아이와 나의 관계조차 고정불변한 핏줄로 굳어진 것이 아니라, 인연과 조건에 따라 매 순간 새롭게 구성되는 연기(緣起)의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내 밑바닥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아이를 '내 말을 잘 듣는 착하고 완벽한 부속물'이라는 고정된 틀 안에 억지로 가둬두려 했다.

아이가 커가며 겪는 자연스러운 흔들림과 낯선 변화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내 통제력을 벗어난 '문제'이자 나의 '양육 실패'로 치부하며 극도로 불안해했다. 흐르는 강물을 두 손으로 틀어막으려 발버둥 칠수록 물은 매섭게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고, 내 손아귀에 남은 것은 통제력을 잃은 자의 분노와 허탈함뿐이었다. 아이의 변화를 통제하려 했던 나의 어리석은 고집이 결국 아이의 연약한 세계를 산산조각 냈고, 지금 내 눈앞에 굳게 닫힌 방문과 뼈를 깎는 죄책감이라는 지독한 현실의 괴로움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아이의 단절은 밖에서 날아온 재앙이 아니라, 변화하는 생명력을 억지로 멈춰 세우려 했던 자가 치러야 할 완벽한 인과응보였다.

어머니와의 질긴 유착 역시, 세월이 흐르면 관계의 모양도 당연히 변해야 한다는 자연의 법칙을 완벽하게 무시한 참담한 결과물이었다. 아버지를 잃고 위태로웠던 과거의 젊은 어머니와, 생존을 위해 감정을 죽이고 눈치만 봐야 했던 다섯 살의 나는 이미 수십 년의 시간 저편으로 흘러가 버린 낡은 환영에 불과하다. 순리에 따라 어머니는 점차 육체의 힘을 잃어가는 노인이 되었고, 나는 한 가정을 책임지는 단단한 중년이 되었다. 관계의 역학은 진작에 변해야 마땅했다. "과거의 척박한 환경이라는 조건이 소멸했으므로, 그 조건 위에서 생겨났던 예속적인 관계 역시 응당 소멸해야 한다"는 이 자명하고도 단호한 이치를 나는 철저히 외면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과거의 상처와 부채의식에 사로잡혀, 훌쩍 변해버린 현실의 좌표를 똑바로 보지 못했다. 이미 어른이 되어 스스로 가정을 꾸렸음에도, 나는 여전히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는 다섯 살 아이의 낡은 대본을 움켜쥐고 무대 위에 서 있었다. 변해가는 시간 속에서 관계를 새롭게 재정립하는 대신, 늙어가는 어머니의 무리한 간섭에 기꺼이 나를 내어주는 과거의 굴종을 택한 것이다. 그 맹목적인 착각이 만들어낸 역주행의 결과는 처참했다. 내 가정이 파국을 맞이하고 내 영혼이 질식해버린 그 지독한 고통은, 운명이 내린 가혹한 형벌이 아니라 변해버린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조건부 애정'이라는 썩은 동아줄을 바득바득 붙잡고 있었던 나의 집착이 청구한 처절하고 뼈아픈 영수증이었다.

이제 나는 꽉 움켜쥐고 피가 통하지 않던 두 손의 힘을 천천히 푼다. 변해가는 아이의 궤도를, 늙어가는 어머니의 쇠락을 내 뜻대로 조종하려는 오만을 내려놓는다. 우리의 관계를 이루던 과거의 조건들이 다하여 이제 다른 모양으로 흩어지고 있음을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일 뿐이다. 계절이 바뀌고 강물이 흘러가듯, 그들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관조하며 내 손아귀에서 스르르 흘려보내야만 한다. 징글징글했던 핏줄의 족쇄는 이빨을 악물고 안간힘을 쓰며 억지로 끊어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을 나무가 마른 잎을 툭 떨구듯 그저 움켜쥔 손에 힘을 빼는 순간 스르르 벗겨져 내리는 것이었다.


3. 고정된 자아라는 착각: 흩어지는 명함과 시들어가는 육체

밖으로, 타인에게로 향했던 집착의 시선을 거두고 나니, 이번에는 나 자신을 향한 지독한 어리석음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직장에서의 퇴출과 갱년기의 거친 증상들은 그 자체로 내 삶을 파괴하는 재앙이 아니었다. 그것이 그토록 끔찍한 고통으로 다가왔던 이유는, 내 안에 영원하고 고정된 '나'라는 실체가 존재한다는 착각, 즉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무지 때문이었다.

나는 이름 앞에 붙은 '유능한 팀장'이라는 번듯한 직함이 곧 '나'라는 존재의 본질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불교의 냉철한 시선으로 해부해 보면, 명함이란 그저 특정한 시기에 회사라는 공간, 월급이라는 조건, 그리고 나의 노동력이 임시로 만나 얽혀 만들어진 인연의 산물일 뿐이다. "회사가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나의 노동력을 제공한다"는 상호 의존적인 조건이 결합했을 때만 '직장인'이라는 자아가 임시로 생겨나는 찰나의 결합이었던 것이다. 그 조건 중 하나라도 다하여 흩어지면 그 역할 역시 소멸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이치거늘, 나는 그 임시적인 역할표를 영원불멸한 '나의 진짜 피부'라고 착각했다. 입었다가 때가 되면 벗어야 할 남의 옷을 내 살점이라 믿었으니, 회사가 그 옷을 벗겨낼 때 살가죽이 뜯겨 나가는 듯한 끔찍한 비명을 질렀던 것이다. 명함이 사라졌다고 해서 내 존재가 폐기 처분된 것이 아님을, 그저 조건이 다해 흩어졌을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 억지스러운 고집이 나를 지옥으로 몰아넣었다.

갱년기를 맞이한 육체에 대한 좌절과 수치심 또한 마찬가지였다. 태어난 모든 것은 예외 없이 늙고 시들어간다는 자연의 섭리를 거부한 채, 젊고 생기 있는 여성으로서의 육체가 영원히 변치 않는 '나의 것'으로 머물러 주기를 탐욕스럽게 바랐다. 물론 시도 때도 없이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고 묵직한 오십견이 찾아오는 물리적인 고통도 컸다. 하지만 나를 진짜 미치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내 마음의 맹렬한 저항이었다. 나는 늙어가는 육체를 '나의 훼손'으로 받아들이며, 어떻게든 젊은 시절의 나로 되돌려 놓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진리의 수술대 위에서 들여다본 내 몸조차도 고정된 '나'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젊음이라는 한시적인 시간과 호르몬, 세포라는 수수한 조건들이 잠시 모여 이루어진 연기(緣起)의 풍경에 불과했다. 여름을 뜨겁게 달구던 태양이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듯, 그저 내 몸을 지탱하던 호르몬의 계절이 바뀌고 있을 뿐 내 존재의 단단한 뿌리까지 흔들린 것은 아니었다.

명함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고, 육체는 시간이 흐르면 늙고 병든다. 그 어디에도 영원히 고정된 '나'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텅 빈 거실에서 그 군더더기 없이 투명한 우주의 이치를 온전히 받아들이자, 핏대를 세우며 분노하고 억울해했던 일상의 상실들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 삶을 망가뜨리는 비극이 아니라, 그저 가을이 되면 붉은 나뭇잎이 가지를 떠나 흙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지극히 당연하고 담담한 자연 현상일 뿐이었다. 내가 꽉 쥐고 있던 '나'라는 허상을 내려놓는 순간, 나를 옥죄던 그 모든 절망은 앙상한 가지를 스치는 바람처럼 내 몸을 미련 없이 통과해 지나갔다.


4. 고요한 심연으로의 하강: 빛을 돌이켜 텅 빈 우주와 도킹하다

이 모든 이론적 자각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내 삶의 뼈와 살에 새겨넣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집착으로 펄펄 끓어오르는 이 소란스러운 현실의 진흙탕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와야만 했다. 괴로움의 사슬이 끊어지고 번뇌의 불길이 마침내 꺼진 자리, 그 서늘하고 고요한 열반의 가장자리로 다가가기 위해 나는 잿더미가 된 거실 바닥에 가만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밖을 향해 사정없이 휘두르던 망치를 내려놓고, 두 눈을 감는다. 삶의 무게로 뻣뻣하게 굳어 있던 어깨와 목덜미의 긴장을 투욱 떨어뜨렸다. 가슴 상단에서 얕고 조급하게 파도치던 숨결을 찾아내, 한 마디씩 코끝으로, 다시 한 마디씩 아랫배 단전(丹田)을 향해 조심스럽고도 길게 끌어내린다. 오르락내리락. 오직 들이쉬고 내쉬는 그 단순한 호흡의 리듬 하나에만 온 신경을 기댔다.

물론 그 좁고 일정한 호흡의 길목 위로 끊임없이 상념이 끼어들었다. 굳게 닫힌 아이의 방문, 늙어가는 어머니의 얼굴, 세상에서 쓸모를 다하고 폐기된 듯한 실직의 참담함,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명치를 뚫고 올라오는 갱년기의 훅훅한 열기까지. 끈질긴 번뇌가 고개를 내밀 때마다 나는 그것을 억지로 쫓아내거나 분석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아, 잡생각이 일어나는구나' 하고 건조하게 알아차린 뒤, 다시 묵묵히 들숨과 날숨의 끄트머리로 의식을 돌려세우는 훈련을 거듭했다.

호흡의 끈이 점차 굵어지고 깊어질 무렵, 나는 그 길고 고요한 숨의 길을 따라 내 안의 깊은 곳을 향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보았다. 텅 빈 관찰자가 된 내가, 고집스런 껍데기를 뒤집어쓴 나를 향해 묻기 시작했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이름이랄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닫힌 방문 앞을 서성이는 저 아이의 어미는 누구냐?'

"그 또한 없습니다."

'육신은 쇠락해 가면서도 기어이 너를 쥐고 흔들려는 저 완고한 어머니의 딸은 누구냐?'

"없습니다."

'너를 증명해 주던 번듯한 직함은 무엇이냐?'

"직함이랄 것이 없습니다."

'펄펄 끓어오르는 이 육신을 지닌 너의 나이는 몇이냐?'

"나이랄 게 없습니다."


호흡이 깊어질수록 내 대답은 점점 더 간결해지고 흐릿해졌다. '나다, 내 것이다, 내가 옳다'며 핏대를 세우던 징글징글한 아집과 무지가 예리한 지혜에 베여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나와 너, 핏줄과 명함, 젊음과 늙음이라는 세상의 모든 껍데기가 지워지는 그 찰나, 내면에서 거대한 인식의 전환이 일어났다. 평생토록 바깥세상의 인정과 타인의 시선을 향해 쏘아대던 내 의식의 조명이 180도 방향을 틀어, 내 영혼의 가장 깊고 어두운 밑바닥을 정면으로 비추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회광반조(廻光返照), 밖으로 향하던 빛을 내 안으로 돌이켜 비추는 눈부신 반전의 순간이었다.

마치 캄캄한 밤바다를 헤매며 밖으로만 번쩍이던 등대의 불빛이, 일순간 방향을 꺾어 등대지기가 머무는 가장 깊숙하고 고요한 방 안을 환하게 비추는 것과 같았다. 바깥의 소음이 차단된 그 절대적인 환희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세상의 인정 없이도 온전하게 존재하는 내 영혼의 밑바닥과 마주했다.

빛이 내면의 심연을 비추는 순간, 감은 눈 뒤로 아득하고, 티끌 하나 없이 맑고 깊은 어둠이 열렸다. 시간의 흐름도, 공간의 감각도, 심지어 그것을 인식하는 '나'라는 실체마저 완전히 지워진 텅 빈 우주. 이 지독한 지상의 진흙탕에서 아주 잠깐이나마 나를 건져 올려, 인간의 얄팍한 편견과 아집, 눈먼 어리석음의 때를 묻히고서는 결코 가닿을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층위의 고요하고 초월적인 세계에 조심스럽게 도킹하는 기이한 체험이었다.

모든 집착과 번뇌가 타버린 이 철저한 무(無)의 공간. 그런데 이 완벽한 빈 공간은 단순히 생명력이 꺼진 재(灰)가 아니었다. 밖을 향하던 빛을 내면으로 돌리자, 역설적이게도 이 텅 빈 고요 속에 무엇이든 새롭게 잉태할 수 있는 미지의 에너지가 밀도 높게 웅크리고 있음을 직감한다. 조용히 감았던 두 눈을 뜬다. 불교의 관조를 거쳐 마침내 다다른 이 투명한 열반의 가장자리에서, 나는 내 안의 아주 낯선 생명력과 다시 마주칠 조심스러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전 05화우상의 황혼 (하) : 세상의 잣대를 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