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우주에서 펄떡이는 가장 원초적인 생명력
가부좌를 틀고서 자리에 앉는다.
내 삶의 온갖 중력들이 무겁게 내려앉은 뻐근한 승모근에서 슬며시 힘을 빼본다.
어제의 후회, 오늘의 방만, 그리고 내일의 불안이 대롱 매달린 눈꺼풀을 가만히 내린다.
명치끝에 걸려 있던 짧고 조급한 들숨과 날숨을 찾아 들어간다.
한마디씩 코끝으로, 한마디씩 단전으로 숨을 늘려본다.
조금씩 깊숙이 그리고 두껍게 내 호흡을 바라본다. 오르락내리락, 다만 들이쉬고 내쉰다.
그러면... 어느 순간 번쩍, 빛조차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감은 눈 뒤로 펼쳐진다.
끝 간 데 없는 고요가 눈알을 지나고 전두엽을 지나 척추를 타고서 흘러든다.
중력도 밀도도 시공간마저 지워진다. 나도 너도 없다.
질기던 승모근은 고양이 젤리 마냥 말랑해진다.
무겁던 눈꺼풀이 노오란 나비의 날갯짓 마냥 나풀거린다.
명치 끝에 머물던 숨은 온 우주로 뻗어간다.
나는 흔적 없이 지나는 고양이가 된다.
나는 매끄럽게 유영하는 나비가 된다.
나라고 고집할 그 무엇도 없는 공(空)이나, 나는 그 무엇도 된다.
그 무엇에도 걸림 없는 층위로의 도킹(docking)이다.
내 안에 다른 차원의 우주가 펼쳐진다.
빛을 내면으로 돌이킨 회광반조(廻光返照)의 끝, 그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 직후 나를 맞이한 것은 완벽한 소멸의 감각이었다. 시간의 흐름을 재던 시계도,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알려주던 세상의 나침반도, 그리고 나를 짓누르던 그 징글징글한 삶의 중력마저 일순간 증발해 버렸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이완이 아니었다. 반백 년의 세월 동안 '나'라고 굳게 믿어왔던 견고한 에고(Ego)가 해체되는 찰나였다.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 세상에서 쓸모를 증명해야 한다는 불안으로 똘똘 뭉쳐 바위처럼 딱딱했던 승모근은 나른한 고양이의 발바닥 젤리처럼 한없이 부드러워졌다. 어제의 후회, 오늘의 방만, 그리고 내일의 불안을 매달고 천근만근 내려앉던 눈꺼풀은 거짓말처럼 무게를 잃고 허공을 유영하는 노란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벼워졌다.
경계가 허물어졌다. 내가 짊어졌던 이름, 직함, 늙어가는 육체라는 무거운 껍데기들이, 존재하는 모든 빛과 형태마저 남김없이 집어삼키는 블랙홀의 압도적인 인력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산산이 흩어졌다. 나를 옭아매던 모든 조건이 소멸한 이 철저한 무(無)의 상태. 그곳에는 어떤 두려움도, 어떤 고통도 없었다. 오직 자아가 허물어질 때 비로소 터져 나오는 궁극의 해방감과 깃털 같은 가벼움만이 척추를 타고 청량하게 흘러내릴 뿐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다음이었다. 나를 증명하던 모든 것을 비워내고 철저한 '무(無)'가 되었음에도, 그 자리에는 단 한 톨의 결핍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무언가를 움켜쥐려 발버둥 칠 때는 그토록 허기졌던 마음이, 껍데기를 모두 벗어던진 이 완벽한 빈 공간 위에서는 오히려 어떠한 덧칠도 필요 없는 온전한 존재의 충만함으로 벅차오르고 있었다.
나라고 고집할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 완벽한 '공(空)'의 상태. 껍데기를 모두 잃어버렸으니 이것은 곧 죽음이자 끝없는 허무일까. 그렇지 않다. 책상 앞에 앉아 내 알량한 지식과 편견으로 상상했던 불교의 세계가 아니었다. 세상의 잣대와 인간의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완전히 뛰어넘어, 오직 신성한 직관의 눈으로 이 텅 빈 공성(空性)을 마주하자 전혀 다른 차원의 우주가 펼쳐졌다. 이 텅 빈 공간은 생명력이 꺼져버린 차갑고 메마른 폐허가 아니었다.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완벽한 '자궁(子宮)'이었다. 아무것도 없기에 비로소 무엇이든 품을 수 있는 근원의 공간. 단 하나의 선도 닿지 않은 하얀 도화지 위로 투명한 생명의 색이 맑게 번져가듯, 그곳에는 온 우주를 잉태할 만한 무한한 잠재성이 일렁이고 있었다.
불교에서는 이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빈자리를 가리켜 '불성(佛性)'이라 부른다. 우리 내면에 본래부터 찬란하게 깃들어 있는 맑고 투명한 부처의 마음인 것이다. 어떤 번뇌나 세파에도 훼손되지 않는, 비워져 있으나 눈부시게 알아차리는 본성이다.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에는 이미 이토록 완전한 우주가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그동안 무언가를 끊임없이 움켜쥐고 꾸역꾸역 채워 넣어야만 내가 존재하는 것이라 믿었으니까. 그래서 명함으로, 돈으로, 타인의 인정으로 나의 결핍을 가리려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 억지스러운 집착들이 오히려 내 생명력을 질식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을 스르르 풀자, 처음에는 내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아득한 두려움이 일었다. 하지만 무엇으로도 나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고, 그저 아무것도 쥐지 않은 채로 가만히 머물러 보자 기이한 평온이 찾아왔다. 애써 무언가를 더 채워 넣을 필요도, 억지로 내보일 껍데기를 찾을 이유도 사라진 완벽한 고요. 맑게 갠 그 자리는 결핍의 구덩이가 아니라, 잔물결 하나 없이 맑고 투명하게 가라앉은 깊은 호수와도 같았다.
나를 온전히 비워낸 이 투명한 불성의 바다에 도달해서야,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그 어떤 사회적 타이틀이나 화려한 수식어를 덧붙이지 않아도, 그저 이렇게 고요히 머물러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벅차오르도록 완전하다는 것을. 모든 껍데기를 벗은 영혼 위로 무한한 우주의 에너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온다. 비어 있음(空)이 곧 단 한 톨의 결핍도 없는 가장 압도적인 충만함이라는 기적을 온몸의 세포로 감각한다.
인간의 얄팍한 논리와 이성, 알량한 문법으로는 도무지 닿을 수도, 묘사할 수도 없는 신비로운 다른 차원의 세계. 언어의 길이 완전히 끊어져 버린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절대적인 침묵 속에서, 나는 어떠한 증명도 필요치 않은 온전한 존재가 되어 비로소 가장 생생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나를 온전히 비워낸 이 투명한 불성의 바다에 도달해서야, 나는 아주 기이하고도 맹렬한 박동을 느꼈다. 눈을 감고 호흡 하나에만 의지해 깊은 심연으로 내려가는 일. 이 명상의 시간은 내게 낡은 자아를 허무는 '죽음 연습'이자, 가장 역동적인 생명력을 건져 올리는 '부활의 의식'이다. 밖으로 향하던 모든 소음과 빛이 차단된 이 절대적인 무(無)의 공간에서 비로소 내 안의 거친 숨소리가 깨어난다. 바로 이곳에서 나는, 핏발 선 눈으로 우상을 때려 부수던 전사가 아니라 고요히 가부좌를 틀고 호흡하는 니체를 만난다.
니체가 말한 '거리의 파토스(Pathos der Distanz)'는 단순히 가축화된 무리로서의 타인과 물리적인 거리를 두는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세상의 소음과 길들여진 무리로부터 멀어지는 물리적 고립도 매우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더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거리 두기'는, 끊임없이 요동치며 나를 고통스럽게 옭아매는 이 진흙탕 같은 현실로부터 자신을 완벽하게 분리해 내는 일이다. 즉, 고요하고 불변하는 절대적 평온의 층위로 의식을 단숨에 끌어올리는 초월적인 도약인 것이다.
적어도 잿더미가 된 내 거실 바닥 위에서만큼은 그랬다. 눈을 감고 호흡의 끈을 부여잡으며 내면의 가장 깊은 곳으로 하강하는 불교의 명상 과정은, 곧 니체가 그토록 갈망했던 저 높고 서늘한 곳을 향한 영혼의 위생학, 즉 '거리의 파토스'를 내 삶에 구현해 내는 지극히 사적이고도 독창적인 철학적 행위로 재탄생하고 있었다.
가부좌를 튼 내 몸을 도가니 삼아, 동양의 고요한 관조와 서양의 뜨거운 철학이 기이한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융화되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이완되었던 승모근 위로, 이번에는 내 영혼을 짓누르던 무형의 중력마저 스르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산을 오르며 뼈저리게 깨달았던 니체의 '중력의 영', 즉 세속의 잣대와 엄숙주의가 호흡을 타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과 징글징글한 의무감이라는 딱딱한 껍질들이 일순간 중력을 잃고 허공으로 바스러진다. 가축화된 무리의 잣대와 세속의 번뇌로부터 철저히 단절된 이 절대적인 거리 두기 속에서만 비로소 나는 오염되지 않은 나 자신으로 온전히 호흡할 수 있다.
바로 이 티 없이 맑은 텅 빈 불성의 한가운데서, 내 안의 생명력이 다시금 거칠게 요동치는 것을 감각한다. 누구의 칭찬이나 인정이 없어도 심장은 스스로 힘차게 뛰기 시작했고, 어떤 번듯한 직함이 없어도 나의 폐는 우주의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펄떡이고 있었다. 껍데기가 모두 벗겨진 자리에는, 그저 '살아 숨 쉰다'는 가장 근원적이고 경이로운 생명력만이 오롯이 남아 묵묵히 나를 지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펄떡이는 심장 박동과 깊은 호흡은 단지 육체가 죽지 않았음을 알리는 소극적인 생존의 신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외부의 보상이나 타인의 승인 따위는 필요치 않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맹렬하게 존재하려는 원초적인 갈망이었다. 아무리 척박한 폐허에 내동댕이쳐져도 기어이 호흡을 이어가려는 이 끈질긴 충동. 모든 껍데기가 떨어져 나간 영혼의 밑바닥에서 나는 바로 그 길들여지지 않은 생명력의 본질과 직면했다.
그것은 텅 빈 자궁 속에서 펄떡이며 오직 스스로의 존재를 긍정하려는 거칠고 투박한 생명 에너지, 바로 니체가 말한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의 가장 원초적인 민낯이었다. 타인의 기준에 맞춰 살던 수동적인 내가 죽어버린 바로 그 폐허 위에서, 이 근원적인 불꽃은 마침내 제 모습을 드러내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무거운 중력에 짓눌려 헐떡이던 낡은 나는 완전히 숨을 거두었고, 나는 이 깊은 심연 속에서 길들여지지 않은 생명력 자체를 품은 채 가만히 숨을 쉬고 있었다.
텅 빈 불성의 바다에서 그토록 맹렬하게 꿈틀거리는 원초적인 생명력을 감각하는 순간, 내 영혼은 뜻밖에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치명적인 유혹에 사로잡혔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살고자 하는 이 끈질긴 에너지가 깊은 심연에서 잠을 깨는 것을 느끼자, 차라리 이 완벽한 고요와 안온함을 영원히 붙잡고 싶다는 기이한 갈망이 덮쳐온 것이다.
초기 불경에서 부처는 끊임없이 강조했다.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불길을 남김없이 태워버리라고. 다시는 이 고통스러운 세계로 돌아올 수 없도록 그 불씨와 뿌리조차 완벽하게 소멸시키라고 말이다. 시공간이 지워진 이 텅 빈 우주에 가만히 머물다 보니, 정말로 그 단호한 가르침처럼 나를 세상과 이어주던 이 질긴 고통의 끈들을 모조리 끊어내고 이대로 투명하게 증발해 버리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이곳에는 나를 밑으로 끌어내리며 짓누르던 어떠한 중력도 없다. 굳게 닫힌 아이의 방문 앞에서 소리 죽여 삼켜야 했던 쓰디쓴 눈물도, 내 숨통을 조여오던 늙은 어머니의 집요한 간섭도, 세상에서 내동댕이쳐진 듯한 쓸모를 부정당한 실직의 참담함도, 시도 때도 없이 뒷목을 타고 오르며 몸을 훅훅 달구는 갱년기의 끈적한 열기도 이 텅 빈 우주에서는 한낱 가벼운 먼지처럼 흩어져 무의미해진다. 인간이 겪어야 할 온갖 냄새나고 소란스러운 모든 번뇌와 고통이 완벽하게 소거된 이 청명하고 투명한 절대적 평온의 세계. 그 눈부신 해방감 속에서 나는 묻게 된다.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저 맹목적인 생명력을 따라 다시 눈을 뜨면, 결국 또다시 상처받고 늙어가는 육신을 이끌고 저 질척이고 시끄럽고 냄새나는 아귀다툼의 진흙탕으로 꾸역꾸역 걸어 들어가야 하지 않는가.
왜 쇼펜하우어가 이 맹목적인 '생의 의지'야말로 모든 고통의 뿌리라고 탄식하며 그것을 철저히 부정하려 했는지, 왜 수많은 구도자들이 세상을 등지고 깊은 산속으로 도망쳐 숨으려 했는지, 왜 살고자 하는 본능조차 꺾어버리고 두 번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기를 그토록 열망했는지 비로소 뼛속 깊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모든 껍데기를 비워내고 얻은 이 열반의 환희는, 돌아갈 배를 기어이 불태워버리고 다시는 현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만큼 너무도 거대하고 압도적이었다.
나는 가만히 가부좌를 튼 채, 중력이 사라진 이 아득하고 고요한 심연 속에 조금 더 깊숙이 내 영혼을 웅크렸다. 당장 감았던 눈을 뜨고 저 거실 방문을 열고 나가면, 핏발 선 현실이 또다시 아가리를 벌리고 나를 집어삼키려 들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달콤하고 완벽한 영적 도피처 속에서 아주 조금만 더, 영원처럼 머물고 싶었다. 이 지독한 세상 밖으로 결코 깨어나고 싶지 않은 강렬한 소멸의 유혹이 내 호흡의 끄트머리를 무겁게 잡아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