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그저 고통일 뿐인가:쇼펜하우어의 탄식에서 벗어나기

달콤한 허무의 늪을 박차고 기어이 춤을 추러 가는 길

by 하노이별

1. 투명하게 소멸하고 싶은, 그 치명적인 유혹

가부좌를 튼 다리에 기분 좋은 저릿함이 밀려왔지만, 나는 기어이 눈을 뜨지 않았다. 아니, 뜨고 싶지 않았다. 시공간이 지워진 내면의 텅 빈 우주, 그 완벽하고 투명한 평온의 층위는 너무나도 달콤하고 치명적인 은신처였다.

이 완벽한 고요를 깨고 거실 방문을 여는 순간, 또다시 날 선 현실이 나를 집어삼키려 들 게 뻔하니까. 굳게 닫힌 아이의 방문 앞에서 서성이며 삼켜야 할 뼈저린 무력감, 시시각각 내 숨통을 조여오는 어머니의 집요한 간섭과 낡은 원망들, 하루아침에 명함이 찢겨 나가며 맛봐야 했던 실직의 수모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훅훅 끼쳐오며 내 육체를 농락하는 갱년기의 열기까지. 인간이 겪어야 할 이 지독한 번뇌와 고통이 완벽하게 소거된 이 고요한 무균실에서 나는 생각했다. 아, 이대로 모든 스위치를 꺼버리고 영원히 투명하게 소멸해 버릴 수만 있다면.

살고자 하는 맹렬한 의지조차 불태워버리고, 두 번 다시 이 지독한 세상에 눈뜨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나도 강렬한 도피의 충동이었다.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이 서늘한 체념을 가리켜 '의지의 부정'이라 불렀다. 서양 철학사에서 가장 우아한 허무주의자가 파놓은 그 깊은 늪 속으로, 거실 명상 방석 위에 앉은 나는 어느새 푹 빠져들고 있었다


2. 쇼펜하우어의 안경으로 바라본 징글징글한 현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가장 밑바닥의 힘을 가리켜 생의 의지(Wille zum Leben)라고 불렀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사실 이는 아주 원초적이고 맹목적인 생존 본능이다. 배가 고프면 꾸역꾸역 밥을 밀어 넣어야 하고, 피곤하면 쓰러져 자야 하는 것처럼, 내 이성이나 고상한 목적과는 상관없이 그저 살고자 발버둥 치는 끈질긴 생물학적 충동 말이다. 그는 인간이 이 눈먼 의지들의 명령을 수행하는 불쌍한 하수인에 불과하다고 단언했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는 가지지 못해 고통스럽고, 막상 그것을 손에 쥐고 나면 금세 시들해져 지독한 권태에 빠져버린다. 대학 입학만 하면, 취직만 하면, 승진만 하면, 결혼만 하면, 번듯한 내 집만 마련하면 마냥 행복할 줄 알았는데 막상 이루고 나면 금세 허무해져 또 다른 결핍을 찾아 헤매는 우리의 일상처럼 말이다. 온라인 장바구니에 담아둔 물건을 결제하기 전까지는 그것만 가지면 완벽해질 것 같아 밤잠을 설치다가도, 막상 택배 박스를 뜯고 며칠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시들해져 방구석에 처박아두는 얄팍한 마음. 간절한 갈망이 채워지는 순간 이내 지루한 권태로 얼굴을 바꾸는 이런 쩨쩨한 일상의 반복을 우리는 수도 없이 겪으며 살아간다.


그래서 인생은 결국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에 불과하다는 지독하게 냉소적이지만 묘하게 설득력 있는 그의 통찰을 빌려 내 삶의 궤적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내가 그토록 핏대를 세우며 괴로워했던 일상의 비극들이 아주 건조하고 허무한 우주의 촌극으로 전락해 버렸다.


내 속을 찢어놓는 아이의 거친 반항과 닫힌 방문조차, 결국은 부모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스스로 생존하고 번식하려는 자연의 맹목적인 생의 의지가 발현되는 거친 파열음일 뿐이었다. 나를 옭아매는 어머니의 집요한 간섭 역시, 늙고 쇠락해 가는 자신의 생존을 딸이라는 동아줄에 기어이 매달아 연장해 보려는 서글프고도 본능적인 발버둥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내 몸을 통째로 불태울 듯 덮쳐오는 갱년기의 열병과, 하루아침에 책상을 빼야 했던 실직의 뼈아픈 수모조차 이 건조한 렌즈 앞에서는 다르게 해석되었다. 평생토록 종족 보존이라는 거대한 자연의 목적을 위해 봉사했던 나의 육체는, 이제 그 생물학적 쓸모를 다하자 가차 없이 호르몬의 스위치가 꺼지며 생태계의 폐기 수순을 밟고 있는 것이다. 실직 또한 마찬가지였다. 회사의 이윤 창출이라는 거대한 생존 기계 속에서 내 노동력이 늙고 쓸모를 잃자, 미련 없이 부속품을 교체하듯 나를 밀어낸 결과일 뿐이었다.


우리는 각자 대단한 의미와 고유한 서사를 품고 살아가는 것 같지만, 쇼펜하우어의 눈에 비친 인간은 그저 보이지 않는 맹목적 생존 의지에 조종당하며 춤을 추다가 쓸모가 다하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불쌍한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결핍되면 고통스럽고, 채워지면 금세 권태로워지는 이 무의미한 쳇바퀴. 기어이 살아가야 할 아무런 목적도, 거창한 이유도 없이 그저 맹목적으로 살려고 발버둥 치는 이 끔찍한 생존의 본능 앞에서, 삶은 그저 본질적인 고통의 바다일 뿐이라는 쇼펜하우어의 탄식은 잿더미가 된 내 영혼에 아주 차갑고도 매혹적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3. 의지의 부정, 허무주의라는 가장 우아한 함정

생의 맹목적인 폭력성을 철저하게 해부한 쇼펜하우어가 내린 마지막 처방전은 너무나도 명쾌하고 단호했다. 모든 고통의 원인이 끝없이 무언가를 갈구하는 끈질긴 생의 의지 때문이라면, 그 의지 자체를 완벽하게 부정하고 굶겨 죽이라는 것이다. 타인과 얽히며 발생하는 모든 욕망을 차단하고, 철저한 금욕과 체념을 통해 삶의 시계추를 강제로 멈춰 세우는 것. 그것만이 이 지옥 같은 현실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영원한 고요의 심연으로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이라고 그는 선언했다.


이 우아하고도 완벽한 허무주의의 처방전은, 내가 명상 방석 위에서 경험했던 저 치명적인 소멸의 유혹과 소름 끼치도록 완벽하게 일치했다. 굳게 닫힌 아이의 방문 앞을 서성이며 피눈물을 흘리느니, 늙어가는 어머니의 집착에 질식당하며 서로의 살점을 뜯어먹느니, 차라리 그 모든 관계의 끈을 가위로 싹둑 잘라버리고 이 아득한 무의 공간으로 영원히 숨어버리는 편이 낫지 않은가. 내 안의 욕망과 기대라는 불씨를 남김없이 짓밟아 끄고,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희망도 없는 절대 영도의 세계로 침잠하는 것. 쇼펜하우어의 말대로 그것은 상처받고 너덜너덜해진 영혼에게 허락된 가장 달콤하고 완벽한 진통제이자, 더 이상 세상의 어떤 고통도 침범할 수 없는 무적의 요새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가 쌓아 올린 거대한 체념의 요새 안에서 가만히 숨을 죽였다. 바깥세상의 아귀다툼이 아득한 백색소음처럼 멀어졌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니 아무런 고통도 없었다. 쇼펜하우어가 도달한 구원의 정점은 이토록 평화롭고 거룩하며, 결점 하나 없이 완벽했다.


하지만 그 먼지 한 톨 없는 텅 빈 고요 속에 오래 머물다 보니, 어느 순간 등골을 타고 기이한 한기가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고통의 박동이 멈춘 그곳에는 내 안에서 펄떡이던 삶의 맹렬한 생명력마저 함께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 심장을 멈춰버린 자의 평온. 그것은 살아 숨 쉬는 숲의 생기가 아니라, 진공 유리관 속에 화려하게 전시된 박제된 새의 윤기처럼 기괴하고 차가운 가짜 평온이었다. 생의 의지를 부정한다는 것은 결국, 고통을 없애기 위해 내 안에서 요동치는 원초적인 창조의 불씨마저 잿더미 속에 영원히 파묻어버리는 완벽한 자기 파괴를 의미했다.


박제된 평화 속에서 나는 서서히 숨이 막혀왔다. 그리고 잿더미가 된 내 영혼의 밑바닥을 향해, 아니, 나를 짓누르는 이 세계 전체를 향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 삶의 생명력마저 거세해 버린 이 창백한 허무가 진정 인간이 도달해야 할 궁극의 구원인가? 진흙탕에 발을 담그지 않고 박제된 허공에 떠 있는 무균실의 평온은, 그저 상처받기 두려워 생의 무게를 내팽개치고 도망친 자의 비겁한 도피처가 아닌가? 눈물과 번뇌로 들끓는 이 소란스러운 삶의 한복판에서, 온몸에 진흙을 묻히고 상처를 끌어안고도 기어이 눈부신 춤을 출 수 있는 뜨거운 긍정의 길은 정말로 없는 것일까?


4. 니체의 사자후, 허무의 늪을 뚫고 솟구치는 '힘에의 의지'

박제된 새처럼 굳어가는 내 영혼에 균열을 낸 것은, 역설적이게도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제자이자 가장 맹렬한 반항아였던 니체의 사자후였다. 니체는 스승이 파놓은 이 달콤하고도 기괴한 허무주의의 늪을 향해 잔인할 만큼 무거운 망치를 내리쳤다. 고통스럽기 때문에 삶을 부정하고 도망칠 것인가?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고통이 피할 수 없는 삶의 본질이라면, 그 고통마저 기꺼이 긍정하고 나를 빚어내는 뜨거운 질료로 삼아버리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명상 방석 위에서 모든 껍데기를 비워냈을 때, 내 깊은 심연에서 요동치던 그 기이하고도 맹렬한 박동을 떠올려 보았다. 쇼펜하우어의 창백한 렌즈로 보았을 때 그것은 그저 죽지 못해 연명하려는 비루한 생존 의지에 불과했다. 하지만 고통을 뚫고 기어이 맥박 치던 그 펄떡임의 진짜 이름은 생존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무리 척박한 폐허에 내동댕이쳐져도, 시련과 상처를 딛고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극복하며 더 거대하게 팽창하려는 원초적인 갈망이었다.


니체는 이것을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라 불렀다. 나를 갉아먹는 아이의 방황도, 늙어가는 어머니의 집착도, 차갑게 내쳐진 실직의 절망도, 내 몸을 불태우는 갱년기의 쇠락도 더 이상 도망쳐야 할 끔찍한 저주가 아니었다. 그것은 낡은 나를 파괴하고 더 단단하고 깊어진 새로운 나를 창조해 내기 위해 필연적으로 마주해야만 하는 시련이자, 내 영혼의 근육을 찢고 단련시키는 가장 훌륭한 저항 운동이었다.


니체는 인간의 영혼에 진정한 깊이와 고귀함을 부여하는 것은 오직 가혹한 고통뿐이라고 믿었다. 불행을 회피하려 발버둥 치는 대신 그 고통의 심연 한가운데로 기꺼이 걸어 들어갈 때에만 인간은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고통이란 무의미하고 억울한 형벌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투박한 돌덩이를 깎아내어 위대한 예술품으로 완성하기 위해 기꺼이 감내해야 할 정과 망치질이었다.


"나를 파괴하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다"라는 그의 오만한 사자후 앞에서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과연 그럴까. 그러나 이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살점이 찢기고 부서지는 아픔 없이는 결코 새로운 나를 빚어낼 수 없음을, 내 삶을 할퀴고 간 그 모든 절망들이 결국 내 생명력의 외연을 거대하게 확장시키는 맹렬한 에너지원이었음을, 나는 그제야 아주 조심스럽게 더듬어 깨달아가고 있었다.


고통이 사라진 무균실에서는 결코 생명력이 자랄 수 없다. 거센 비바람과 진흙탕 속에서 뒹굴고 상처 입을 때에야 비로소, 생명은 그 상처를 뚫고 더 질기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법이다.


그러나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단지 시련을 악착같이 버텨내어 꽃을 피우는 독한 생존력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고통마저도 삶의 찬란한 일부로 기꺼이 끌어안는 일이다. 내게 주어진 이 징글징글한 운명과 온몸으로 부딪치며, 핏빛처럼 붉은 라틴댄스를 기어이 추고야 마는 '무한한 긍정'의 폭발이다. 살점이 찢기고 부서지는 아픔을 통과한 뒤에 찾아오는 이 압도적인 환희 앞에서는 절망도, 쇠락도 더 이상 나를 짓누르지 못한다. 고통의 심연 속에서 기어이 웃음을 터뜨리며 내 삶 전체를 향해 '성스러운 예스(Yes)!'를 던지는 것. 이것이야말로 비로소 낡은 나를 허물고 새로운 나를 잉태하는 진짜 에너지였다.


5. 진흙탕을 긍정하라, 기어이 춤을 추러 가는 길

하지만 깨달음이 곧바로 현실을 마주할 용기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텅 빈 심연 속에서 니체의 거친 긍정을 온몸으로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이 안전하고 고요한 내면의 우주를 깨고 나가려니 본능적인 두려움이 앞섰다. 저 감은 눈꺼풀 너머에는 여전히 나를 베일 듯 벼려진 현실의 칼날들이 도사리고 있지 않은가. 쇼펜하우어가 건넨 체념이라는 달콤한 수면제를 입술 끝에 댄 채, 나는 한참을 망설이며 숨을 골랐다.


그러나 텅 빈 불성 안에서 펄떡이기 시작한 야생의 맥박은 더 이상 메마른 평온에 만족하지 못했다. 고통을 회피하여 얻은 안전은 결국 생명의 죽음을 담보로 한 가짜 평화임을 내 온몸의 세포가 알아차린 것이다. 상처받지 않는 완벽한 평온은 묘지에 누운 자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었다. 나는 살아있으므로, 살아서 맹렬하게 숨 쉬고 있으므로, 이 달콤한 마취에서 스스로 깨어나야만 했다.


나는 기어이 쇼펜하우어의 수면제를 과감히 뱉어낸다. 그리고 도망쳐 숨어들었던 이 아득하고 텅 빈 우주에서, 천천히 그러나 결연하게 감았던 두 눈을 뜬다. 시공간이 지워진 완벽한 평온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잿더미가 된 내 비루한 거실 바닥으로 다시 의식을 곤두박질치게 내버려 둔다.


눈앞에는 어김없이 핏발 선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아이의 방문은 굳게 닫혀 싸늘한 냉기를 뿜어내고, 내 몸은 언제 끝날지 모를 갱년기의 열병으로 다시 훅훅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질긴 현실의 한복판에 다시 던져진 나는 더 이상 어제의 겁먹고 허덕이던 내가 아니다. 내 안에는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껴안으며, 내게 주어진 이 지독한 운명을 기어이 사랑하겠다(Amor Fati)고 포효하는 거친 야생의 에너지가 펄떡이고 있기 때문이다.


기꺼이 이 진흙탕 속으로 걸어 들어가 온몸에 오물을 묻히고 상처 입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를 꽉 깨물고 버티는 비장함이 아니라, 발을 구르며 튀어 오르는 진흙물마저 내 삶의 눈부신 무늬로 긍정해 버리는 벅찬 환희를 품고서 말이다. 그것이 허무주의의 창백한 요새를 웃으며 부수고 나온 자가 내딛는 초인(Übermensch)을 향한 첫걸음이자, 훗날 텅 빈 깨달음을 얻고도 기어이 고통받는 중생들의 곁으로 돌아오는 보살(菩薩)의 거대한 자비와 맞닿아 있는 가장 위대한 삶의 긍정이기 때문이다.


가부좌를 풀자 뻐근한 승모근에 다시금 묵직한 중력이 내려앉는다. 나는 무릎을 짚고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일어선다. 상처와 고통으로 얼룩진 내 삶의 무대 위에서, 기어이 가장 눈부시고 역동적인 초긍정의 춤을 추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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