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으로 도망친 자들의 가짜 평온: 소승불교의 한계

기꺼이 진흙탕으로 돌아온 자, 보살의 눈부신 탄생

by 하노이별

1. 거룩한 도피처, 초기 불교에 도사린 쇼펜하우어의 그림자


앞서 살펴본 쇼펜하우어의 창백한 허무주의가 고통을 피하고자 삶 자체를 부정해 버리는 서양 철학의 함정이었다면, 놀랍게도 동양의 불교 안에도 그와 똑 닮은 거룩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쇼펜하우어의 체념이 내 이성을 마비시키는 철학적 도피처였다면, 수천 년 전 먼 옛날 인도의 흙먼지 속에서 발원한 초기 불교의 명징한 수행법은 내 육신과 감각마저 완벽하게 세상과 단절시키는 또 다른 형태의 유혹이었다. 이 지독하고도 매혹적인 단절의 한계를 들여다보기 위해, 나는 다시 거실의 명상 방석 위로 시선을 돌려본다.


방석 위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닫는 순간, 이 비루하고 좁은 거실은 일순간 눈보라가 몰아치는 고요한 히말라야의 깊은 산속 동굴로 변모했다.


피를 나눈 죄로 서로의 영혼을 갉아먹어야 하는 아이와의 지독한 숨바꼭질도, 끊어지지 않는 질긴 탯줄처럼 내 숨통을 옥죄어오는 어머니의 낡은 원망도 이 깊은 산속 동굴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세상의 잣대에 평가받고 가차 없이 버려지는 밥벌이의 잔혹함도, 늙고 쇠락해 가는 육체가 뿜어내는 호르몬의 시끄러운 아우성조차 이 절대적인 단절의 공간에는 결코 틈입할 수 없었다.


이토록 쉽고 완벽한 단절이 주는 안온함은 너무도 달콤했다. 찰나의 평온에 취한 나는, 이대로 낡은 육신의 껍데기마저 산산이 부서져 영원히 세상과 인연을 끊는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고 싶다는 옛 수행자들의 그 지독한 열망에 뼛속 깊이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2. 윤회의 사슬을 끊어라, 아라한(阿羅漢)의 단호한 목표


소승불교, 즉 초기 불교가 도달하고자 했던 궁극의 이상향은 아라한(阿羅漢)이었다. 아라한이란 내면의 모든 번뇌와 탐욕의 불씨를 남김없이 꺼뜨려, 두 번 다시 이 고통스러운 세계로 태어나지 않을 자격을 얻은 자를 뜻한다. 그들의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목표는 단 하나, 끔찍한 생로병사가 무한히 반복되는 이 윤회(輪廻)의 사슬을 영원히 끊어내는 것이었다.


아라한의 냉철하고도 결연한 시선으로 내 삶의 궤적을 굽어보았다. 그러자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현상계가 얼마나 끔찍하고 질긴 감옥인지가 너무도 투명하게 다가왔다.


두 번 다시 누군가의 헌신적인 엄마로, 혹은 누군가의 억울한 딸로 태어나 전생의 빚을 갚듯 서로의 살점을 뜯어먹는 이 징글징글한 인연의 쳇바퀴를 돌리고 싶지 않았다. 쓸모를 증명하려 발버둥 치다 하루아침에 내동댕이쳐지는 생존의 트랙 위로, 호르몬의 장난질에 속수무책으로 농락당하며 늙어가는 이 비루한 가죽 부대 속으로 다시는 윤회하고 싶지 않았다. 태어남 자체가 고통의 시작이라면, 깨달음을 통해 이 지독한 업보의 굴레를 끊고 영원한 소멸의 길로 접어드는 것만이 유일한 해방일 터였다.


초기 불교의 수행자들에게 현상계란 그저 더럽고 냄새나며, 하루빨리 불태워 없애고 도망쳐야 할 거대한 불타는 집(화택, 火宅)에 불과했다. 세상의 모든 인연을 끊어내고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 오직 자기 자신만의 완벽한 해탈을 구하려 했던 그들의 결벽에 가까운 출리(出離, 세속을 벗어남)의 욕망. 매일같이 상처받고 피 흘리던 이 거실 한복판에서, 그 욕망은 내게 너무도 매혹적인 구원의 동아줄처럼 다가왔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체념보다 훨씬 더 치밀한 종교적인 구원이었다


3. 무균실의 평온, 그것은 위대한 해탈인가 이기적인 도피인가


완벽하게 차단된 명상 방석 위에서 나는 한동안 그 투명하고도 결백한 평온을 누렸다.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관계의 얽힘도 없는 무풍지대. 그러나 얄궂게도 그 투명한 진공상태에 미세한 균열을 낸 것은, 아주 작고 일상적인 파찰음이었다. 굳게 닫혀 있던 아이의 방문 너머로 새어 나온 무거운 한숨 소리, 거실 바닥을 끌며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늙은 어머니의 마른기침. 또 잇몸이 말썽이니 늦지 않게 오라는 치과 알람 소리나, 밥그릇을 채워달라며 명상 중인 내 무릎에 얼굴을 비비는 고양이의 칭얼거림 같은 것들.


그 미세한 소음들이 귓가를 스치는 순간, 나만의 견고했던 히말라야는 허망하게 흔들렸다. 애써 눈을 꽉 감고 귀를 막아보았지만, 내 살갗에 닿는 작은 생명의 온기와 귓가를 파고드는 징글징글한 현실의 아우성마저 지워낼 수는 없었다. 나 혼자 이 지독한 인연을 끊어내겠다고 등 돌리고 앉아 지켜낸 이 차가운 고요함이 과연 진짜일까. 억지로 짜맞춘 듯한 무균실의 평화 속에서 길을 잃고 한참을 서성이던 그때, 벼락같은 자각이 뇌리를 쳤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아야만 간신히 유지되는 평온. 진흙탕에 발을 담그지 않아야만 지켜지는 깨끗함이라면, 그것은 진흙을 정화하는 진정한 맑음이 아니라 단지 오물을 피해 도망친 자의 비겁한 무균실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소승불교가 추구했던 아라한의 차디찬 해탈은 내 삶의 궤적 앞에서 뼈아픈 모순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 혼자 이 지독한 업보의 굴레를 끊고 저 고요하고 완전한 열반의 세계로 영영 날아가 버린다면, 이 소란스러운 현상계에 여전히 남겨진 이들은 대체 어떻게 되는가. 닫힌 방문 안에서 홀로 생의 무게를 감당하며 웅크린 내 아이와, 늙고 쇠락해 가는 육체의 두려움 속에서 나를 붙잡고 늘어지는 나의 어머니. 그들이 여전히 저 거친 생로병사의 바다에서 허우적대고 있는데, 나 홀로 윤회의 사슬을 끊어냈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것이 부처가 말한 궁극의 자비(慈悲)일 수 있단 말인가.


반백 년을 짊어지고 온 '나'라는 에고(Ego)가 허물어진 텅 빈 불성(佛性)의 자리. 역설적이게도 그 텅 빈 공간에는 나와 타인을 가르는 경계조차 없었기에, 방문 너머 아이의 무거운 한숨과 어머니의 마른기침 소리는 고스란히 '나 자신의 고통'으로 공명하기 시작했다. 나 홀로 윤회의 사슬을 끊어내려 했던 그 고요함은, 해탈이라는 이름으로 거룩하게 포장된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영적 도피에 지나지 않았음을 비로소 깨달았다.그 얄팍한 안온함을 뚫고 속절없이 흘러넘치기 시작한 타인을 향한 이 뜨거운 연민. 그것이 바로 내 안에서 잉태된, 보살의 맹렬한 자비(慈悲)라는 씨앗이었다.


혼자 깨달음을 얻어 깊은 산속 동굴로 숨어버린 수행자의 고요함은, 아비규환의 시장통 속에서 매일같이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가는 중생들에게는 단 한 줌의 위로도, 구원도 되지 못한다. 진흙탕이 두려워 흠결 없는 허공으로 도망친 자의 가짜 평온. 이 차가운 깨달음의 한계를 직시하자, 잿더미 같던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반역의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4. 대승불교의 반역, 연꽃은 허공이 아니라 진흙 속에서 핀다


나 혼자만의 결백하고 무결한 평온에 머물기를 거부하며 내면에서 들끓기 시작한 이 반역의 불씨는, 수천 년 전 아득한 옛 인도 땅에서 일어났던 거대한 불교적 혁명과 그 맥락을 정확히 같이하고 있었다. 오직 자기 자신의 해탈만을 구하며 산속으로 숨어버린 자들을 향해, 후대의 치열한 구도자들은 그것을 혼자만 타고 도망치는 작은 수레, 즉 소승(小乘)이라 매섭게 비판하며 새로운 깃발을 치켜들었다. 중생들의 아우성이 들끓는 고통의 바다를 다 함께 건너겠다는 거대한 수레, 대승(大乘) 불교의 눈부신 등장이다.


대승의 구도자들은 산속의 고요한 절대계와 시장통의 시끄러운 현상계를 나누던 그 냉혹한 이분법을 무참히 박살 냈다. 그들이 던진 진리는 너무도 역설적이고 웅장했다. 번뇌가 곧 깨달음(번뇌즉보리, 煩惱卽菩提)이요, 이 지독한 생사윤회의 아비규환이 펄떡이는 그 자리가 곧 열반(생사즉열반, 生死卽涅槃)이라는 선언. 참된 평온이란 속세를 등지고 저 높고 맑은 허공에 박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악취가 진동하고 오물이 튀는 현실의 한복판에 두 발을 푹 담그고서 기어이 피워내는 연꽃과 같다는 것이다.


연꽃은 흠결 없이 깨끗하고 투명한 물에서는 결코 자라지 못한다. 가장 탁하고 더러운 진흙탕 속에 굵은 뿌리를 내리고, 오히려 그 끈적한 오물들을 맹렬하게 빨아들여 생명의 질료로 삼을 때 비로소 세상에서 가장 맑고 향기로운 꽃잎을 틔워낼 수 있다. 오염된 세상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오염을 정면으로 끌어안고 관통해 낼 때 진정한 초월이 완성된다는 이 묵직한 가르침은 닫혀 있던 내 영혼의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다.


그 뜨거운 진리 앞에서 나의 거실을 다시 바라보았다. 굳게 닫힌 아이의 방문 너머로 고여 있는 싸늘한 단절, 나를 옥죄는 어머니의 낡은 집착과 원망, 명함이 찢겨나간 실직의 참담함,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훅훅 치밀어 오르며 나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이 지긋지긋한 갱년기의 열병. 내가 그토록 몸서리치며 도망치고 싶어 했던 이 비루한 일상의 고통들이야말로, 내 영혼이 가장 깊고 단단하게 뿌리를 내려야만 하는 끈적하고 비옥한 진흙탕이었다. 피눈물 나는 이 번뇌들을 불태워 땔감으로 삼지 않고서는, 어떤 위대한 영혼의 도약도 연꽃처럼 피어날 수 없음을 나는 텅 빈 방석 위에서 뼈저리게 자각하고 있었다.


5. 아비규환의 거실로 돌아오다, 눈부신 보살의 탄생


마침내 대승불교의 가장 눈부시고 숭고한 정신인 보살(菩薩)의 거대한 서원이 내 심장을 거세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보살은 이미 번뇌를 끊고 완벽한 깨달음을 얻어 저 고요한 열반(Nirvana)으로 들어갈 자격을 완벽히 갖춘 자다. 윤회의 사슬을 끊고 두 번 다시 이 고통스러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아도 되는 그 영광스러운 절대 평온의 티켓을 손에 쥐고서도, 그는 기어이 발걸음을 돌려 아비규환의 진흙탕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온다.


자신은 이미 번뇌를 끊어냈지만, 저 거칠고 잔인한 세상에서 상처받고 신음하는 모든 존재들을 향한 뜨거운 연민이 그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지옥이 텅 비기 전까지는 결코 스스로 성불(成佛)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의 맹렬한 서원처럼 말이다.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할 수만 있다면 이승의 끈적한 진흙탕을 넘어 가장 참혹한 지옥의 밑바닥까지도 기꺼이 걸어 내려가겠다는 그 압도적인 다짐. 단 한 명의 생명이라도 고통받고 있다면 기꺼이 자신의 영원한 안식을 포기하고 생로병사의 윤회 속으로 기어이 다시 태어나는 거대한 자비(慈悲). 온몸으로 타인의 고통을 껴안는 보살의 이 숭고한 사랑 앞에서, 나 홀로 도망쳐 누렸던 방석 위에서의 얄팍한 평온은 여지없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니체의 뜨거운 망치와 대승불교의 거대한 수레가 내 몸이라는 작은 도가니 속에서 완벽하게 하나로 포개어진다.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운명을 기어이 사랑하겠다며 진흙탕 속에서 춤을 추는 자가 니체의 초인이라면, 타인의 고통을 껴안기 위해 기꺼이 맑은 허공을 버리고 진흙탕으로 스스로 뛰어드는 자가 불교의 보살이다. 생을 향한 맹렬한 힘에의 의지와 타인을 향한 한없는 자비심이, 잿더미 같던 내 영혼의 밑바닥에서 거대한 불기둥처럼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가만히 눈을 뜬다. 나만의 안전한 도피처였던 서늘한 히말라야의 동굴은 일순간 사라지고, 다시금 낡은 소파와 먼지 앉은 탁자가 있는 비루한 일상의 거실이 내 눈앞에 펼쳐진다. 가부좌를 풀자마자 뻐근한 승모근 위로 징글징글한 삶의 중력이 다시 훅 내려앉는다. 몸을 덮쳐오는 갱년기의 불쾌한 열기도, 여전히 굳게 닫혀 있는 아이의 방문도, 나를 옭아매는 어머니와의 낡은 인연도 어제와 하나도 다를 바 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텅 빈 우주를 통과하고 돌아온 나는 이제 도망치려 발버둥 치는 겁먹은 짐승이 아니다. 나는 이 아수라장 같은 거실을 혐오스러운 감옥이 아니라, 내 영혼의 가장 눈부신 연꽃을 피워낼 비옥한 진흙탕으로 온전히 끌어안는다. 고통 속으로 기꺼이 몸을 던지는 보살의 숭고함과, 상처투성이의 삶을 긍정하는 초인의 야성으로 무장한 채, 나는 방석을 털고 단호하게 두 발을 딛고 일어선다. 다시, 이 눈물 나도록 뜨겁고 지독한 삶의 한복판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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