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규환의 시장통에서 초인과 보살이 마주치다

진흙탕 속에서 기어이 춤을 추는 두 위대한 영혼

by 하노이별

1. 위대한 영혼들은 왜 산을 내려왔는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산속에서 10년의 고독을 누린 뒤, 마침내 충만한 지혜를 안고서 흙먼지 날리는 인간들의 세상으로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깨달음의 과정을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한 불교 선종의 십우도(十牛圖) 역시 마찬가지다. 그 마지막 열 번째 그림은 박제된 고요함에 머물지 않고, 거친 자루를 메고 아비규환의 저잣거리로 기꺼이 손을 내밀고 들어가는 입전수수(入廛垂手)의 맹렬한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왜 이 위대한 영혼들은 그토록 맑고 고요한 절대계의 평온을 버리고, 굳이 시끄럽고 냄새나는 현상계의 한복판으로 다시 걸어 내려와야만 했을까. 명상 방석 위에서 나 혼자만의 텅 빈 우주를 유영하며 달콤한 소멸을 꿈꿨던 나는 그 묵직한 질문 앞에서 비로소 깨달았다. 나를 살리고 타인을 끌어안는 나의 깨달음 역시, 결국 이 징글징글한 일상의 한복판에서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그 거룩하고도 비겁했던 나만의 산에서 내려와 굳게 닫힌 방문을 열어야 할 시간이었다.


2. 가짜 평온의 묘지를 짓부수다

쇼펜하우어가 권유했던 금욕의 무균실, 그리고 소승불교의 아라한이 머물려 했던 산속의 동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삶의 맹렬한 의지마저 차갑게 식혀버린 그곳은 완벽하게 안전했지만, 동시에 지독하게 생기가 없었다. 그것은 번뇌와 고통을 정면으로 돌파하여 얻어낸 진정한 맑음이 아니었다. 끈적한 진흙탕이 두려워 흠결 없는 허공으로 도망친 자들이 만들어낸, 생명력이 거세된 박제된 평화에 불과했다.


방문만 걸어 잠그면, 혹은 눈을 감고 귀를 막기만 하면 얼마든지 도달할 수 있었던 서늘한 진공상태. 나는 이제 안다. 나를 찌르는 고통과 징글징글한 관계의 얽힘을 완벽하게 차단한 채 얻어낸 그 알량한 평온이란, 방문을 열고 일상과 부딪히는 순간 여지없이 박살 나버리는 얄팍한 유리성이라는 것을. 살아서 펄떡이는 생명의 역동성을 담보로 지불하고 얻어낸 그 거대한 무풍지대는, 결국 상처받기 두려워 스스로를 가둬버린 '가짜 평온의 묘지'였음을 말이다.


묘지에 누운 자는 결코 다치거나 늙어감에 고통받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아직 살아 숨 쉬고 있으며, 내 안에서는 기어이 이 척박한 생을 극복하고 나아가려는 원초적인 창조의 불씨가 뜨겁게 요동치고 있다. 나는 상처받지 않는 죽은 자의 평온을 과감히 거부하고, 피가 돌고 맥박이 뛰는 산 자의 고통을 기꺼이 선택하기로 한다.


3. 아비규환의 시장통, 나의 거실

굳게 닫혀 있던 명상방의 문고리를 돌려 현실로 나선다. 발을 내딛는 순간, 시공간이 지워졌던 텅 빈 우주는 허망하게 사라지고 어김없이 핏발 선 현실의 아귀다툼이 왈칵 쏟아져 들어온다. 위대한 철학자와 구도자들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그 치열한 시장통, 냄새나는 저잣거리는 결코 멀리 있지 않았다. 지금 내가 두 발을 딛고 선 이 비루한 일상, 나의 좁은 거실이 바로 그곳이었다.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낡은 소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굳게 닫혀 서늘한 냉기를 뿜어내는 아이의 방문. 늙고 병들어가는 두려움을 호소하며 쉴 새 없이 울려대는 어머니의 전화벨 소리. 이름도 명함도 없이 덩그러니 내던져진 실직의 아득한 공허함.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훅 치밀어 오르며 내 육체를 가차 없이 불태우는 갱년기의 지독한 열병까지.


온갖 이기심과 상처, 생존을 향한 맹목적인 본능과 낡은 원망들이 뒤엉켜 아귀다툼을 벌이는 내 삶의 한복판.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기어이 살아가야만 하는 이곳이야말로 가장 치열하고 날것 그대로인 맥박 치는 소란이자, 끈적한 일상의 수렁이다.


4. 시장통 한가운데서 초인과 보살이 마주치다

나는 이 아비규환의 진흙탕 한가운데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다. 발바닥에 닿는 거실 장판의 서늘한 촉감은 내가 더 이상 상처받지 않으려고 눈을 감고 귀를 막았던 어제의 비겁한 도망자가 아님을 선언한다. 이 아수라장 같은 일상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 나의 내면은 지금, 인류 사상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경이로운 두 거인이 벼락처럼 마주치는 거대한 용광로가 되고 있다.


저 멀리 서양의 험준한 산맥을 넘어온 한 거인이 있다. 그는 낡고 병든 도덕을 박살 내는 창조의 망치를 쥐고 있다. 삶이 내동댕이치는 끔찍한 고통과 허무 앞에서도 "이것이 삶이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 하고 포효하며,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운명마저 맹렬하게 사랑하려는 자. 바로 니체의 초인(Übermensch)이다.


그리고 동양의 아득한 흙먼지를 뚫고 다가온 또 다른 거인이 있다. 그는 흠결 없는 완벽한 깨달음의 영광을 스스로 찢어버린 자다. "네가 여전히 아파서 울고 있는데, 나 혼자 어찌 저 맑고 차가운 허공으로 도망치겠는가." 징글징글한 생로병사의 지옥불 속으로 기꺼이 두 발을 들이밀며, 고통받는 모든 존재의 어깨를 끌어안는 자. 바로 압도적인 자비의 보살(菩薩)이다.


결코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던 이 두 위대한 영혼은, 깨끗한 산속 동굴이 아니라 온갖 냄새와 상처가 뒤엉킨, 비명 섞인 생의 찬가가 울려 퍼지는 시장통, 바로 나의 이 비루한 거실 한가운데서 마침내 마주 섰다.


서양의 뜨거운 망치와 동양의 서늘한 자비가 충돌하는 순간, 나는 텅 빈 방석 위에서 벅찬 전율을 느꼈다. 이 둘의 얼굴이 결국 하나였기 때문이다. 내게 주어진 이 지독한 운명을 도망치지 않고 온몸으로 껴안겠다는 초인의 거친 운명애(Amor Fati)와, 타인의 고통을 짊어지고 이 진흙탕에서 기어이 함께 뒹굴겠다는 보살의 거대한 서원은 결국 같은 이름이었다. 그것은 이 상처투성이의 세상을 단 한 톨의 회피 없이 온전히 껴안고 긍정하겠다는, 생을 향한 가장 위대하고도 눈부신 절대 긍정의 교집합이었다.


초인과 보살이 내 안에서 하나로 포개어진 순간, 피를 흘리면서도 기어이 살아내야만 했던 나의 비루한 거실은 더 이상 도망쳐야 할 늪이 아니었다. 그곳은 두 거인이 손을 맞잡고 상처투성이의 발로 기어이 찬란한 춤을 추기 시작하는, 내 생애 가장 비장하고 거룩한 성소가 되어가고 있었다.


5. 잿더미 위에서 벼려낸 두 개의 칼날: 초인의 긍정과 보살의 실천

가부좌를 풀고 일어선 거실 바닥에는 여전히 내가 며칠 전 미친 듯이 휘둘렀던 망치질의 잔해들이 날카롭게 흩어져 있었다. '좋은 엄마'와 '착한 딸'이라는 낡은 우상을 부수고 난 뒤 마주했던 그 지독한 잿더미. 나는 그 폐허가 주는 이름 없는 허무를 견디지 못해 텅 빈 우주로 도망쳤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모든 껍데기가 타버린 이 서늘한 잿더미를 결코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참담한 폐허야말로 나를 빚어낸 찬란한 과거였음을 있는 그대로 무한히 긍정(Amor Fati)하며 온전히 끌어안는다. 초인은 무거운 과거에 짓눌려 우는 자가 아니다. 폐허가 된 자신의 흑역사조차 삶의 눈부신 일부로 수용하고, 그 위를 깃털처럼 가볍게 도약하며 새로운 창조의 춤을 추는 자다.


이 초인의 가벼운 스텝 위로, 징글징글한 세상 속에 뛰어든 보살의 거대한 자비가 덧입혀진다. 거룩한 깨달음의 세계와 시끄러운 일상이 결코 다르지 않으며, 타인의 아픔이 곧 내 아픔으로 생생하게 울려 퍼지는 벅찬 자각. 이 마음은 나 혼자만의 텅 빈 안식처에 머물기를 단호히 거부하고, 기어이 나와 내 곁의 사람들을 다 함께 살려내겠다는 뜨거운 다짐으로 내 안에 굳게 자리 잡았다.


내 안의 초인과 보살은 이제 뜬구름 잡는 교리가 아니다. 이 거실 한복판에서 피 흘리는 나와 가족을 구원할 아주 구체적이고 서늘한 실천 윤리가 되어 나를 완전하게 무장시킨다. 앞으로 펼쳐질 일상의 아수라장 속에서, 나는 이 무기들을 기꺼이 빼어 들 것이다.


굳게 닫힌 아이의 방문을 마주할 때면, 억지로 문을 열어젖히려는 내 안의 오랜 불안을 내려놓고 그 문 너머에서 홀로 앓고 있을 상처를 가만히 헤아려 보련다. 나를 숨 막히게 하던 어머니의 날 선 전화벨 소리 앞에서도, 늙고 스러져가는 한 인간의 근원적인 두려움을 들여다보며 조용히 곁을 내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하루아침에 쓸모를 부정당한 실직의 참담함이나 수시로 몸을 헤집어 놓는 갱년기의 열병 역시, 더 이상 억누르거나 외면하지 않겠다. 나를 텅 비워낸 그 서늘한 공허와 훅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통증마저도, 기어이 내 남은 생을 새롭게 꽃피울 비옥한 진흙탕으로 묵묵히 껴안을 것이다.


어설픈 희생으로 얽매이는 '착한 딸'과 '좋은 엄마'의 낡은 굴레를 끊어내고, 내 삶의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하며 타인까지 깊이 위로하는 길. 이것이 바로 피투성이의 일상 속에서 마침내 나와 타인을 온전히 살려내는 보살의 진짜 얼굴이자, 폐허 위를 사뿐히 뛰어오르는 초인의 눈부신 춤사위다.


6.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다

망치로 낡은 껍데기를 부수는 파괴의 시간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피투성이가 된 이 삶의 비릿한 체취가 밴 바닥 위에서, 초인의 절대 긍정과 보살의 무한 자비로 내 삶의 엉킨 매듭들을 하나씩 풀어내는 진짜 실전의 무대가 열린다.

굳게 닫혀 서늘한 냉기를 뿜어내는 아이의 방문 앞에서도, 늙고 병들어가는 두려움으로 나를 옭아매는 어머니의 낡은 거미줄 앞에서도 나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하루아침에 명함이 찢겨나간 실직의 참담함과 시도 때도 없이 내 육체를 태우는 갱년기의 끈적한 불꽃마저도, 기어이 내 생명력을 폭발시키는 가장 뜨거운 땔감으로 기꺼이 삼아버릴 테니까.


나는 거실 바닥에 흩어진 깨진 우상의 파편들을 가만히 밟고 선다. 폐허 위를 딛고 선 두 다리에는 더 이상 방향을 잃은 두려움이 없다. 고통을 회피하지 않는 초인의 맹렬한 야성과, 기꺼이 징글징글한 세상 속으로 몸을 던지는 보살의 자비심으로 무장한 채, 나는 굳게 닫힌 아이의 방문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비틀거리는 상처투성이의 발걸음일지라도, 마침내 우리 다 함께 진흙탕을 벗어나 연꽃 위에서 눈부신 춤을 추게 될 그날을 향하여 나는 기어이 나아갈 것이다. 저 차가운 문고리를 움켜쥐고 내 운명을 기꺼이 사랑하겠다며 뜨겁게 포효하면서 말이다. 이 지독하고 찬란한 생의 한복판에서, 진짜 눈부신 싸움은 이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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