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기쁨이라는 잔인한 형벌 앞에서 내 새끼를 온전히 껴안는 법
1. 송도의 우아한 브런치 카페, 그리고 매끄러운 지옥
인천의 베벌리힐스라 불리는 송도 국제도시의 심장부. 통유리창 너머로 센트럴파크의 인공 호수가 햇빛을 받아 마치 잘 큐레이팅된 갤러리의 작품처럼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돈과 권력으로 빚어낸 그 인공적인 완벽함은, 이 성벽 안에 진입한 자들만이 누리는 특권처럼 느껴졌다.
테이블 위에는 이름도 발음하기 어려운 유럽식 브런치 메뉴와 한 잔에 만 원이 훌쩍 넘는 스페셜티 커피가 놓여 있었다. 겉보기엔 신도시의 세련됨과 경제적 여유로 무장한 중년 여성들의 우아하고 여유로운 주말 오후, 그 완벽한 한 폭의 그림이었다.
간밤의 미국 증시 흐름이나 남편의 골프 모임 같은 주제들이 버터처럼 부드럽게 테이블 위를 오갔고, 목소리는 나긋나긋했으며 찻잔을 내려놓는 손길은 한없이 우아했다. 교양 넘치는 말투로 서로를 치켜세우며 한껏 여유를 부렸지만, 사실 그건 상처받지 않기 위해, 혹은 우위를 점하기 위해 뒤집어쓴 매끄러운 가면에 불과했다.
누구 하나 큰소리 내지 않는 그 고급스러운 교양의 밑바닥에는 나보다 못한 이를 깔보고 잘난 이를 시기하는 끈적한 위선과, 언제든 상대를 깎아내릴 준비가 된 날 선 서열 싸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철저하게 예의로 포장된 채 팽팽하게 당겨진 그 오만한 정적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자식 학벌이라는 계급장을 은밀하게 곁눈질하며 브런치를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내 뱃속은 방금 삼킨 리코타 치즈 샐러드가 명치끝에 턱 걸린 듯, 서늘하고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어휴, 난 진짜 걔가 원서를 어디 쓰는지도 몰랐어. 학교하고 집 말곤 학원 하나 다니지 않았어. 그냥 지가 알아서 EBS 듣고 인강으로 공부했어. 제발 잠 좀 자라고, 대학이 대수냐고 그렇게 잔소리를 했는데. 결국 고집부리더니 관악산으로 가버렸네. 등록금이 싸서 내 노후 자금 굳은 걸로 다행이지 뭐."
맞은편에 앉은 영미가 특유의 콧소리를 섞어 툭 던진 그 한마디. '관악산'이라는 단어가 공기를 가르고 테이블 위로 떨어지는 순간, 카페 안의 백색소음이 일순간 진공상태처럼 빨려 들어갔다. 서울대 합격. 그건 대한민국 엄마들의 생태계에서 모든 계급을 단숨에 평정해 버리는 절대반지이자 궁극의 트로피였다.
"어머, 영미야! 진짜 대박이다! 너 이제 두 다리 쭉 뻗고 자겠다. 너무 축하해!"
"야, 넌 전생에 나라를 구했니? 아들내미가 어쩜 그렇게 알아서 잘해?"
동석한 지인들의 하이톤 찬사가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나 역시 입꼬리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힘껏 억지웃음을 끌어올리며 그 환호의 합창에 동참했다. "우석이 정말 장하다. 너도 고생 많았어, 축하해!"
내 입에서 흘러나온 그 매끄러운 축하의 말은, 영혼이라곤 단 1그램도 들어있지 않은 완벽한 플라스틱 모형 같았다. 겉으로는 보살처럼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테이블 아래로 숨긴 내 두 손은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꽉 쥐어져 있었다.
내 아들은 어제, 이름조차 생소한 지방의 어느 대학에 간신히 추가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 사실을 아는 영미가 내 앞에서 저렇게 교묘한 겸손을 가장해 승전보를 울리는 순간, 나는 철저하게 발가벗겨진 채 참수당한 기분이었다. '서울대생 엄마'라는 찬란한 완장을 찬 친구 앞에서, 나는 순식간에 '지잡대생 엄마'라는 루저로 전락해 버렸다. 그 우아한 브런치 카페는, 타인의 눈부신 기쁨이 내 목을 조르는 가장 잔인하고 숨 막히는 지옥이었다.
2. 연민이라는 이름의 값싼 우월감
도망치듯 모임을 빠져나와, 센트럴파크 조망이라는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나의 초고층 아파트로 돌아왔다. 남들은 평생 벌어도 사지 못할 이 압도적인 공간조차, 지금 내게는 자식의 입시전쟁에서 무참히 패배한 패잔병의 초라한 은신처일 뿐이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매캐한 컵라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거실 소파에는 올해 스무 살이 된 아들 녀석이 늘어진 티셔츠 바람으로 누워,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낄낄거리며 보고 있었다.
그 무해하고 태평한 뒤통수를 보는 순간, 꾹꾹 눌러 담았던 억울함과 원한이 활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집안 꼴이 이게 뭐야! 남들은 학원 하나 안 다니고 방구석에서 EBS만 보고도 서울대를 간다는데, 넌 그 돈을 쏟아붓고도 그 성적표를 받아 들고 지금 웃음이 나와?!"
영문도 모른 채 벼락같은 불호령을 맞은 아들은 억울한 표정으로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정적만 남은 거실에 홀로 선 내 곁으로, 네 살배기 치즈 냥이 녀석만 다가와 다리에 몸을 스윽 비비며 야옹거렸다. 고양이의 따뜻한 체온이 다리에 닿는 순간,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던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방금 전 아들에게 토해낸 그 히스테리적인 분노는 결코 자식의 험난한 앞날을 걱정하는 어미의 애틋한 마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내 알량한 자존심이 짓밟힌 것에 대한 분풀이였고, 영미의 빛나는 트로피 앞에서 내 트로피가 볼품없어졌다는 비릿한 열등감의 발악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미는 우리 사이에서 가장 안타까운 동정의 대상이었다. 남편의 사업이 부도나면서, 번듯했던 송도의 아파트는 허망하게 경매로 넘어갔다. 그녀는 하루아침에 화려한 신도시를 등져야 했다. 다리 건너 낡고 습한 구도심의 허름한 빌라로 밀려나듯 이사하던 날, 그녀는 내 앞에서 서럽게 눈물을 쏟았다.
그런 영미 앞에서는 진심으로 같이 울어주고, 기꺼이 내 지갑을 열어 비싼 밥을 사 먹였다. 애들 주라며 과일을 사 들려 주기도 했다. 바닥으로 추락한 이에게 선뜻 온정의 손길을 내미는 나. 나는 스스로를 꽤나 품이 넓고 의리 있는 사람이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 뜨거운 연민의 밑바닥을 정직하게 까뒤집어 보면, 거기엔 '그래도 내 남편 사업이 그런대로 잘 굴러가서 다행이다', '적어도 내 처지가 영미보다는 낫다'는, 내 자아를 위협받지 않는 안전하고 달콤한 우월감이 깔려 있었다. 타인의 불행 앞에서는 누구나 천사처럼 굴 수 있다. 타인의 비참함을 보며 남몰래 내 삶의 안전판을 확인하고 안도했던 것. 결국 내 온정은 그녀가 나보다 더 불행할 때만 유효한, 참으로 안전하고 조건부적인 감정이었다.
나의 그 값싼 선의는 딱 거기까지였다. 나보다 밑바닥에 있다고 안도했던 사람이, 내가 그토록 간절히 원했지만 갖지 못한 궁극의 트로피를 거머쥐었을 때 기꺼이 내 일처럼 박수를 쳐주는 일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곳에는 끊임없이 남과 나를 저울질하며 살아온 내 거만한 에고(Ego)를 갈기갈기 찢어발겨야 하는 극심한 고통이 수반되었다.
겉으로는 우아한 미소로 축하를 건네면서도, 속으로는 '빚더미에 앉은 주제에 자식 농사 하나 잘 지었다고 유세는' 하며 맹독을 품은 독사를 키우는 것. 그것이 스카이 캐슬이라는 이 잔혹한 생태계에서 살아가는 나의 징그럽고도 솔직한 민낯이었다.
3. 지독한 자기혐오의 밤,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마주하다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을 쏟아내고 나니,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흉측한 내 진짜 얼굴이 보였다. 분노의 열기가 차갑게 식어 내린 자리, 그곳에 남은 것은 지독한 자기혐오였다. 밖에서는 흠잡을 데 없이 우아한 미소를 짓고 돌아와, 집에서는 타인의 행복을 질투하며 애먼 자식에게 패배의 책임을 떠넘기는 끔찍한 괴물. 동정이라는 이름으로 은밀하게 친구를 내려다보던 위선과, 자식의 대학 간판을 내 계급장으로 삼으려 했던 탐욕의 덩어리.
남과 나를 저울질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타인의 기쁨 앞에서 이토록 무참히 쪼그라드는 찌질하고 속물적인 자아에 구역질이 났다. 그 앙상한 영혼의 빈곤함이 너무도 수치스러워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그 지독한 자기혐오의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밤, 괴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펼쳐 든 낡은 선불교 책자에서 마주친 문장 하나가 내 정수리를 서늘하게 내리쳤다. 육조 혜능 스님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이었다.
一僧曰風動, 一僧曰幡動, 議論不已.
惠能進曰, 不是風動, 不是幡動, 仁者心動.
절 마당에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한 승려가 "바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자, 다른 승려가 "아닙니다. 깃발이 움직이는 것입니다"라고 반박했다.
두 사람이 옥신각신할 때, 혜능 스님이 다가와 일갈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오직 너희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그 아래 덧붙여진 책의 해설은 이러했다. 육조 혜능의 이 일갈은 외부의 자극이나 환경(바람) 탓도, 눈앞에 일어나는 현상(깃발) 탓도 하지 말라는 통찰을 담고 있었다. 객관적인 상황은 그저 인연에 따라 피고 질 뿐 본래 좋고 나쁨이 없는데, 인간이 스스로 가치 판단과 분별심을 개입시켜 요동친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괴로움은 결국 내 마음이 지어낸 허상일 뿐이니, 바깥을 향하던 원망을 거두고 흔들리는 내면의 주인이 되라는 요지였다. 내 밖의 세상을 탓하지 말고 마음을 고요히 비우라는, 참으로 거룩하고 흠잡을 데 없는 우아한 선(禪)의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구름 위에 둥둥 떠서 도나 닦는 듯한 참으로 한가로운 소리였다. 속세의 때라곤 한 점도 묻지 않은 이 우아하고 배부른 해설을 마주하자, 내 안에서는 날 선 반발심이 먼저 훅 치밀어 올랐다. '장난하나. 깃발이 분명히 다르게 생겼잖아! 영미네 깃발은 번쩍이는 금박이 박힌 최고급 실크고, 내 깃발은 비바람에 찢긴 초라한 누더기인데, 어떻게 마음이 안 흔들릴 수 있어? 고작 그깟 마음 탓으로 돌리면 이 비참한 현실이 달라지기라도 해?'
나는 신경질적으로 책을 덮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무심한 듯 툭 던져진 혜능의 저 묵직한 문답은 이미 활자를 벗어나 내 침울한 방안을 유령처럼 배회하며 내 목덜미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흔들리는 것은 마음이다… 오직 마음이다….
정곡을 찔러오는 그 단호한 문장 앞에서 나는 한참을 더 씩씩거리며 저항했다. 눈앞에 세상의 잔인한 계급장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어찌 그것이 한낱 마음의 장난이란 말인가. 하지만 허공을 향해 분노를 터뜨릴수록, 피투성이가 되어 무너져 내리는 것은 영미도 세상도 아닌 나 자신뿐이었다. 세상의 서열주의가 잔인하다 욕하면서도, 실은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 잣대를 들이밀며 내 새끼와 내 삶을 난도질하고 있는 진짜 가해자는 다름 아닌 나였다.
그 참담한 자각이 명치끝을 찌르고 들어오자,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반발심이 일순간 툭 하고 끊어졌다. 거칠었던 숨이 잦아들고 꽉 쥐고 있던 두 주먹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그래, 인정하자. 나를 지옥불에 밀어 넣은 것은 저들의 눈부신 깃발이 아니라, 그 깃발에 매겨진 세상의 값어치를 내 존재의 값어치라 맹신했던 나의 어리석음이었다. 내가 스스로 뒤집어쓴 이 지독한 분별의 안경을 단 1분만이라도 벗어던질 수 있다면 어떨까. 세상이 덕지덕지 붙여놓은 그 무거운 가격표들을 다 떼어내고, 눈앞의 상황을 그저 있는 그대로만 마주해 본다면.
4. 흔들리는 것은 깃발도, 바람도 아니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혜능의 시선으로 지금 펄럭이고 있는 이 깃발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영미 아들의 서울대 합격증, 그리고 내 아들의 지방대 합격증. 아무런 잣대 없이 객관적인 사실만 놓고 보자면, 그것은 그저 각자의 인연과 궤도에 따라 나타난 두 개의 '현상(幡)'에 불과했다.
1등과 꼴찌, 성공과 실패라는 세상의 잔인한 필터를 걷어내고 나면, 거기엔 우월하고 열등한 두 개의 계급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영미의 아들은 그 아이가 견뎌낸 시간과 운이 맞물려 관악산으로 향하는 기차를 탄 것이고, 내 아들은 녀석이 감당할 수 있는 보폭과 속도에 맞춰 지방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을 뿐이다. 봄에 피는 꽃과 가을에 피는 꽃이 다르듯, 그저 각자의 시기와 장소에 맞춰 맺힌 서로 다른 열매였다. 목적지가 다를 뿐, 둘 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되어 각자의 다르고도 평범한 출발선에 선 채 자기 삶이라는 궤도 위를 무사히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종이 위에 찍힌 글자일 뿐, 그 자체로는 나를 찔러 죽일 흉기도 아니고 나를 구원할 동아줄도 아니었다. 깃발은 본래 선악이 없고 아무런 죄가 없었다.
그렇다면 바람은 어떤가. '스카이 캐슬에 입성하지 못하면 실패자'라고 떠들어대는 세상의 견고한 서열주의, 브런치 카페에 모여 앉아 서로의 불행을 안주 삼으며 은밀하게 계급을 확인하려 드는 그 숨 막히는 허세. 그것은 그저 이 잔혹한 생태계에 늘 불어대는 씁쓸한 '바람(風)'일 뿐이다. 바람은 그저 제 길을 갈 뿐, 굳이 나 하나만을 콕 집어 모욕하거나 저주할 의도를 품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이토록 미친 듯이 요동치며 내 속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는가. 그 순간, 서늘한 소름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요동치고 있는 것은 깃발의 재질도, 바람의 세기도 아니었다. 오직 하나, 세상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두 동강 내어 바라보는 나의 징그러운 편견이었다. 승자와 패자, 1등급과 9등급, 우월함과 열등함. 그리고 송도의 번듯한 고층 아파트와 구도심의 낡은 빌라. 이 모든 것을 수직적인 계급으로 나누고, 그 촘촘한 이분법의 그물망 속에 나와 내 아들의 존재를 구겨 넣은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불쌍히 여기며 동정했던 친구의 깃발이 내 깃발보다 보란 듯이 높이 펄럭인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는 오만한 시기심. 자식의 성취를 나의 계급장으로 삼아 세상에 과시하고 싶었던 천박한 소유욕. 외부의 조건이나 영미의 자랑이 나를 괴롭힌 것이 아니었다. 나와 남을 끊임없이 비교하고 가차 없이 선을 긋던 내 안의 그 지독한 편 가르기가, 스스로 지옥불을 지피고 들어가 사시나무 떨듯 요동치고 있었던 것이다.
5. 이원성의 감옥을 내리치는 서늘한 죽비
나는 내 영혼의 잠을 깨울 서늘한 죽비를 높이 치켜들었다. 무자비하게 내리쳐 박살 내야 할 곳은 다름 아닌 내 심장 한가운데 똬리를 틀고 세상을 승자와 패자로만 쪼개던 지독한 편 가르기, 바로 그 잔인한 비교의 잣대였다.
깃발이 움직이는가, 바람이 움직이는가. 이 쓸데없는 논쟁을 벌이던 두 승려처럼, 나는 세상 모든 것을 철저히 두 개로 쪼개어 놓고 있었다. '나와 너', '승자와 패자', '우월함과 열등함'. 영미의 아들과 내 아들을 금을 긋듯 정확하게 분리하고, 그녀의 획득이 곧 나의 상실이 되며, 타인의 행복이 나의 불행으로 치환되는 이 지독한 제로섬 게임 앞에 나를 세워 놓았다.
나는 스스로 그 비교의 감옥을 짓고 들어가, 내가 남보다 우위에 섰을 때는 같잖은 만족감에 취해 거만하게 웃었고, 반대로 남의 깃발이 내 위로 펄럭일 때면 처절한 패배감에 휩싸여 피눈물을 흘렸다. 타인의 불행을 먹고 자라는 교만과 타인의 행복에 베이는 비참함. 나는 그 끔찍한 시소 위에 앉아 내 영혼을 스스로 고문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서운 죽비 소리가 내면을 향해 울려 퍼지자, 그 흉측한 이분법의 민낯이 낱낱이 파헤쳐졌다. 내가 영미를 불쌍히 여기며 베풀었던 그 알량한 연민조차, 철저히 '너와 나는 다르며 내가 더 우위에 있다'는 오만함에서 비롯된 위선이었다.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자식을 향해 폭언을 휘두른 것도, 자식을 나와 독립된 생명체가 아닌 내 텅 빈 자아를 채워줄 소유물로 착각한 폭력성이었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너와 나를 끊임없이 저울질하며 갈라치던 그 징그러운 마음을 향해 사정없이 죽비를 내리쳤다. 위선의 가면이 뜯겨 나가며 영혼의 맨살이 까발려진 듯한 수치심이 밀려왔다. 타인의 불행을 딛고 서야만 안도했던 그 비겁함, 남과 비교하지 않으면 내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없다고 믿었던 그 찌질한 가난함이 비명을 지르며 깨어져 나갔다.
나와 세상을 단절시키던 그 끔찍한 장벽. 뼈를 때리는 수백 번의 타격 끝에, 마침내 그 견고했던 아집의 성벽이 균열을 내며 내면의 바닥으로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6. 텅 빈 거실에서 마주한 맑은 본래면목(本來面目)
성벽이 무너진 자리에는 낯설 만큼 깊고 서늘한 정적이 찾아왔다. 한참을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귓가를 때리던 분노의 이명도, 미친 듯이 뛰던 심장 박동도 차츰 잦아들었다. 거실 공기가 눈물 자국을 서늘하게 식혀줄 때쯤, 나는 천천히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그리고 무언가에 이끌리듯 굳게 닫힌 아들의 방문 앞에 섰다.
조심스레 손잡이를 돌려 아들의 방문을 열었다. 녀석은 여전히 침대에 엎드려 유튜브를 보며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나와 타인을 쪼개던 분별의 안경이 박살 나고 나니, 그 실없는 웃음소리가 더 이상 한심하거나 짜증스럽게 들리지 않았다. 대신, 그 어떤 가식도, 세상의 날 선 비난도 닿지 못하는, 투명하고 온전한 존재의 소리로 들렸다.
내 시야를 탁하게 가리고 있던 '지방대생'이라는 굴레가 완전히 증발해버리자, 녀석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한 올, 스마트폰 빛이 반사된 눈동자, 베개에 기댄 둥근 어깨의 곡선, 숨 쉴 때마다 부드럽게 오르내리는 등짝까지... 그 모든 것이 한없이 눈부시고 완전해 보였다. 나는 비로소 내 아들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세상 그 어떤 잣대로도 덧칠할 수 없는, 있는 그대로 빛나는 한 생명체의 진짜 얼굴을 보았다.
스카이 캐슬이라는 그 폭력적이고 비좁은 트랙에서 미끄러졌을 뿐, 이 아이는 그 자체로 덜어내거나 보탤 것 없이 이미 완결되고 더 없이 찬란한 하나의 우주였다. 세상의 잣대를 들이대며 미친 듯이 흔들리던 내 마음의 스위치를 끄고 나니, 비교와 서열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어떤 조건에도 걸림없이 온전하게 존재하는 여여(如如)한 실존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와 자식을 분리하던 어리석음이 사라지자, 비로소 아들의 남모를 아픔이 내 아픔으로 깊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스카이는 고사하고 인서울조차 벅차다는 자신의 진짜 실력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아는 건 아들 본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녀석은 부모가 억지로 밀어 넣은 그 숨 막히는 길을 단 한 번의 반항도 없이 꾸역꾸역 따라와 주었다.
서울대생 과외는 기본이고, 제일 잘 나간다는 소수정예 학원까지. 그 비싼 돈을 쏟아붓는 부모의 지독한 기대와 압박에 얼마나 목을 조여왔을까. 그 무거운 짐을 지고도 녀석은 참 착하게도 단 한 번의 큰 말썽 없이 이 잔인한 시간을 견뎌냈다. 지금 침대에 엎드려 유튜브를 보며 킥킥거리는 아들의 저 둥글고 태평한 등짝이, 이제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눈물겹게 고맙다.
나와 남을 가르던 이원성의 벽이 허물어진 텅 빈 마음에, 비로소 아주 낯설고도 고요한 바람이 불어왔다.
7. 네가 기쁘니 나도 참 좋다, 비로소 건네는 진짜 축하
분별이 사라진 그 텅 빈 자리에서, 신기하게도 영미 아들의 서울대 합격이 더 이상 내 자존감을 찌르는 날카로운 흉기로 느껴지지 않았다. 부모의 빚더미에 쫓긴 불안 속에서 밤을 새워가며 묵묵히 연필을 쥐었을 그 아이의 땀방울이 내 아이의 땀방울처럼 보였고,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을 영미의 진짜 고단함이 내 고통처럼 피부로 느껴졌다.
나와 너의 경계가 사라진 이 고요한 자리. 그곳에서 나는 비로소 타인의 기쁨을 온전히 내 것처럼 끌어안는 진짜 마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아무런 계산 없이 남에게 온전한 박수를 쳐줄 수 있는 그 투명하고 넉넉한 마음, 친구가 잘 된 것이 배 아픈 게 아니라 진심으로 다행이라며 함께 눈물지을 수 있는 그 이상하고도 따뜻한 기적과 마주한 것이다.
그것은 내 처지가 너보다 낫다는 오만한 우월감에서 뚝뚝 떨어지는 값싼 동정이 아니었다. 네가 잘된 것이 못내 배 아파 몸부림치던 그 좁쌀만 한 에고마저 죽이고 나서야 비로소 흘러넘치는, 투명하고도 넉넉한 마음이었다. 가만히 내 밑바닥을 들여다보았다. 나 역시 세상으로부터 내 팍팍한 삶을 온전히 인정받고, 누군가에게 진심 어린 축하와 뜨거운 박수를 받고 싶어 매일 밤 남몰래 목말라하지 않았던가.
내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그 눈부신 환대와 축복을, 나보다 먼저 결승선에 닿은 타인에게 기꺼이 그리고 아낌없이 내어주는 일. 그것은 결국 '나와 네가 결코 둘이 아니다(自他不二)'라는 이 뼈아픈 자각 없이는 불가능한 경지였다. 네가 기쁘니 나도 참 좋다. 억지로 꾸며낸 플라스틱 모형 같던 브런치 카페에서의 축하는, 분별이 사라진 이 텅 빈 마음을 통과하며 비로소 묵직하고 곡진한 진심이 되었다.
내 마음속에서 미친 듯이 불어대던 바람도, 파닥거리며 요동치던 깃발도 마침내 잠잠해졌다.
나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부엌으로 가 가스불을 켜고 아들이 좋아하는 제육볶음을 볶기 시작했다. 달궈진 프라이팬 위에서 매콤달콤한 양념이 고기와 함께 지글거리는 소리, 그리고 입맛을 돋우는 맛있는 냄새가 세상을 가르고 쪼개느라 날이 바짝 서 있던 거실 공기를 따뜻하게 데웠다. 내 바짓가랑이에 머리를 비비는 고양이의 정수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거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아들, 라면 그만 먹고 나와서 밥 먹어!"
세상의 거창한 잣대와 남들의 펄럭이는 깃발 따위는 모두 문밖에 둔 채, 나는 나의 이 평범하고 투박한 우주에게, 그리고 오직 나만이 차려낼 수 있는 나의 이 눈부신 일상에게 오늘 치의 가장 다정한 밥상을 내어 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