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도피처를 부수고 진속불이(眞俗不二)의 거실로 돌아오다
1. 그 거룩하고 완벽했던 나의 도피처
"세속의 탁한 기운을 비워내야 합니다. 번뇌로 얼룩진 찌꺼기들을 이 성스러운 도량에서 남김없이 씻어내십시오."
눈을 지그시 감고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띤 채 뱉어내는 그분의 말씀은 언제나 은혜롭고 오묘했다. 나는 무릎 연골이 시큰거리는 것도 잊은 채, 바닥에 납작 엎드려 성전의 마룻바닥을 걸레로 박박 문지르고 있었다.
벌써 수년째였다. 매주 주말이면 나는 속세의 소음과 악취가 완벽하게 차단된 이 깊은 산속의 도량으로 기꺼이 숨어들었다. 첩첩산중에 자리 잡은 그곳은 세상의 찌든 때가 한 점도 묻지 않은 듯 지독하게 성스럽고, 숨 막히도록 경건했으며, 비현실적일 만큼 평온했다. 저잣거리의 비루한 치열함과는 완벽하게 선을 그은 그 무결(無缺)의 공간에서, 나는 묵묵히 청소를 하고, 수십 인분의 밥을 짓고, 때마다 두툼한 봉투를 제단에 바쳤다.
남편이 명예퇴직으로 받아온 피 같은 퇴직금을 몽땅 쏟아부어 차린 프랜차이즈 식당. 개업 초기에는 제법 손님이 북적이며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하지만 희망도 잠시, 얄궂게도 바로 옆 건물에 똑같은 업종의 식당이 공격적으로 들어서면서 매출은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옆 가게는 유명 유튜버를 동원해 요란하게 홍보를 해댔고, 이내 텅 빈 우리 가게 앞까지 손님이 줄을 서며 문전성시를 이뤘다. 남의 가게 손님들이 세운 줄을 멍하니 바라보며, 매달 돌아오는 상가 임대료와 알바생 인건비를 메꾸기에도 급급해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실정이었다. 파리 날리는 가게 문을 닫고 집에 돌아오면, 죄인처럼 움츠러든 남편과의 무거운 침묵만이 나를 짓눌렀다. 그 징글징글하고 팍팍한 진흙탕 같은 일상에서 나는 늘 도망치고 싶었다.
새하얀 개량 한복을 입고 인자하게 웃는 영도자의 곁에 엎드려 있으면, 나 역시 덩달아 세속의 지저분한 때를 벗고 거룩하고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만 같았다. 그가 "업장을 소멸해야 복이 들어옵니다", "마음을 비워야 뜻하는 바가 이루어집니다"라고 나지막이 읊조릴 때면, 나는 그 고요하고 웅장한 권위에 압도당한 채 무조건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 덥고 추운 곳에서 땀 흘려 마룻바닥을 닦고 정성껏 시주금을 바치면, 그 무한한 공덕이 텅 빈 내 가게의 매출을 다시 끌어올려 주고 꽉 막힌 내 인생의 숨통을 마법처럼 틔워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것은 벼랑 끝에 몰린 나의 절박함이 만들어낸 맹신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성스러운 공간에서 끊임없이 내 머릿속에 주입해 댄 달콤한 최면이기도 했다. 아픈 무릎의 통증을 복을 받기 위한 엄숙하고 경건한 수행으로 여겼다. 그조차 감읍하고 영광스러운 축복이라 감사했다. 나는 그 위압적인 숭고함 앞에 이마를 조아리고 또 조아렸다.
2. 신성한 이너서클, 파랗게 질린 나의 무지(無知)
일주일에 한 번 뿐이긴 하지만 현실을 벗어난 이 영적 단체에 발을 들이면, 마치 독한 진통제를 맞은 듯 밀린 월세의 압박도, 남편과의 불화도, 세속의 지긋지긋한 괴로움도 일순간 마비되는 것 같았다.
특히 이곳에는 아예 속세를 등지고 공동체를 이루어 모여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의 고뇌 따위는 말끔히 지워진 듯한 맑은 얼굴들, 그들끼리만 나누는 끈끈하고도 은밀한 유대감. 일요일 단 하루 방문하는 나로서는 그 견고한 '이너서클(Inner Circle)'에 결코 낄 수 없는 주변인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뼈가 부서져라 헌신해서 그들의 인정을 받으면, 나도 그 신성한 원 안으로 들어가 내 모든 괴로움을 끝낼 뾰족한 해답을 기어이 얻어낼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백 번 마룻바닥을 닦고 수천 번 절을 올려도 나의 팍팍한 현실은 한 치도 나아지지 않았다. 산을 내려가면 눈덩이처럼 불어난 식당의 적자와 밀린 월세, 그리고 남편의 한숨이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몸이 부서져라 궂은일을 도맡을수록 내 안의 갈증은 오히려 지독하게 타들어 갔다. 마당이나 쓰는 주변인으로 겉돌기만 해서는 영영 이 시궁창 같은 지옥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숨통이 조여오던 어느 주말이었다. 여느 때처럼 엎드려 걸레질을 하던 내 시선 끝에, 평온하게 차를 마시며 고상한 선문답을 주고받는 영도자와 이너서클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나도 저 해맑은 얼굴을 한 사람들처럼 핵심적인 진리에 가닿고 싶다는 조급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단순한 노동을 바치는 맹신도를 넘어, 나 역시 깊은 진리를 논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럴듯하고 철학적인 질문 하나가 나를 단숨에 그 견고한 성벽 안으로 이끌어 줄 통행증이 될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서기 시작했다.
더 이상 맹목적인 노동만으로는 이 굴레를 탈출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 내 머릿속의 이성을 하얗게 지워버렸다. 당장 내 영혼을 흔들어 깨워 이 지긋한 현실을 벗어날 단 하나의 정답을 쥐여 달라고 매달리고 싶었다. 나는 쥐고 있던 걸레를 내려놓고, 용기를 내어 인자하게 웃고 있는 영도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괴로움이 없는 그 진실의 자리, 도(道)란 대체 무엇입니까?"
나의 간절한 질문에, 온화하던 영도자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지더니 벼락같은 호통이 쏟아졌다.
"이것이 도다, 이것이 진리다,라고 형상을 지어 선명하고 명확하게 말하는 곳이 있다면 그런 곳을 가장 경계하고 의심해야 합니다! 그들이 바로 사기꾼이고 사이비입니다. '이것'이라고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할 수 있는 건 이미 진리도 도(道)도 아닙니다!"
순간, 내 안색은 종잇장처럼 파랗게 질려버렸다. 압도적인 권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슬 퍼런 기운에 눌려 숨이 턱 막혔다.
'아, 내가 아직 공부가 너무나 부족하구나. 일주일에 겨우 한 번 오는 주제에 감히 저 높은 경지를 건방지게 벌써 알려고 들다니. 얄팍한 입술로 망령된 질문을 던져 결국 스승님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구나.'
찰나의 의문조차 죄악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 불경함을 자책하며 파들파들 떨리는 손을 맞잡고 바닥에 이마를 짓눌렀다. 행여나 이 일로 "세속의 번뇌를 못 벗었으니 다시는 오지 말라"는 파문을 당할까 봐, 나는 다시는 입을 열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비굴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나의 그 불온한 질문은 이미 독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그날 이후,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던 그 무욕(無慾)의 공동체 사람들은 나를 미묘하게 경계하기 시작했다. 내게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이 세워졌고, 싸늘하고 교묘한 따돌림의 공기가 나를 감쌌다. 늘 입버릇처럼 분별심을 버리라던 그곳은, 그 어떤 세속의 모임보다 더 잔인하게 '성스러운 우리'와 '불경한 이방인'을 나누어 구분 짓고 있었다.
3. 방향 잃은 억울함, 그리고 비겁함의 영수증
따돌림의 냉대를 견디다 못한 늦은 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엉망진창인 내 아파트 거실로 돌아왔다. 식탁 위에는 뜯지도 않은 독촉장과 고지서가 널브러져 있고, 싱크대에는 며칠째 방치된 설거지거리가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그토록 정갈하고 성스럽게 빛나던 산속 도량의 마룻바닥과,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내 비루한 거실. 그리고 그곳에서 겪은 허망한 멸시. 그 극단적인 낙차 앞에서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버리는 듯한 기괴한 현타가 밀려왔다.
유일한 구원의 동아줄이라 믿고 맹목적으로 매달렸던 곳에서마저 사실상 파문을 당했다는 참담함에, 나는 허물어지듯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녕 벼랑 끝으로 내몰린 나는 이제 대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세상천지에 내가 숨을 곳은 단 한 뼘도 남아있지 않은 것만 같았다.
처음 며칠은 그저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며 눈물을 쏟았다. 모든 것이 내 탓인 줄만 알았다. '내 업장이 너무 두터워서, 내 수행이 턱없이 부족해서 그 거룩한 곳에서 쫓겨난 거야.' 감히 건방진 입을 놀린 나의 가벼움이, 그 성스러운 곳에 머물 자격조차 없는 나의 비루함이 이 모든 파국을 불렀다며 가슴을 쳤다. 내 손으로 마지막 희망마저 끊어버렸다는 죄책감과 절망감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렇게 식음을 전폐하고 끝없는 자기혐오의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대던 어느 밤이었다. 내 안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맹목적인 자책이 한계치를 넘어서자, 문득 참을 수 없는 뜨거운 덩어리 하나가 명치끝에서 치밀어 올랐다. 방향 잃은 슬픔이 그 반동을 타고 짐승 같은 울분과 지독한 억울함으로 불길처럼 번져가는 순간이었다.
"내가 그동안 어떻게 했는데. 내 무릎 연골을 갈아 넣어 그 넓은 마룻바닥을 닦은 게 몇 년이며, 적자에 허덕이는 식당 매출을 쪼개고 빚까지 내가며 갖다 바친 시주금이 도대체 얼만데! 그깟 질문 몇 마디 했다고 하루아침에 사람을 구걸하는 거지 취급을 해?"
속물적이라고 욕해도 할 수 없었다. 내 피 같은 돈과 노동력에 대한 본전 생각이 사무치게 밀려오자, 나를 내친 그들을 향한 원망의 틈바구니로 서늘한 의심 한 자락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진짜 깨달음을 얻고 무욕을 실천하는 자비로운 공동체라면, 질문 하나 던졌다고 사람을 이토록 치사하게 따돌리고 내쫓을 수 있는 건가? 혹시 그 대단한 영도자라는 인간도, 사실은 쥐뿔도 아는 것 없이 그럴듯한 포장지로 사람들의 불안을 등쳐먹는 사기꾼이었던 건 아닐까?'
불과 며칠 전까지 맹목적으로 엎드려 신처럼 받들었던 그 작자를 향해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씩씩대던 중, 문득 눈앞에 널브러진 독촉장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들을 희대의 사기꾼이라 욕하고 탓해본들, 파산 직전인 내 현실은 단 1원도 해결되지 않았다. 허공에 대고 주먹질을 하는 것 같은 지독한 허무함이 밀려오자, 펄펄 끓던 분노는 이내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 잿더미 같은 마음 위에 서늘하고도 뼈아픈 질문 하나가 남았다. 만약 그가 내 불안을 먹고 자란 사기꾼이라면, 나는 왜 그 허술한 덫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 수천만 원의 시주금과 내 피 같은 시간을 바쳤는가.
그 짙은 의심의 끝에서, 나는 마침내 내 자신의 가장 찌질한 밑바닥과 정면으로 마주쳐야 했다. 결국 그 사기꾼에게 내 삶의 운전대를 통째로 넘겨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나는 깨달음을 구한 것이 아니었다. 손길이 뚝 끊긴 가게와 답답한 남편, 그 팍팍한 삶의 문제를 직면하고 내 손으로 수습할 용기가 없어서, 누군가 대신 치워주길 바랐던 것이다.
그들이 사기꾼이든 아니든, 그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내가 받아 든 것은 결국 '비겁함의 영수증'이었다. 종교라는 가장 그럴듯하고 고상한 도피처로 숨어버린 지독한 겁쟁이. 그것이 바로 나였다.
4. 내 삶을 반으로 쪼개버린 폭력적인 계산기, 간택(揀擇)
이 구질구질한 거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내 찌질한 민낯을 마주하던 순간, 언젠가 그 도량의 서가에서 무심코 읽었던 옛 선사의 구절 하나가 벼락처럼 내 귓가를 때렸다.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오직 분별하고 선택하는 마음을 꺼릴 뿐이다.
이 문장은 내 영혼의 가장 병든 치부를 정확히 도려내는 서늘한 지혜의 메스로 다가왔다. 승찬 대사가 그토록 경계하라고 일갈했던 '간택'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지금 여기'에 발 딛고 있는 내 삶을 부정하고, 자꾸만 '어딘가에 있을 더 나은 미래'를 탐하는 알량한 계산이었다.
나는 그동안 지극한 도를 구한답시고 산속을 헤맸지만, 정작 내 머릿속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간택의 계산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 이 팍팍한 시간보다 저 산속의 평온한 시간이 더 고귀하다고 믿었고, 내 발밑의 엉망진창인 거실보다 도량의 정갈한 마룻바닥이 더 거룩한 공간이라 믿었다. 나 같은 속물은 비루하고 저 단상 위 지도자는 성스럽다는 이분법에 스스로를 가두었으며, 정성껏 돈을 바치면 반드시 대가가 올 것이라는 얄팍한 계산으로 신과 거래를 하려 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내 입맛에 맞는 것들만 골라 취하고, 힘든 현실은 통째로 도려내고 싶어 했던 나의 간사한 간택이었던 것이다.
내가 저지른 가장 끔찍한 간택은 바로 내 삶 자체를 두 동강 내버린 것이었다. 나는 '종교는 성스럽고 깨끗하며, 세속은 더럽고 찌들고 괴로운 곳'이라는 폭력적인 이분법의 도마 위에 내 일상을 올려두고 무참히 난도질했다. 파리가 날리는 내 식당,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낡은 아파트 거실, 내일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그 땀내 나는 일상은 철저히 '악(惡)'과 '더러움'으로 규정했다. 반면 산속의 웅장한 도량과, 무슨 뜻인지도 모를 소리를 늘어놓는 영성 지도자의 입술은 '선(善)'과 '성스러움'으로 추앙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산속 도량의 매끄러운 마룻바닥이나 내 식당의 끈적이는 장판이나 결국 다를 바 없는 똑같은 바닥일 뿐이다. 그곳에 내려앉는 먼지와 내 거실에 굴러다니는 먼지가 다를 리 없고, 산속 공기가 맑은 것도 그저 산에 나무가 많아서일 뿐이지 그곳이 특별히 구별된 성소라서가 아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내 절박함이 빚어낸 거대한 헛소동이었다. 내 삶이 너무 버거우니 그 고통에서 도망치고 싶었고, 내 머릿속에 완벽한 환상 속의 도피처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한쪽에는 '거룩함'이라는 화려한 포장지를 씌우고, 정작 내가 발 딛고 사는 진짜 삶에는 '비루함'이라는 딱지를 붙여 시궁창으로 밀어 넣었다.
내가 스스로 만든 이 지독한 편견이야말로 승찬 대사가 그토록 경계했던 '간택(揀擇)', 즉 내 입맛대로 세상을 쪼개고 나누는 마음이었다. 맹신이라는 눈가림이 벗겨지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세상에 원래부터 거룩한 공간과 속된 공간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님에도, 나는 내 멋대로 잣대를 들이대며 나의 현실을 혐오하고 부정한 것이다. 나의 일상, 나의 노동, 나의 가족이 깃든 이 삶의 터전을 스스로 더럽고 불결한 지옥으로 강등시켜 놓고서, 어찌 그 삶이 구원받기를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오직 분별하고 선택하는 마음을 꺼려라."
승찬 대사의 이 말씀은,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도망쳐 산속의 맑은 공기만 편식하려 했던 나의 비겁함을 향한 정면 승부였다. 참된 깨달음은 더러운 것을 피하고 깨끗한 것만 쏙쏙 골라 먹는 얄팍한 영적 쇼핑이 아니었다. 내 삶에 주어진 찌질함과 고통, 그 진흙탕마저 어떤 잣대도 들이밀지 않고 온전히 긍정하고 끌어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절대적인 경지. 그것이 바로 '간택을 멈춘 자'의 얼굴이었다.
결국 지극한 도(道)란, '나'와 '너'를 가르는 벽이 허물어지고, '이것이 좋으니 저것은 나쁘다'며 끊임없이 조건을 따지던 그 속물적 마음의 저울마저 완전히 부숴버린 자리, 바로 그곳에 있었다.
5. '개똥 같은 선문답'을 파는 세련된 약팔이들
그 지독한 간택의 덫에서 빠져나오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의 민낯이 선명하고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성(聖)과 속(俗)을 가르는 이분법의 사기극은 비단 내가 몸담았던 그 산속의 영성 공동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를 모호한 말들에 교묘하게 진리의 파편을 섞어 사람들을 현혹하고 돈벌이를 하는 곳은 세상천지에 널려 있었다.
대단한 우주의 섭리라도 깨달은 양 거들먹거리며 책을 파는 작가들, 자신이 움켜쥔 알량하고 부분적인 자명함을 온 세상의 절대 진리인 양 일반화하며 대중을 훈계하려 드는 이른바 영성 멘토들, 현학적이고 전문적인 언어로 무장하고선 일반인을 기죽이는 상아탑의 학자들, 그리고 마음 수련과 힐링이라는 세련된 포장지를 두른 수많은 약팔이들.
이들의 가장 치명적인 공통점은 절대 '질문'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일까? 논리적으로 파고들어 날카로운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 자신들이 가진 그 얄팍한 밑천과 허위의식이 금세 탄로 날 테니까.
그래서 누군가 손을 들고 뾰족하게 따져 물을라치면, 그들은 당황하는 기색을 감추고선 근엄하게 벼락같이 호통을 친다.
"그렇게 자꾸 따지고 분석하려는 그 분별하는 마음을 당장 내려놓으세요!"
참으로 기가 막힌 방패막이다. 자신들의 무지와 사기극을 감추기 위해, "오직 분별하고 선택하는 마음을 꺼려라"라는 승찬 대사의 그 위대한 사자후마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는 비겁한 도구로 전락시켜 버린다. 그들은 "아직 수행이나 학문적 깊이가 부족해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군요"라며 교묘하게 상대를 깎아내린다. '나는 이미 깨달았고 너는 아직도 어리석다'는 선명한 이분법으로 단숨에 질문자의 기를 팍 죽이는 수법이다. 그렇게 상대를 영적으로 덜 성숙한 미개인 취급하면서, 정작 본인들도 완벽히 꿰뚫지 못한 개똥 같은 선문답만 허공에 날려대며 위기를 모면하는 것이다.
과거의 나 역시 그 허울 좋은 말장난 앞에 엎드려 내 삶의 주도권을 통째로 반납했던 거룩한 호구였다. 주변에서는 모두가 그들을 우러러보며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자라 칭송했다. 그 집단적인 맹신이 만들어낸 무서운 권위의 무게는 한낱 초라한 세속의 중생인 나를 숨 막히게 짓눌렀다. 감히 의문을 품고 따져 물으면 "영영 구원받지 못할 테니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 말라"는 서늘한 파문으로 위협했다.
무엇보다 두려웠던 것은, 그들이 말하는 구원이 바로 코앞에 왔는데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해 그간의 지난한 수고가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행여나 나만 뒤처지고 버림받을까 무서워서, 결국 나는 그 비겁한 침묵과 맹목적인 무리 속에 섞여 들어가 기꺼이 영적인 노예를 자처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거대한 기복적 영성 비즈니스가 호황을 누리는 책임을 온전히 그 악의적인 사기꾼들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그 기형적인 시장을 키우고 떠받친 진짜 주범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파리 날리는 식당의 메뉴를 점검하고 피 튀기게 상권을 분석하는 대신, 엎드려 걸레질 몇 번 하고 시주금 좀 바치면 신이 매출을 올려줄 거라 믿었던 지독한 요행수. 나아가 대박 난 옆 가게에 무슨 사고가 나서 쫄딱 망해 나락으로 처박히기를 바랐던 그 음습한 저주까지. 뿌린 대로 거둔다는 우주 제일의 법칙인 '인과율(因果律)'조차 철저히 무시한 채, 내 고통은 피하고 복만 날름 삼키려 했던 나의 천박한 욕심. 그리고 내 삶의 진흙탕을 두 발로 딛고 일어설 용기가 없어 누군가에게 내 인생의 운전대를 덥석 쥐여준 그 비겁함이 결국 저 개똥철학을 파는 약팔이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일방적으로 속아 넘어간 가엾은 피해자가 아니었다. 진흙탕 같은 현실을 직면하기 싫어 달콤한 구원만 취하려 했던 나의 어리석은 '간택'이, 도리어 그 사기꾼들을 내 삶의 주인으로 족집게처럼 불러들인 셈이다.
텅 빈 내 영혼의 불안과 천박한 요행수가 그들의 사기극에 기꺼이 레드카펫을 깔아주었다. 내가 뿌린 비겁함의 씨앗이 사기꾼이라는 열매로 돌아왔다는 끔찍한 진실. 그것은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온전한 나의 비극이자 가장 뼈아픈 코미디였으며, 결국 내가 마주해야 할 가장 잔인하고도 공평한 현실이었다.
6. 거룩한 제단을 부수고 진속불이(眞俗不二)의 영토로 귀환하다
눈을 감고, 내 안에서 맹렬하게 돌아가던 그 '성(聖)'과 '속(俗)'의 계산기 코드를 통째로 뽑아버렸다. 그러자 기적처럼 시야가 맑아졌다.
그동안 나는 간택의 칼날로 세상을 두 동강 내며 살아왔다. 깨끗한 것만 취하고 더러운 것은 도려내야 한다고 믿었기에, 내 삶의 절반은 늘 지옥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승찬 대사의 일갈처럼 그 칼날을 거두고 나니, 내가 그토록 증오하며 버리려 했던 이 '비루한 일상'이 사실은 내가 그토록 찾던 '진리'의 다른 얼굴이었음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더러운 진흙을 떠나서는 연꽃이 필 수 없듯이, 징글징글한 세속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 거룩함이란 애당초 환상에 불과했다. 이 엄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내 안의 장벽이 무너지며 진정한 진속불이(眞俗不二)의 세계가 펼쳐졌다. 진리와 세속은 결코 두 개가 아니었다.
부처가 있고 진리가 있다면, 그들은 향냄새 진동하는 제단 위나 약팔이들의 번지르르한 세미나장 단상 위에 있지 않다. 진짜 깨달음의 성소는 바로 이 악취 나는 싱크대 앞이고, 밀린 고지서가 뒹구는 거실 바닥이며, 내일 당장 식당 월세를 벌기 위해 기름때 낀 불판을 닦아야 하는 이 땀내 나는 삶의 한복판이다.
저 뜬구름 잡는 사기꾼들의 도량을 닦는 걸레질이 성스러운 것이 아니라, 내 가족이 밥을 먹는 이 좁은 거실의 먼지를 닦아내는 나의 고단한 노동이 백배, 천 배는 더 거룩하고 위대한 구원이다.
어이없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평생을 성스러움과 더러움을 간택하며 밖으로만 헤맸던 내 꼴이 너무도 우스꽝스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당장 거실 구석에 모셔두었던 값비싼 부적과, 의미도 모른 채 앵무새처럼 외워대던 종교 서적들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지극한 도(至道)는 결코 어렵지 않았다. 그저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것. 고통은 고통대로, 찌질함은 찌질함대로 긍정하며 이 진흙탕 속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 간택을 멈춘 자에게는 이 팍팍한 아파트 거실이 곧 열반(涅槃)이요, 깨달음의 성소(聖所)였다.
팔을 걷어붙이고 싱크대의 썩은 설거지거리부터 치우기 시작했다. 거품을 내어 그릇을 닦는 내 손끝에, 그 어떤 종교의식보다 맹렬하고 경건한 생명력이 감돌았다.
나는 더 이상 산속의 영도자나 세련된 약팔이들이 던져주는 달콤한 기복의 부스러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내 고통을 대신 가져가 줄 구원자도, 내 매출을 마법처럼 올려줄 전능한 타자도 없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하지만 그것은 절망이 아니라 해방이었다.
남이 공들여 쌓아 놓은 가짜 신전을 부수고 나온 자리에, 비로소 나의 진짜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 비루하면 비루한 대로, 팍팍하면 팍팍한 대로, 이 진흙탕 같은 일상을 내 두 발로 딛고 서서 한 치의 도망도 없이 정면으로 응시한다.
누구에게도 내 삶의 운전대를 맡기지 않겠다는 서늘한 각성. 간택의 칼날을 거두고 내게 주어진 시공간을 온전히 책임지겠다는 결연한 의지.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이 좁은 거실이야말로 내가 다스려야 할 유일한 영토이며, 이제 나는 그 누구의 노예도 아닌 내 삶의 진정한 주인임을 엄숙히 선포하고 있었다.
비눗물이 씻겨 내려가는 싱크대 앞, 문득 예전 그 산속 도량에서 영도자에게 던졌던 나의 불온한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괴로움이 없는 그 진실의 자리, 도(道)란 대체 무엇입니까?"
그때의 나는 그 질문을 밖으로 던졌고, 사기꾼의 호통에 종잇장처럼 파랗게 질렸었다. 하지만 그 거룩한 도피처를 부수고 나온 지금의 나는, 내 삶의 한복판을 향해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명쾌한 답을 내린다.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
지극한 도는 결코 어렵지 않다. 오직 분별하고 선택하는 마음을 꺼릴 뿐이다.
도(道)는 저 산속의 구름 위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도다, 아니다'라고 거창하게 떠들 필요도 없었다. 참된 진리는 지금 내 손끝에서 뽀득하게 닦여나가는 이 밥풀 묻은 그릇 위에 있다. 거룩함과 속됨을 나누는 간택의 저울을 부숴버린 바로 이 순간,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나의 팍팍한 거실은 이미 완벽한 극락전(極樂殿)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