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할 때 약속을 했다. 둘이서 손가락을 걸고 한 것은 아니다. 나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니 그것을 지키려고 무척 노력한다는 것조차 남편은 모른다. 내가 살아온 지난날들을 돌아보니 내게 한 약속 때문에 힘들어했던 모습이 어리석기도, 고집스럽게도 보인다. 하지만 그 순간마다는 나를 바로 서 있게 하는 일인 줄로 여겼다.
결혼 8년 차로 일본에 살 때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기 직전이었다. 남편이 조용히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니 그는 단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주 보고 앉았다. 하지만 나는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그가 말했다.
"미안합니다."
아니, 그 말은 내가 먼저 그에게 하는 말인데... 침묵이 흘렀다. 그가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했다. 가만히 듣다가 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순전히 나의 일본어 실력이 모자라서 생긴 지난 이틀 동안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어로 8일은 하찌니찌이고, 20일은 하쯔카인데 난 둘을 혼돈했다. 하찌니찌를 말해야 하는데 하쯔카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이야기는 이렇다. 엄마의 예순 번째 생신이 그 해 유월 팔일이었다. 딸아이의 여권을 만들어야 했다. 준비과정과 신청 뒤 기다리는 시간을 계산하면 여유가 없었다. 여권신청을 하러 가자는데 그는 다음에 하자고 말했다. 며칠 남지 않았는데 여유가 있다는 것도 이해가 안 되고 바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미루자니 나는 화가 났다. 도와주지 않으면 혼자서 딸을 데리고 가서 사진 찍고 신청하겠다고 말했더니 남편은 내가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밥을 먹는 내내 우리 부부는 말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았다. 남편이 출근하고 시아버님이 내게 물으셨다. 둘이 언제나 잘 지내더니 부부싸움도 하느냐고. 그래서 억울한 마음을 이야기하고 혼자 처리하겠다고 했다. 이틀째 버스를 타러 갔다. 근데 남편이 그곳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아버님을 떠올렸다. 나는 버스를 기다려 탔다.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고 시청을 찾아 서류를 제출했다. 그 사람은 계속 따라다녔지만 나는 서툰 일본어로 일을 차근차근 처리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도 그가 데려다주겠다는 데 거절하고 휑하니 택시를 탔다. 그는 직장으로 갔고 나는 기분이 좋았다.
나의 세 가지 약속 중에 하나는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하루를 넘기지 않겠다고 생각했고 팔 년을 해 왔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잘못을 찾아 사과하는 것이 먼저였는데 이번에는 하루를 넘기고 이틀 째는 혼자서 일을 처리하니 그 사람이 무릎을 꿇은 것이다. 엄마 생신이 유월 이십 일이면 여유가 있지 않느냐고 그가 내게 반문했다. 아뿔싸! 팔일인데! 나의 실수였다. 바로 사과하고 웃음으로 마무리가 되었지만 그는 기뻤단다. 내가 혼자서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을 보고 안심이 되더란다.
두 가지 약속도 지금까지 잘 지키고 있다. 남편을 존중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남편에게 경어를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자녀가 아버지를 존경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어머니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를 대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자식은 아버지를 가장 먼저 느끼고 알게 되기 때문이다. 물 한 잔을 주더라도 컵을 그냥 건네는 것과 받침을 하고 두 손으로 공손히 줄 때 서로의 느낌은 다르지 않는가. 주는 대로 받는다고 그 역시 커피 잔만 내게 주는 적이 없다.
나머지 한 가지 약속은 베개를 지키는 일이다. 흔히 부부사이가 나빠지면 어느 한쪽이 베개를 안고 다른 방으로 간다. 난 그 일을 하지 않기로 했다. 어머니가 부부싸움 후에 외가에 가 버리는 것이 싫었다. 베개를 들고 다른 방으로 가다 보면 집 밖으로 나가는 일도 쉬워질 것이다. 그러니 아예 베개를 지키는 내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몇 년 전 그 힘들 때에도 베개를 지켰다. 아니 그가 다른 방에 갔을 때에도 내가 베개를 들고 따라갔다.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물건에 무슨 정해진 자리가 있겠는가마는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과 정신이 깃들어 있다면 결국 그 사람을 지킬 수 있는 물건이 되지 않겠는가.
두 사람이 만나 많은 사람 앞에서 사랑을 약속하고 살아간다. 그 약속은 상대에게 하는 약속이고, 축복해 주는 모든 이들에게 하는 약속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에게 하는 약속이다. 사랑이 어찌 변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노력하지 않는 사랑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으며 지켜질 수 있겠는가? 스스로를 존중하지 않으면 상대를 지켜줄 수 없고 상대를 존중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것이 결혼생활이라 생각한다.
신혼 때 남편과 함께 바라본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 노부부가 나무 그늘 아래 잔디 위에서 점심을 먹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더도 말도 덜도 말고 저런 모습이 되도록 살자고 했다. 그날의 따뜻한 햇살과 파란 하늘과 연둣빛 잔디 위의 부부는 내 최고의 그림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