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신하는 앎
현대사회엔 정보나 데이터 그리고 이에 근거한 지식이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고, 이것을 효과적으로 이해하고 습득한 현대인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한다. 이런 상황에서 앎이 불러올 활기찬 미래를 확신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이 세상엔 어느 때보다 낙관주의자가 넘쳐난다. 그중 한 명인 매트 리들리가 현대문명을 어떻게 찬양하는지 들어보자.
“(…) 1800년 이래 인구는 여섯 배로 늘었지만 기대수명은 두 배 이상으로, 실질소득은 아홉 배 이상으로 늘었다. 가까이 2005년만 봐도, 지구상에 사는 평균적 인간은 1955년에 비해 소득은 거의 세 배로(불변가격), 섭취 칼로리는 3분의 1이 늘었다. 땅에 묻은 자녀의 수는 3분의 1로 줄었고, 기대수명은 3분의 1 늘었다. 그녀(평균적 인간)가 죽을 확률도 훨씬 줄어들었다. 전쟁, 인종학살, 살인, 분만, 사고, 토네이도, 홍수, 기근, 백일해, 결핵, 말라리아, 디프테리아, 장티푸스, 홍역, 천연두, 괴혈병, 소아마비 때문에 죽을 확률 말이다. 그리고 어느 연령대서건 암, 심장병, 뇌졸중에 걸릴 확률도 줄었다. 글자를 읽고 쓸 줄 알며 학교를 졸업했을 가능성은 더 커졌다. 그녀는 전화, 수세식 화장실, 냉장고, 자전거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 1955년에 비해서 그렇다. 2005년에 이르는 50년간 인구는 두 배 이상으로 늘었지만 식량 배급이 이루어지기는커녕,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재화와 용역은 더 늘어났다. 어떤 기준으로 봐도 인류는 놀라운 성취를 이룬 것이다.”(18)
굳이 리들리가 구구절절 말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급격히 늘어난 앎 덕분에 수많은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각자 삶을 개선시켜 줄 앎을 습득하려 매일 분투한다. 그런데 여기엔 한 가지 흠이 있다. 현대문명으로 인해 앎의 성질이 달라져 버렸는데, 어느 때부턴가 앎은 갱신하기 시작했다. 즉 매 순간 앎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질 또한 혁신적으로 달라진다. 이런 사태는 무어의 법칙이나 생성형 인공지능 등 여러 사례가 증명한다. 안타깝게도, 대다수 사람들은 앎을 따라잡는 데 실패할 확률이 높다. 왜냐면 갱신하는 앎에 적응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올해 나온 지식은 내년이 되면 새로운 정보나 데이터로 무장한 지식에 위협받는다. 또 수집된 정보나 데이터는 매달, 매일 심지어 매 시간 단위로 업데이트된다. 즉 현대사회에서 앎의 유효기간은 과거에 비해 무척이나 짧아졌다. 물론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월등히 많은 앎을 학교로부터 배우지만, 기하급수적으로 쏟아지는 새로운 앎 앞에서 정형화된 틀에 갇힌 배움은 무력하다.
또 대다수 사람들은 부족한 돈과 시간 때문에 쏟아져 나오는 정보나 데이터 그리고 이에 근거한 지식을 습득하는 데 제한사항이 많다. 만약 갱신하는 앎을 일부라도 습득하는데 실패한다면, 현대인으로서 사람들은 현대사회에서 도태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경쟁에서 뒤처질까 불안에 시달리거나 심지어 두려워하는 이유가 바로 앎에 있었다.
결정적으로 갱신하는 앎은 이제껏 생존을 가능케 했던 사람의 조건을 넘어서 있다. 앞서 사람의 뇌는 패턴 인식 능력을 가졌고, 효율적으로 작동한다는 걸 언급했다. 그리하여 뇌는 사람에게 앎을 탐구하려는 호기심이란 가능성과 함께, 자신이 지닌 앎에 머무르려는 편향이란 한계를 가지게 됐다. 말하자면 애초 사람은 편향적으로 판단하도록 태어났다. 그러나 갱신하는 앎은 우리에게 편향을 허락하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앎을 습득하길 요구한다. 물론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 사람이 막 현실에 던져졌을 때까지만 해도 패턴 인식은 생존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앎이 넘쳐나는 지금 사람들은 편향으로 인해 경쟁에 뒤쳐져 삶이 괴로워질 위험에 처했다.
예를 들어 가용성 휴리스틱은 객관적인 정보가 아니라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에 의존하여 결정하는 경향을 말한다. 이런 불합리한 판단은 사람이 처리할 수 있는 정보량의 한계로 인해 객관적인 정보를 살펴보지 못한 채 이뤄지기 때문에 발생한다.(19) 또 확증 편향은 정보가 사실인가에 따라 판단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지닌 믿음에 맞춰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경향에 해당한다. 이것 역시 가용성 휴리스틱과 마찬가지로 제한된 인지 능력으로 자신에게 좀 더 익숙한 정보를 우선적으로 판단에 활용하기 때문에 생겨난다.(20) 이 외에도 고정관념이나 선택적 지각 같은 여러 편향이 우리의 객관적인 판단을 방해한다. 이를테면 편향이란,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것이다.
사람은 결코 편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낙관주의자가 마치 편향을 극복한 것처럼 보인다면, 그들이 용케도 갱신하는 앎에 올라탈 여건과 역량을 갖춰서, 주도적으로 앎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앎이 세상을 바꾸는 걸 몸소 체험했기에, 낙관주의자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낙관주의자는 누구도 넘볼 수 없었던 편향을 극복했단 말인가? 그보단 현대문명으로 인해 거대해져 버린 낙관 편향으로 뛰어들었다고 봐야 한다.
18. 매트 리들리, 《이성적 낙관주의자》, 조현욱 옮김, 김영사, 2010, 34쪽.
19. 이남석, 《인지편향 사전》[전자책], 옥당, 2016, 가용성 휴리스틱.
20. 이남석, 《인지편향 사전》[전자책], 옥당, 2016, 확증 편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