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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호철 Oct 08. 2024

이상과 현실 사이 (4)

이상을 점거한 현대문명

현대문명 초기에 활동한 지식인은 불합리한 현실을 해명하려 신을 끌어들이는 걸 점점 멀리하였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신을 언급하지 않거나, 신에 대해 말하는 걸 꺼려했다. 그보단 신이 만든 세상을 이성적 논리나 과학적 방법으로 해명하는데 치중했다.(8) 물론 모든 지식인이 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건 아니었지만, 그들 사이에서 신의 영향력이 줄어든 건 확연했다. 그러다 신은 이 세상을 만들어놓고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이신론’을 공공연히 주장하는 지식인이 등장했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 독립과 프랑스혁명에 불을 질렀던 토머스 페인이 썼던 글엔 이신론이 무엇인지 잘 드러나 있다. 


“우리는 오직 신의 작품을 통해서만 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신의 특성을 전혀 파악할 수 없지만 우리를 신께 인도하는 일정한 원리들을 따르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만약 우리에게 신의 무한함을 이해할 수단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신의 권능에 대해 혼란스러운 생각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의 지혜에 대해 전혀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작동하는 규칙과 방법을 아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9)


페인이 위 글을 쓰던 당시는 아직 종교가 세상을 지배하던 중이었고, 대다수 사람들은 삶의 이상으로써 열렬히 종교적 가르침을 따르던 때였다. 말하자면 이신론은 사람들이 삶의 이상으로써 종교가 아닌 다른 것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단 표지석과 같다. 이후 시대적 분위기나 국제 질서에 따라 그 대상은 계속해서 달라졌다. 제국주의나 전체주의에 경도됐던 사람들은 국가의 번영을 위해 매진했고,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 사람들은 민족주의에 의지하여 고난을 이겨내려 애썼다. 특히 20세기 초 세상은 그야말로 각축장이었다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이념이 넘쳐났다. 각 이념을 가진 사람들끼리 갈등은 격해졌으며, 1·2차 세계대전은 그런 대립이 최고조에 달해 벌어진 참극이었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란 이름 아래 표면적으론 전쟁이 사그라들자, 사람들은 점점 종교나 이념을 이상으로 삼는 일이 줄어들었다. 분위기가 시장경제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돈, 명예, 쾌락 그리고 성취를 이상으로써 선택했다. 발전하는 과학기술을 토대로 쏟아져 나오는 제품과 서비스, 또 지구적 규모로 촘촘해진 무역망으로 연결된 생산과 소비는 방향 잃은 사람들 마음에 파고들었다. 물론 세계대전 이전부터 이런 경향은 꾸준히 증가했지만, 전쟁 이후엔 돈, 명예, 쾌락 그리고 성취가 주류 이상으로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세상은 완전히 변하였고, 그 세상을 현대사회가 꽉 틀어쥐었다.


현대문명이 생겨나고 도대체 무엇이 달라진 걸까? 근대 이전에 이상에 관한 상상은 특정 문화권에 갇혀 있었으며, 이런 상황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둘 다 마찬가지였다. 특정 문화권이 제공하는 상상엔 한계가 명확했고, 사람들은 한정된 이상 안에서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사회가 거의 모든 문화권을 아우르자, 사람들은 상상에 채워져 있던 족쇄를 끊어냈다. 그리하여 혈연, 예술, 종교를 뛰어넘어 국가, 민족, 이념을 지나 돈, 명예, 쾌락, 성취 등으로 이상의 영역을 넓혔던 것이다. 물론 근대 이전에도 돈, 명예, 쾌락 그리고 성취를 꿈꾸던 사람들은 있었으나, 소수의 전유물이었을 뿐 결코 이상이라 말할 순 없었다. 그만큼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 있어 현대사회는 다른 어떤 세상보다 월등했다.


오늘날 사람들의 관심은 현대문명이 과연 어디까지 뻗어 나갈지에 쏠려 있다. 이 문명이 확장을 거듭할수록, 사람들은 더 많은 선택지가 생겼다고 좋아할 것이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이상과 자유의 차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즉 사람이란 동물은 당장 말하고 행동할 자유가 부족할지라도, 뭐가 됐든 의미와 목적을 찾고 싶어 한다. 그래서 설사 내가 갖지 못할 이상을 현대문명이 계속 만들어낼지라도, 계속해서 확장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원한다. 이 문명은 그런 사람들의 기대를 아직까진 저버리지 않았으며, 지구는 물론 우주까지 확장하려 도전을 멈추지 않는 중이다.




8. 토머스 페인, 《이성의 시대》, 정귀영 옮김, 돋을새김, 2018, 277쪽. “또한 인간이 지닌 모든 과학지식과 이 땅에서 인간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모든 역학적인 기술들이 그런 근원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고 자신이 본 장면에 의해 그의 정신은 고양되고 사실에 의해 확신을 하게 되어 지식이 늘어나는 만큼 감사하는 마음도 더 커지게 될 것이다.”

9. 토머스 페인, 《이성의 시대》, 정귀영 옮김, 돋을새김, 2018, 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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