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온실 수리 보고서 - 김금희
소설의 주인공 영두는 창경궁의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게 된다.
그녀는 단순히 자료를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너져 내려간 개인의 기억과 역사적 기억을 복원하려 한다. 어린 시절 낙원하숙에서의 경험, 문자 할머니의 증언, 그리고 창경궁 대온실에 얽힌 역사까지, 서로 다른 시간과 다른 이야기들이 하나의 점으로 모여 완결된다.
줄거리의 짜임이 좋고, 인물들의 이야기가 생생하다. 비록 등장인물의 성격이 선과 악으로 뚜렷하게 나뉘어 있기는 하지만.
식민지 지배를 받은 나라는 조선이며, 가해국은 일본이다. 그러나 조선인이 일본인을 겁탈하려 하고,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다. 피해국의 가해자와 가해국의 피해자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알면서도 일제 강점기라는 배경만 나오면 잊었던 걸까? 매국노가 존재하는 것처럼, 선한 일본인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사건들이 만개한 다음 하나의 씨앗으로 맺음 하는 꽃과 같은 소설이었다. 하루 만에 다 읽고 나서도 마음이 따뜻해져서 좋았다. 리사는 참으로 욕이 절로 나오는 캐릭터였지만, 나는 현실에서 이런 여자보다 더 한 사람도 존재하는 걸 봤다. 슬프게도 생각보다 자기 욕심, 이기심만 충족시키면 그만인 사람들이 꽤 있더라.
찬 밤바람 속에서도 여름으로의 진입은 분명히 느껴졌는데, 그건 공간이 훤하게 열리는 개방감 같은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에너지를 성성하게 드러내도 될 정도로 공기가 바다가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 - 22
사는 게 말이야, 영두야. 꼭 차 다니는 도로 같은 거라서 언젠가는 유턴이 나오게 돼. 아줌마가 요즘 운전을 배워본 게 그래.
유턴이요?
응, 그러니까 돌아올 곳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알고 있으면 사람은 걱정이 없어. 알았지? 잘 왔다, 잘 왔어. -66
소목이 영두씨는 자기 세계가 분명한 사람이라고 그랬거든. 시간이든 생각이든 한번 하고 버리는 게 아니라 남겨두었다가 거기에 다시 시간과 생각을 덧대 뭔가 큰걸 만들어가는 사람 같다고. -163
백인들에게는 본인들이 신세계로 나아가는 것과, 누군가가 자신들의 신대륙에 발을 내딛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무엇보다 위생의 차원에서 그랬다. 자신들이 퍼뜨린 천연두, 결핵, 디프테리아 등으로 북미 원주민의 90퍼센트가 죽는 일을 경험한 그들에게 이민자 한명 한명의 몸속에 있을 세균은 아주 타당한 위협이었다. - 187
나는 아빠를 이해했기에 밉지 않았다. 이해하면 미움만은 피할 수 있었다. 때론 슬픔도 농담으로 슬쩍 퉁치고 넘어갈 수 있었다. - 269
여자들 좋은 세상은 없는 거예요. 양반 가니 일본놈 오고 그게 가니 미국놈이랑 소련놈이 오고, 그다음에 뭐가 올지 나는 이제 궁금치도 않아요.
두자는 심드렁했지만 해가 지면 절대 밖에 나가지 말라고 마리코를 단속시켰다.-293
보육원 책자에 남은 할머니의 회상은 이렇게 다른 증언들로 사실의 두께를 얻어갔다. 수리를 통해 보강되어가는 대온실처럼. 기억은 시간과 공간으로 완성하는 하나의 건축물이나 마찬가지였다. -300
산아야, 더 억울해지는 건 그 억울한 일에 내가 갇혀버리는 일 같아. 갇혀서 내가 나 자신을 해치는 것.-317
그 시절에 대해 무엇이든 말할 수 있다고, 말할 힘을 찾기 위해 보낸 시간은 길었지만 이제 별다른 상념없이도 내가 입은 상처의 형태가 그려졌다. 그러니 그 상처에서 빠져나오는 길에서도 나는 아주 안전할 것 같았고 리사와 만나는 일도 더이상 꺼려지지 않았다. -373
그건 인간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들이 언제나 흐르고 있다는 얘기지. -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