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태엽 오렌지-앤서니 버지스
강도짓을 저지르고 피를 흘리는 피해자를 둘러싸고도 낄낄대는 10대들이 있다. 가정집에 침입해서 남편이 보는 앞에서 부인을 강간하고도 신나는 놀이를 한 것처럼 웃으며 떠나는 녀석들이다. 이들은 함께 있을 때면 무적의 악당이다. 행동은 거리낌이 없고, 타인이 흘리는 눈물과 피는 승리의 트로피일 뿐.
정부가 나서서 이런 악질 범죄자, 특히 청소년 범죄자들을 교화치료하는 프로그램을 만든다. 비행 청소년의 우두머리 격인 알렉스는 살인죄로 수감된 뒤 루도비코 요법으로 교정을 받게 되는데, 약물 투여를 받고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나쁜 짓을 하려고 생각만 해도 고통을 느낀다. 그는 상상만 해도 느껴지는 구토감, 괴로움 때문에 더 이상 범죄를 저지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알렉스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범죄를 멈춘 게 아니라 고통과 괴로움의 조건 반사 때문에 교화된 것이다. 작가는 이런 식으로 자유의지를 상실한 인간을 시계태엽처럼 괴상하게 움직이는 오렌지와 같다고 비유했고, 설령 그것이 악에 대한 문제라도 강제된 선은 자유로운 악보다 더 악에 가깝다고 묘사한다.
소설 시계태엽 오렌지의 주인공은 악당이다.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처럼 악당에게 초점을 맞추고 서술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말종 알렉스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진행이 된다. 정말이지 읽다 보면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 같은 놈, 제발 벌 받아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교도소도 이런 놈은 갱생시킬 수 없을 거다. 알렉스가 교정을 받으며 괴로워 하는 동안 독자는 일말의 동정도 생기지 않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비인간적인 요법이지만 루도비코 같은 강제적 방법 외에는 이런 범죄자를 교정시킬 방법이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그것이 옳지 않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어 했다.
알렉스가 교정 이후 사회로부터 고립되었을 때, 그를 도와주려던 작가 알렉산더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알렉스가 저지른 범죄의 피해자였다. 처음에 알렉산더는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며 알렉스를 순수하게 도와주나, 알렉스가 자기 아내를 죽게 만든 그 패거리란 걸 알고는 위하는 척하며 알렉스를 죽음으로 내몰아간다. 알렉스가 그런 짓을 당해도 쌀만큼 나쁜 놈인 건 맞지만, 그래도 알렉산더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걸 우리는 안다. 내 가족이 피해자라면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자기의 복수, 혹은 자기 자신의 주장이 맞다는 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알렉스를 죽음에 이르도록 간계를 꾸민 것도 범죄이며 나쁜 일이라는 것을 작가는 보여준 것이다.
자살 시도 후 루도비코 요법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된 알렉스가 사회에 나온 뒤, 가정을 꾸리고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친구를 보며 문득 자기가 이전에 했던 행동들이 얼마나 유치했던가 갑자기 깨닫는 묘사 역시 '악'을 '악의'으로 교정하는 것의 무의미함을 말해 준다.
오래된 중국 무협 소설은 부모의 원수를 갚는 이야기가 굉장히 흔한 소재였는데, 복수를 갚는 순간 죽임을 당한 자의 자식도 복수를 다짐하게 되므로 원한은 무한이 이어지게 될 것이다. 악이란 악으로 소멸이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피해자가 있고, 가해자가 있지만, 그것을 똑같은 악으로 갚는다면 굴복은 시킬 수 있어도 진심으로 그가 반성하고 변화하기는 어려운 게 아닐까. 소설은 이런 질문을 던지며 끝난다.
(미국판과 영화는 알렉스가 다시 폭력과 범죄를 저지르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는데, 저자인 앤서니는 영국판을 훨씬 좋아했다는 걸 보면,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고 싶었나 보다.)
주인공이 악당이라 기분이 좋진 않지만, 두께도 얇고 가독성도 좋고 토론 거리가 많아 독서 토론 모임용 독서로 괜찮은 책이다.